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을, 빙판길을 걷는다는 것은 내게 두려운 일이다.
세상을 절룩이며. 조금 기울여 볼 수 있다는 것을 행운이라 여기며 살려 노력하는데 이런 요즘길을 만나면 '나의 장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어느 누구도 부모 형제를 선택할 수 없다.
어떻든 나는 그 분한테서 한 가지를 더 부여 받은 채 선택 되었다.
대학교 3학년 무렵.
나는 연신내에서 불광동으로 넘어가며 미성아파트를 옆 고개를 지나고 있었다.
건너편을 보니 초등학생 쯤 되는 아이가 나와 아주 비슷한 모습으로 뒤뚱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아침에 엄마랑 투닥이고 온 나는 익숙한 익숙함의 소용돌이를 느꼈고 횡단보도를 건너가 뛰어갔다.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본원적인 공포가 있는 나는 좀처럼 뛰는 법이 없다.
다다른 나는.
"학생! 따라 걸으니 재밌어?"
나는 몸을 밀쳤고 아이는 넘어졌다.
영문도 모르고 주섬주섬 일어난 아이는.
"누구세요? 저는 그냥 걸어 가는건데요?"
그 흔한 억울함 한 방울 맺히지 않은 그 아이는 이내 비슷한 걸음을 더해갔다.
허공에 멍하니 걸려 있던 내 동공은 젖어 들었다.
30대 초반.
포털 카페를 뒤지다가 '장애인 만남' 카페에 가입해 차곡차곡 수런수런을 더 해갔다.
몇 달 뒤 '만남 공지'가 떴고 강남 세우관 근처 신사동 어느 카페에서 장애인들이 모여 소개팅을 했다.
극심한 '남초' 카페에서 1차 심사를 통과한 사람들이었고 공무원의 인기가 한창 높던 그 시절 세무서 공무원이었던 나는 인색한 점수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최종 매칭에서 나는 성사 되었고 상대 분은 정말 얼굴이 예뻤다.
며칠 뒤 첫 데이트. 그 며칠 내내 나는 참 많이 설렜다.
그 분의 옥수동 지하 빌라집 앞에서 그 분이 준비해서 나오기를 한참을 기다렸고 그 분이 올라와 나오는 순간 정말 이뻐서 가빠했던 기억이 선연하다.
한강 둔치를 우리는 걸었다. 그리 길게 걷지는 못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 분은 '너무 좋았어요. 다음엔 영화 볼까요?'라는 문자를 보냈다.
나보다 훨씬 심한 하지 장애인이셨던. 지팡이를 집어야 걸으실 수 있던 그 분과 둔치길을 걷는 동안 나는 무력하고 분명하게 부끄러웠다.
남들보다 서너 배의 시간이 걸리는 보행에 대한 시선의 향연으로 가득했던 순간들이었다.
30년 넘게 눈빛 강간을 당해온 나인지라 그 부끄러움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고 잔인한지 알면서도 나는 부끄러웠다.
피아식별이 안 되는 망할 놈의 그 순간을 겪으며 마지막을 생각 했다.
'네 다음에 뵈요'라는 답장을 보내고 나는 이후 온 많은 문자와 전화를 그대로 흘려 보냈다.
지금도 생각하면 몸둘 바를 모르겠는 내 장애에 대한 '정직한 위선의 민낯'을 경험한 두 순간이다.
빙판 길을 걷는 그 흔한 걸음이 너무도 두려운 삶.
일상의 어떤 지점에서 내 깊은 상처가 돋아질지 모르는 삶.
매일 흔연스럽게 살려 하고 분명 나는 씩씩하지만 씩씩해야 한다고 자꾸 다짐해야 하는 삶.
움직이기만 해도 수없이 던져지는 그 두꺼운 맹랑한 날 것 그대로의 시선을 견뎌야 하는 삶.
그 시선들을 내가 인지했다면. 반드시 그 이유를 해명해야 했다면 나는 이 글을 쓰고 있지 못 했으리라.
어떤 돌기는 옅어질지언정 없어지지 않는다.
측정할 수 없이 깊은 심연에서 엉겁의 시간 동안 퇴적되어 온 시린 구토가 번져나오는 삶.
최근 나는 '뒷담화의 앞담화'가 주는 진부한 횡포의 아름다움을 겪고 헤롱거렸다.
남들이 톡 던진 뒷담화 하나가 나에게 올 때 나는 뜨끔함과 죄의식은 물론이고 '오래된 천형'이 키워준 피해의식이 스멀스멀 병치되어 올라온다. 객관적인 나보다 주관적인 나로 엮어들어간다.
'내가 장애인이라서 더 무시하는가?' 라는 이 간명한 질문을 끄집어 올릴 수 밖에 없는 출생이다.
어떤 질문에 대한 어떤 대답은 주로 어떤 의미도 없지만.
'아니다. 그리 생각하는 내가 병신이지. 반성하고 또 나아가자.'
나는 그렇게 구비 구비를 넘어 왔다. 그래야 버틸 수 있다.
증오와 분노는 내 삶의 주동력이었고 결국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나의 장애는 나의 조건이자 주어진 기능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편견과의 만남, 투쟁과 극복이 내 삶 자체였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선택할 수 없던 부모가 떨구어준 조금은 다른 삶을 부모가 떨구어준 '낙천과 유머'로 견딜 수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몫의 고난을 겪는데, 그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비굴해지거나 야비해지지 않을 정도의 '혼의 힘'을 가지려 노력한다면 그 고난은 더없이 훌륭한 인생의 스승이 될 것이라 여긴다.
그 '힘'은 그러한 고난을 극복할 때마다 계속 성장하여 다음의 고난과 대결할 힘을 주는 것이라고 여긴다.
나의 장애는 그렇게 또 다른 힘이 되어 가고 있다.
나의 마누라에게 13년 전. 결혼 직전 서오릉 넓은 흙길을 걸으며 나는 물었다.
"넌 이런 오빠가 안 부끄럽니?"
"나는 이런 오빠라서 좋아."
https://blog.naver.com/hanipapa_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