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이 소설에 끌렸다.
제대로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낙인의 두려움,
아무리 몸부림쳐도 어떠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짓눌림의 상태,
그 완벽한 불가역성은 내 오래된 공포였다.
중, 고등학교 때
공상 노트를 열 권 넘게 써내려간 이유도,
지척과 방향을 헤아릴 수 없이, 무한 유턴만을 거듭하는 세상의 시선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단두대에 선 헤스터 프린,
“그 남자는 누구냐!”
“그의 이름은 말하지 않겠다.”
그녀는 침묵함으로 선언한다.
도덕과 법의 탈을 쓴 대중의 속되고 거친 욕망 앞에서, 인간의 최후를 지킨다.
그 최후(양심)야말로 그 시대가 가장 두려워한 것이다.
옳고 그름이 가역성을 잃고, 속죄와 단죄의 반복으로 유지되는 사회,
일정량의 죄인을 통해 체제를 유지하는 사회에서 '양심'은 필요악이다.
기득권과 우중이 두려워한 것은 죄 자체가 아니라, 죄를 통해 드러날 수도 있는 진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속죄의 과정보다 단죄의 결과에 집중해왔다.
남편 칠링워스는 말한다.
“나는 너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남자, 네 마음에 있는 자는 찾아내겠다.”
그는 복수심을 도덕의 언어로 포장하고 신의 뜻으로 합리화한다.
도덕이 개인의 내면에서 유영할 때는 선함의 목적을 유지하지만,
규범과 시스템 유지를 위한 도구로 쓰이는 순간 낙인과 배제의 장치가 된다.
배척의 언어, 척도의 문법이 된다.
목사 딤즈데일은 신의 대역의 위치에 서 있을 깜이 안 되었다.
도덕의 가면 뒤에 숨은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는 신의 이름으로 설교했지만,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신을 이용했다.
신앙의 형식에 기대어 양심과 비겁을 함께 숨겼다.
사실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권위를 지켰고, 허상의 기만을 유지했다.
축제의 날, 딤즈데일은 설교를 마친 뒤 단두대에 오른다.
“나를 사랑하고 거룩히 여겼던 이들이여!
나는 신 앞에서는 가장 큰 죄인이니, 이 자리에서 죽어야 하오”
죄의 고백, 위선의 해체였다.
비로소 그의 피 묻은 ‘A’는 절반의 진실함을 얻었다.
세월이 흘러, 헤스터는 다시 보스턴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여전히 가슴에 ‘A’를 달고 있다.
그것은 더이상 죄의 표식이 아니었다.
진실의 상징, 양심의 징표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찾아와 슬픔과 번민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눈을 낮추고 귀를 높여 그들의 메마른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신보다 구체적으로 자비로운, 도덕보다 따뜻한 인간이 되었다.
죄의 기준은 시간마다, 공간마다 다르다.
완전한 존재만이 죄를 판단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는 죄인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죄가 아니다.
인간 사회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죄의 없음'이 아니라 '죄의 있음'이고
'단죄'가 아니라 '속죄'이다.
우리는 죄를 통해서 고통을 이해할 수 있고, 연민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다.
도덕은 규율의 유지를 위함이 아니라, 온기의 유지를 위함이어야 한다.
구체적 따뜻함은 신으로부터가 아니라 인간의 감수성에서 비롯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