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말기인 1979년 말, 기자 사회에서는 '혁명'이 준비되고 있었다.
당시 비공개로 은밀히 서클 활동을 해온 곳은 경향신문, 중앙매스컴, 합동통신사, 한국일보 등 4곳이었다.
이 네 언론사의 서클 멤버들이 모여 '기자협회 민주화'를 위해 나서자고 합의했다.
1964년에 창립한 기자협회는 정치 권력에 순응하는 편이어서 유신시대의 기자협회와 기자협회장은 '유신적'이었다.
1979년 말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80년을 맞이하여 사회 전반에 민주화 요구가 끓어올랐다.
민우회 중심의 기자들은 기자협회가 민주화하기 위해서는 기자협회장을 민주적인 인사로 바꾸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고 아버지는 기자협회장에 출마하게 되었다.
1980년 3월 31일에 열린 전국대의원대회 선거에서 아버지는 '용기로 문제를 풀겠다.', '잃어버린 땅을 찾자'는 요지의 소견 발표를 하였고 임기 1년의 제20대 기자협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취임사에서 아버지가 '잃어버린 땅을 찾자'고 말한 것의 참뜻을 당시 대의원들은 얼마나 이해한 것이었을까?, 잃어버린 땅은 당연히 언론의 자유를 의미한다. 국민의 자유 신장, 즉 언론의 자유 확대를 위해 있는 힘을 합해 보자는 요지였다.
4월 1일 첫 출근을 하자마자 아버지는 바로 나섰다.
당시 기자협회 사무실에는 중앙 정보부에서 2명, 보안사에서 2명, 치안본부에서 1명, 시경에서 1명, 남대문경찰서에서 1명 등 모두 7명의 기관원이 파견되어 있었다. 그들은 오전 10시가 되면 회장실로 출근했다.
당시는 박정희 군부정권에 이어 전두환 신군부 정권이 기반을 다지던 때였다.
제주도만 제외하고는 계엄 치하였다. 사회 분위기는 살벌할 대로 살벌해 언제 전두환이 전면에 나서서 공포통지를 진두 지휘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유신을 경험했던 학생 등 민주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서울역에 10만이 넘는 학생들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군중들이 그렇게 모인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엄청난 사건이다.
아버지는 출근 첫날 기자협회 회장실 문앞에 '기관원 출입금지'라고 써붙였다.
그 시절의 공포통치 속에서는 발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기관원들은 기자협회 회장실 문 앞에 써붙여진 '기관원 출입금지'를 보고 들어오지 못했다.
다음으로 아버지가 한 일은 '기자의 밤'을 만든 것이었다. 매주 월요일 밤이면 기자협회 사무실이 있는 빌딩의 지하 레스토랑을 빌려 언론계의 선후배와 동료들이 모여 시국에 관한 토론을 벌이도록 했다.
기자의 밤 모임에는 천관우, 송건호, 리영희 선생 등 당시 언론계의 지도적인 어른들이 나왔고, 동아,조선투위 위원들과 현역 언론인 중에서도 뜻있는 젊은 기자들도 나와, 모두 60~70명 되는 사람들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아버지는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18년 된 영국제 중고 수동식 인쇄기를 사들여 주요 시국 현안에 대해 하루에도 몇 건씩 성명서를 찍어 배포했다.
당시에는 모든 언론들은 검열을 받았기 때문에 꼭 나가야 할 기사는 빠지고, 키워야 할 기사는 줄이고, 줄여야 할 기사는 키우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기자협회에서 시국의 주요한 사안을 몇 건씩 성명서란 형식으로 발표하자 이 성명서가 AP, UPI, 로이터 등 외신기자 수중에 들어가 바로 전세계 뉴스망을 타고 전파되었다.
바로 이 부분이 결정적으로 전두환에게 눈엣가시가 되어
중앙정보부장이 '김대중과 김태홍은 반드시 잡아 족쳐라'는 말을 했다고 하며 역으로 이렇게 아버지가 쏘아올린 '성명서'의 씨앗이 거대한 나무가 되어 나중에 김대중의 구명에 결정적 힘이 되었고, 이것이 단초가 되어 DJ에게 아버지는 깊은 보은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했다.
격동기였던 1980년 기자협회장을 맡은 아버지는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좀더 많은 일을 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다.
계엄 당국에게는 아버지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척결 대상이었다고 한다.
그 후 5.17이 터지자마자 아버지는 지명수배되어 도피하는 신세가 되었다.
아버지는 학자형이나 책사형 인간은 결코 되지 못하는 위인이었고, 낭만적 투사형 덕장의 전형이었다.
시대가 '아버지'를 발굴했고, 아버지가 '시대'에 부응했다.
그러한 아버지의 적자인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것을 한심하게 여긴 적이 많은데, 어지러운 시절을 지나고 나면, 마음과 생각 단도리를 잘 해서 '여생의 방향'을 잘 잡아보도록 해야겠다.
보고싶소. 아버지.
아버지가 생전에 내게 해주셨던 말이 기억난다.
"오웰아. 언론 자유는 모든 자유를 자유롭게 해주는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