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예쁜 가운데 손가락

by 하니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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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오각형(나, 마늘, 엄마, 딸, 형)은 처음으로 다함께 저번 주 월, 화로 설악산 여행을 다녀왔다.

우리 오각형(나, 마늘, 엄마, 딸, 형)은 처음으로 다함께 저번 주 월, 화로 설악산 여행을 다녀왔다.

정확히는 2015년 2월 6일에 딸(하니)이 태아(라미)일 때 속초에 오각형과 간 적은 있었으나 같은 공기로 간 것을 이번이 처음이었다. 형이 시간을 못 내서 번번이 실패했다.

저번 주 목요일 어버이날 당일 딸내미 저녁을 차려줬다. 딸이 숙제한다며 친구집으로 가고나니 엄마 생각이 났다. 무심하고 투박한 아들을, 그것도 더딘 막내 아들을 낳아 세월보다 더 빨리 '세월'을 먹은 울 엄마. 문자를 보냈다. 금요일 재활치료 끝나고 신촌 세브란스 병원 근처에서 맛난 걸 사드리려고 했더니 저렇게 문자가 왔다.

'섬망', '치매'는 그렇다 치고 엄마는 '무릎'이 엉망이다.

2013년 나의 '결혼' 이후, 2015년 형의 '진천행' 이후 엄마는 평생을 바쳐 키워낸 두 아들의 부재에, 특히 나의 부재에 '고독'해 하셨다.

말씀은 항상 쿨하고 강직하게, 외로운 티를 안 내려 하셨지만 '2015년 1월 형의 의사고시 시험 응시 전날 사건'이 엄마의 '스산함'의 깊은 단면을 상징한다.

밤 10시 넘어 경찰한테 전화가 한 통 왔다.

"이현희 님 아드님 되시죠? 여기 갈현 초등학교 정문 앞인데요. 이현희 님이 만취해서 쓰러져 계십니다."

"네? 저 무악재 역 이제 막 지났습니다. 빨리 가겠습니다."

나는 술 약속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던 길이었다. 연신내 역에 내리자마자 뛰어갔다. 도착하니 경찰차와 구급차, 형이 와있었다. 형은 내일 새벽에 시험을 보러 나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형은 나와 같은 96학번이었데 그 해 '13번째' 의사고시에 응시하는 상황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그 아픈 역사를 쓰겠지만 나를 둘러싼 여러 역사 중 가장 쓰고 싶지 않은 소재이다.

엄마는 그 무렵 하루에 15 ~ 20 킬로미터를 걷는 '매일'이었다. 족저근막염이 왔지만 외로움을 태워버리는데 '걷는 것' 이상의 대체재를 발견하지 못하셨던 것 같다. 엄마의 '무릎'은 그 때 많이 아작났다.

전혀 살갑지 않았던, 속만 썩이던 아들이었지만 30대 이후부터는 철이 조금 들었고 매 주 저녁 식사를 한 번 이상 같이 하고, 주말에는 함께 도서관에 갔다가 오후에는 '이대 모모하우스'나 '씨네큐브'로 영화를 사이좋게 보러 다니던 모자였다. 그렇게 5년 넘게 비슷한 '아비투스'를 공유하다가 '결혼'으로 단절되었다.

하도 20대를 개망니로 살았던 나인지라 '속죄'의 마음이 바탕이 된 나날들이었다. 그리고 엄마랑 노는게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재미가 있었다. 익숙했고 대화가 잘 통했다. 그 시절 손을 못 잡고 다닌 것이 아쉽다.(그 시절에는 손만 스쳐도 징그러워 하셨다.) 지금은 잡고 다닌다.(지금은 그냥 가만히 계신다.)

형은 엄마의 가장 빛나고 높은 '미래'였다가 가장 깊고 어두운 심연의 '동굴'이 되었다.

매 년 의사고시 시험일만 다가오면 엄마는 초예민해졌고, 그 날도 그랬나보다.

엄마를 우여 곡절 끝에 집으로 데려온 우리.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형의 13번 째 불합격을 예상했는데 십삼신 할매의 도움으로 '합격'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그 시절, 그 겨울, 그 날이다.

그런 형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척 동생들(막내 작은 엄마의 두 아들)과 지난 주 토요일에 만났다.

두 달 전 첫째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향후의 '선산' 관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넷은 서로를 무척 아끼는 친척 사이임은 분명한데 이런 저런 각자의 이유로 20여 년만에 처음으로 같이 모이게 된 자리였다.

형과 동생들은 내 동네 횟집으로 와주었다.

나는 조금 늦었고 들어가니 형과 애들이 먼저 와있었다.

앉자마자 형이 익숙한 표정과 톤으로 말을 시작한다.

"오웰아. 내가 이번에 설악산을 다녀오면서 너한테 깜짝 놀랐다.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말고 너가 엄마를 대하는 태도가 심각....블라 블라."

나는 형이 입을 뗀지 몇 글자 만에 눈을 감았다. 형의 오래된 가르치는 투의, 훈계 방식의 잠언이었다.

"말 다했지? 형 그런데 말이야. 12월부터 서울에 탄핵 촛불 집회에 올라왔다고 했지? 저번 주 토요일까지도 계속 왔다고 했지? 그런데 형 엄마 집에 몇 번 왔지? 엄마는 형이 그렇게 자주 올라온 걸 전혀 모르시는데? 형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는데 한 번 내일 내려가는 차 안에서 생각해봐. 형이 그런 말할 입장이 되는지?"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나는 너의 태도를..."

"형 그만, 여기 두 동생들 앞에서 그런 얘기 그만 하자. 내가 형한테 그 동안 할말이 없어서 안 한 줄 알아? 그냥 오늘은 사랑하는 동생들과 잘 마시고 해야할 얘기 잘 마치고 헤어지자. 좋은 날이잖아. 형 얘기 포인트는 알겠고 긍정적으로 수렴해서 반성의 시간 가져볼께. 이상 끝. 그만 말해."

형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몇 시간 뒤 이 얘기를 전해들은 마늘이 말했다.

"기가 찬다. 그래도 잘 했어. 더 말대꾸 안 하고 안 대든거 잘했어."

나는 형의 그 불투명한 방식, 그리고 자기 몫의 시혜를 교묘히 섞은 위선적 대화 방식을 어릴 때부터 싫어했다. '솔직'과 '에두름 없는' 나의 방식과는 언제나 이질적이었다. 마누라의 방식도 '직진'이다.

그렇게 토요일이 갔고 어제 아빠에 대한 포스팅을 오랜만에 올린 후 엄마랑 '서오릉 두부마을'에 갔다.

한 달 전에도 엄마랑 갔던 집이었다.

유난히 사람이 많았고 대기표 4번의 시간을 기다린 후 들어갔다.

"야야, 너랑 여기 5년 넘게 만에 온 것 같다. 그런데 반찬이 형편 없어졌다. 나 다시는 여기 안 온다."

한 달 전에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웰야. 역시 여기는 최고다. 반찬들이 어쩜 이리 정갈 하니? 서오릉 오면 '북극해 고등어 집'이랑 여기 '두부마을'에만 오자. 사돈하고도 다음에 꼭 오자 알겠지?"

형보다 나는 언제나 '실행파'였다.

언제나 형이 더 착했지만, 나는 형의 잔소리를 싫어했다.

세상의 '입력값'은 비슷했는데 '출력값'과 '출력방식'이 근본적으로 많이 달랐다. 어릴 때부터 형은 나를 많이 혼냈는데 혼내다가 제 풀에 형은 많이 울었다.

돌아서며 나는 자주 생각했다. '븅신, 쪼다 새끼 울다가 잠이나 쳐자라'

어릴 때 버스를 타면 나는 팔을 밖으로 잘 내밀었다.

"어이 거기 학생 손 집어 넣어야지~" 기사님은 말했다.

"오웰아. 기사님 말씀 잘 들어야지. 다신 내밀지마!"

나는 일단 팔을 넣었다. 그리고 창 밖으로 가운데 손가락만 다시 내밀었다.

이상하게 기사 아저씨가 한번도 그 '예쁜 손가락'을 지적한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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