저자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초반에 담담했다.
저자의 어머니의 투병,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헌신의 지점들에서 꿀렁이기 시작하더니 어머니의 마지막 '최소한의 순간', '소실의 순간'에 무너졌다.
그래서 읽던 것을 멈추고 잠깐 '씀'으로 '숨'을 고른다.
은교와 은교의 언니는 다섯 살 차이인데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수능을 두 달 남긴 고3 언니한테 중1 여동생의 발암 사실을 온전히 알려주려는 부분에서, 두 자매의 일화가 소개된다. 이사를 하고 두 아이의 방을 정하는데 큰 딸이 자기는 학교와 독서실에 있는 시간이 많다며 더 큰 방을 은교에게 양보했다는 부분에서 또 눈물이 왔다.
또 이 '젖음'을 옮김으로서 '숨'을 고른다.
언니는 동생을 혼낼 때는 아주 따끔하게 혼냈다고 했다.
근데 몇 줄 더 읽지도 못 했다. 은교는 학교 수업 시간에 자신이 생각하는 가족을 표현했다.
'아빠는 침대, 엄마는 내비게이션, 언니는 회초리'
책에서 저자는 이 메모를 보고 한참을 웃었다는데 나는 한참을 울었다.
은교에게 아빠는 그렇게 침대같이 편안한 존재였는데, 나는? 한참 더 울었다.
이틀 째 집에 혼자 있다. 마누라랑 하니는 교회 갔다가 장모님, 큰 처형댁과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나는 계속 읽는다.
신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인 '가족'
'은교가 애기였을 때부터 아빠와 하는 놀이가 있다. 퇴근 시간, 아빠가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나면 자기 방 침대로 뛰어들어가 자는 척을 한다. 그러면 남편은 은교 방에 들어가 허리를 굽혀 아이를 찾고서,
"아빠는 은교가 자는지 안 자는지 냄새 맡으면 다 알 수 있어." 하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킁킁대며 냄새 맡는 시늉을 한다. 그러면 은교가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고 그제서야 그 놀이가 끝이 난다. 그 놀이는 스무 살이 넘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아이는 알고 있을 것이다. 유치해 보이는 그 놀이가 사춘기가 된 딸아이와 스킨십을 하며 사랑을 전하는 아빠만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나는 또 '펑펑'이다. 자꾸 우니 덥다. 윗통을 벗었다 입었다를 반복한다.
보통의 남자들보다 1배 이상 섬세한 나는 확실히 '갱년기'다.
책은 독자와 저자와의 대화이다.
수능을 얼마 남기지 않은 날 은교의 수술이 잡혔고 수술 전날 밤 저자와 큰 딸이 통화한다.
"은솔아"
"왜, 엄마?"
"지난번에 정한 6개 학교는 그대로 쓸 거니?"
"응"
"접수는 언제 할 건데?"
"원서는 미리 다 써 놓고 금요일에 접수하려고. 내가 잘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엄마는 은교만 신경 써. 은교는 지금 어때? 아직도 계속 설사하고 있어?"
나의 장애 때문에 나의 엄마는 '자신의 가장 빛나던 시절' 사표를 냈고 '가장 어두운 시절'의 나에게 투신했다. 나의 한 살 터울 형은 '외로움'과 '방치'의 시간을 보내며 컸다.
그래서일까? 성격이 나와 다른 우리 형은 공부는 참 잘 했는데 '인내천(忍耐踐)'의 삶, 참기만 하는 삶을 살았던 탔에 많은 기본이 무너져 버린 채 서울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은둔'하듯 살고 있다.
나는 형한테 미안해서 또 울었다.
은교의 수술실 침대 위 천장에 적힌 성경 구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이사야 41장 10절)
내가 2022년, 2024년 세브란스에서 수술하던 날들에도 천장 위에는 저 구절이 있었다. 수술 직전에는 참 추웠는데 저 짧은 문구 하나에 이상하게 그 크고 시리던 '공포'와 '두려움'이 덜어졌다.
저자는 수술방에 아이를 혼자 들여보내고 나서, 아이 침대에 혼자 앉아 핸드폰에 저장된 아이 사진들을 보며 숨죽여 울었다. 나도 울었다. 네 살배기 은교가 양쪽 갈래 머리를 하고 엄마를 보고 웃고, 넓은 잔디밭에서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웃는다.
나는 2014년 세월호가 침몰한 날 팀 직원들과 콩나물 국밥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뉴스 첫 장면이 나오자마자 통곡하는 내 옆자리 선배 여직원을 보고 의아해 했다. 나중에 왜 그러셨냐고 물었더니 "제 아들과 같은 나이의 애들이거든요"라고 하셨다.
그 이후 몇 년간 세월호 영상을 숱하게 보면서도 그분의 그 당시 감정이 잘 와닿지가 않았다.
2015년 나는 딸을 낳았고 2020년 아이가 심한 감기에 걸려 온 가족이 잠을 설치던 새벽에 유튜브로 '세월호 다큐'를 봤다. 그 당시에 봤던 장면(세월호가 바다 밑으로 반 이상 들어갈 때, 아이들의 마지막 메세지를 보여주는 장면)을 보자마자 꺼이꺼이 통곡했다.
자식을 낳고 나서야 나는 엄마가 남편 부재 속에서 우리를 키우며 느꼈을 처절한 '고통'과 속절 없는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고 수 십 차례 '자살'하거나 '나와 같이 죽고 싶었다'던 엄마의 그 밤들을 미약하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은교는 수술 후 학교로 돌아와 치어리딩 국가대표 상비군이 되었고 치어리딩 대회 참여차 미국 올랜도에 갔는데 그 기간에 은교의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은교는 나중에 펑펑 울었다. 여섯 손자 중 은교를 가장 예뻐했던 할머니.
저자의 남편이 이야기한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아. 그런데 처음으로 하나님을 믿어보고 싶어졌어. 보고 싶은 우리 어머니를 한 번만이라도 뵐 수 있다면, 그 천국이 있다는 걸 믿어보고 싶어졌어."
요즘의 내가 그렇다. 유일신(배타성)과 원죄자 설정 구도, 창조론의 비과학성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이 팽배한데(사기 결혼을 했는데) 왠지 조금씩 가보고 싶어진다.
다른거 다 모르겠고, 낮아져 보고 싶다. 엄마를 생각하면 그렇다. 한없이 낮아져서 발톱저리게 쳐박고 무릎 끓어 빌고 싶다.
'제발. 엄마의 치매를 좀 늦춰 달라고.'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조금만 엄마랑 더 보게 해달라고,'
'이제 아이가 좀 컸으니 나에게도 엄마를, 나의 모든 것 중 단 하나 뿐인 엄마를 좀 그냥 놔두라고'
은교야 잘 살아줘서 고맙다. 근데 아저씨는 엄마 생각에 더는 못 쓰겠다.
나의 엄마는 '평범한 아낙'을 넘어서는 역사상의 '위대한 어머니들'의 유형에 속하는 분이다.
나의 엄마는 나를 큰 틀에서 양식 있는 인간으로 키워냈고, 처음으로 요즘 나를 '방관'에 두고 있다.
나의 엄마는 본원적인 '착함'을 갖추고 있고 무엇보다도 풍부한 '정서'와 인간 일반에 대한 '연민'이 있다.
저자에게 참 감사하다. 몇 번을 울고 나니 지금 나의 가슴에 '슬픔'과 '그리움'이 꽉 찼다.
효도를 못 해왔다는 회한도 크지만 천하의 '개새끼'기 되어서라도, 엄마 속을 썩이면서라도 앞으로 당신 곁에서 살지는 못 할 것임을 알기에 '슬픔'과 '그리움'이 가득 찼다. 그리고 그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조금씩 꾸역꾸역 웃음을 되찾고 덜 슬퍼하고 덜 그리워 하게 될 것임을 알기에 그게 좀 가장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