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한 적이 있는가?

by 하니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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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 : 일의 앞뒤 사정을 보고 마땅히 그러함.


이 정의는 당연한가?


생각해 볼까?


'일' : 일이라는 것은 틈과 틈 사이의 마땅한 '경계'인가? 경계와 경계 사이를 메우는 당연한 '채움'인가?

우리는 누군가가 돌아가시면 '일'을 치뤘다고 한다.

여기서의 일은 '어떤 내용을 가진 상황이나 장면'의 모면인가? 아니면 '어떠한 계획이나 의도에 따른 이룸'인가?


'앞' : 앞은 뒤의 '앞'인가? 뒤의 '뒤'인가?


'사정' : 사정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유나 까닭일 수도 있겠고, 사물과 사람 사이의 인과 없는 미움일 수도 있겠다. 옆집의 개똥이가 집 한 채를 더 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두 번째 주택을 부러워하는 것인가? 개똥이의 '고복격양'을 미워하는 것일까?


'마땅함' : 일의 원인과 결과라는 것이 시종이 일관하게 그리됨이 맞는 것인가? 옳은 것인가? 틀림이 없는 것인가?


'그러함' : 어떠한 동적인 상태나 정적인 모습이, 기질이 원래와 계속 같은가? 변화가 있기 보다는 변화가 없음으로 자신의 그럼다움을 지키는 것이 '그렇게 함'이 맞는가?


나의 인생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에서 시작하였다.

나의 엄마는 병원에서 '걷지 못할 것'이라는 언명을 사표와 출사표로 뒤집었다.


나눔과 편견, 분리와 구분은 '당연함'의 이름으로, '자연스러움'이라는 요설로 꾸며지곤 한다.

스스로 당연히 그러함이라는 뜻을 지닌 '자연스러움'이라는 단어.


생각해 볼까?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환경으로서의 자연은 스스로 평온하다.

인간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그대로의 현상과 물질일 때 특히 그러하다.

인간의 본성이나 본질을 나타내는 의미에서 '자연스러움'이라는 말을 쓸 때 그 평온한 단어는 예봉을 달리한다. '자연스러움'이라는 테제를 연계하여 각종 우악스런 지배와 무감성의 배제 논리를 정당화한다.


비주류는 마땅히 자연스러운 사람들, 당연인들은 좀 아니다.

주변의 방외한 아웃사이더들이다.

사회적 소수자로 구분하곤 하는데, 여기서의 소수란 숫자의 적음이 아니고 표준의, 자연스러운, 당연한 권력에서 외떨어져 있는 자들이다.


백인, 남성, 비장애인 등은 계량의 높낮이로 다수성을 견인하는 것이 아니라 제압의 상태, 지배력의 유지를 통해 힘의 다수성을 획득한다.

주류와 비주류를 가르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내적 형질과 헤게모니의 힘, 척도의 차이이다.

차별 당하는 자, 표준의 권력에서 배제되는 자, 파생 이익에서 소외된 자들이 소수자, 비주류가 된다.

흑인, 여성, 장애인, 비정규직..., 이들은 수가 많아도 비주류다.

명목과 서열, 간격과 비율의 척도에서 소외되고 차별 당하는 자들이 비주류다.


모르긴 몰라도 나는 본래적으로 비주류의 안정적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래서 나는 영원히 '삐딱'하다.

나는 그래서 당연함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한 적이 많다. 많은 정도가 아니고 그러한 지점이 내 생을 관통하는 본연적 '입각점'이 되고 '추동력'이 되었다.


남들 다 불행한데 혼자만 행복하다면 이는 정신병자다.

그런 까닭에 비주류 각성점이 있는 사람은 소수자의 인권에 관심을 갖고 그들이 차별과 억압을 당할 때 분연히 일어서 항의하고 분노한다. 그리된다.


나는 애니어그램 7번이다.

얼어 죽어도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나는 당당한 '당연함'의 지점에서 도망간다. 진부함와 구태의연의 지점에서 '유목민'이 된다.

유목은 선택적 편력이 아니다. 필연적 유랑도 아니다.

나는 7번인데 8번 날개를 쓰기에 마음에 들인 내 사람은 확실히 챙긴다.

다만 움직이면서 머무르고, 떠돌아다니면서도 붙어 있다.

집착도 하지만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향후에는 더욱 어디든 집을 지을 수 있고,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심정을 가지고 살기로 했다.

가족이 아직은 친숙하지만 마침내 낯설게 느끼게 될 것이라는 직감적 확신이 든다.

당연함이 '당혹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모든 곳이 고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의 힘을 갖춰보자.

내가 믿는 당연함은 '낯설어 하기' 뿐이다.


나는 '유머'가 있는 편이다.

내가 생각하는 유머의 핵심 요소는 '솔직함'과 '자기 비하'이다.

유머는 그리 어려운게 아니다.

물론 혀끝 재주와 머리끝 재치가 좀 가미되어야 하지만.

자신의 가갸거겨를 솔직하게 내던질 줄 알고 스스로의 못남과 비루함들을 가감 없이, 조금은 일부러 낮춰 던질 수 있다면 그것이 유머가 되고 해학이 된다.

그래서 유머는 '습관'인데, 그 유머는 당연함을 지키려는 아집과 습벽에 막히기 십상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가 스스로의 친숙한 자아만을 보이고 지키며 살려 할수록 '위선'이 더해진다.

가끔은 자신의 거짓 이면을 솔직하게 까뒤집어 솎아 벗겨낼 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유머가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대비에 없던 웃음은 행복과 긴장의 이연을 주기 때문이다. 강압이 아닌 자연스러움으로 나를 무장해제 시키기 때문이다.

관계의 어설픈 유지를 위한 허약한 억지 웃음의 '미숙함' 보다 나의 모든 교양의 조건과 내용을 형해화 시키는 그런 진짜 웃음을 주는 원숙한 '유머'가 좋을 수 밖에 없다.

유머는 보통 당연함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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