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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9.(찾으려거든 나를 쏘고 찾아봐라)

by 하니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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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7월 15일 아버지는 후일 언론 통폐합으로 문을 닫은 합동통신사로 자리를 옮겼다. 외신부에 근무하는 걸 전제로 한 이동이었다.

그 때 외부에서는 아버지가 한국일보에서 임금투쟁으로 밉보여 밀려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으며 한국일보 생활은 매우 편했다.

아버지가 합동통신사로 자리를 옮긴 것은 아버지 자신을 위해 시간을 좀더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통신사 외신부는 새벽에 근무하고 나면 시간이 많이 남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일보를 그만두고 합동통신사로 옮긴 것이다.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합동통신사는 편집국 분위기가 한국일보와는 엄청나게 달랐다. 기자들은 완전히 사기업체 사원 취급을 받았고, 한국일보에서 누렸던 언론인으로서의 자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는 질식할 것만 같았다고 한다.


우리 형을 제외하고 아버지, 엄마, 나는 '통제'와 '자유의 제한'을 극도로 견디지 못한다.

옥죄면 옥죌수록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몸의 힘을 빼고 체념하는 것은 아니고, 고개를 쳐들고 눈깔을 치뜨는 스타일이다. '미친 개'의 습성이 있다.


신문사 외신부는 통신사에서 제공하는 번역된 뉴스를 가지고 기사를 작성하지만 통신사 외신부는 AP, UPI 등 해외 통신사에서 텔레타이프로 들어오는 기사들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곳이었다. 즉 우리말로 빨리 옮겨 국내 각 언론사로 송고하는 곳으로서 기자들은 영어 기술자나 다름이 없었다.

1년쯤 지나면서 아버지는 '도저히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언론사가 이렇게 관료적이어서는 안된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꾸어보자...


아버지는 우선 마음이 맞는 동료 10여 명과 무명(無名)의 동아리를 만들었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 이름을 버젓이 내걸고 조직활동을 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에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매달 두 차례 모임을 가졌는데 한 번은 회원 집에서 회합을 갖고, 나머지 한 번은 산행을 했다.


정동채(전 국회의원)와 윤후상(전 한겨레신문 편집국장) 그리고 정지창(전 영남대 독문과 교수), 정수용(전 빙그레유업 상무), 정남기(전 연합뉴스 계열사 사장), 고승우(한겨레신문 통일문제연구소 국장) 등이 그 멤버였다.

이 모임은 유신 절정기인 1975년에 시작되어 1980년까지 유지되었다.


아버지는 모임의 첫사업으로 '촌지회수 운동'을 벌였다. 회원 중 출입처에 나가는 기자들이 받아온 촌지를 회수해 동아일보 언론자유튜쟁위원회 같은 뜻 있는 단체에 보내는 등 유용하게 썼다.

1978년 당시 보사부를 출입하던 윤후상 기자는 매월 말이면 월급처럼 30만원의 촌지를 받아왔다. 국방부를 출입하던 정지창 기자도 윤후상 기자보다는 적은 액수였지만 촌지를 받아 모임에 냈다.


나는 포털을 검색했다. 그 당시 중견 기자들의 월급이 10만원 남짓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기자'라는 직업은 눈만 딱 감으면 월급의 두세 배에 달하는 '촌지'를 쌓아가며, 가증한 미소를 띄고 뒷배만 불리면서 기득권의 이 곳 저곳에 빌붙어 가며 '상갑'의 지위를 평평하게 유지하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아주 선망 받는 직업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그들을 지식인 대접까지 해주었으니 '내가 비겁한가?, 권력의 개 노릇을 하고 있는가?'라고 자조하다가도 섣부른 '자존감'을 대차게 리필해주니 대부분 '기'며들어 살며 은박의 이쑤시개를 찾아갔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가 그런 달콤한 기득권의 편에 서지 않았다는 것은 그저 그의 '운명'이다.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나의 엄마도 아버지의 그런 '투사의 용기' 때문에 선택을 했다고 하니 나의 부모는 나의 '운명'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호탕 별다방, 정의 편의점 수준이라 불의를 보면 참지 않는 분이었고 그 자리에서 '즉통즉설'을 날리는 당신이었다고 한다.

당신의 공장일을 하느라 기식 하는 직공들을 할머니(냉혈인)가 모질게 대할 때마다 싸대기는 물론이고 몇 번을 할머니를 전라로 벗겨 대문 밖으로 쫓아내셨다고 한다.

'징하게 모진 년, 나가서 썩 뒤져버려라' 말씀하시면서 말이다. 모자란 할미는 변하지 않았다.

내 할머니의 18번은 그 어린, 10대 중후반까지에 수렴하는 여직공들한테

"저 년이 우리집 숟가락을 돌라내갔소." 였다고 한다.

며느리한테는 "저 년이 다른 남자를 음탕하게 훔쳐 보는 걸 여러 번 봤다."라는 식의 말로 분란을 일으켜 작은 어머니들이 피떡이 되버린 적이 많았다.

나를 낳은 엄마한테는 "우리집에 이런 병신 씨는 없었다. 어떤 병신한테 가랑이를 벌린거냐?"


할아버지는 1987년 안기부 직원 5명이 아버지를 찾으려 서울에서 내려왔을 때 전설을 날리셨다.

"내 아들이 이 곳에 있지 않지만 있어도 내어줄 수 없다. 찾으려거든 나를 쏘고 찾아봐라. 한 방에 날 보내야 할 것이다. 씹어먹을 놈들아!"

홀홀의 노구였지만(그 당시 58세) 180센티미터가 넘는 기골에 목소리가 쩌렁쩌렁한 할아버지의 기개에 그들은 짧은 수색 후 두어시간만에 돌아갔다고 한다. 물론 그 기세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고 수배자가 지 아비의 집에 있을리 만무하리라 판단했으리라.


엄혹한 유신치하에서 벌인 촌지 회수 운동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웬만큼 정신 차리고 사는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무용담처럼 회자되었다.

특히 촌지에 물들어 언론인으로서의 정도를 때로 잊기도 하던 언론인들에게는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 언론사에서 동아리 모임이 촌지를 회수한 사례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전무후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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