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여백 하나하나에 겸손해진다.

by 하니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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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대비한 예열을 위해 사무실에서 일하고 퇴근하려는데 카톡이 왔다.

'여보 데리러 와줘요. 부탁합니다.'

'(이모티콘)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상주에서 올라오는 버스에서 마늘이 보낸 톡이었다.

동서울 터미널, 뻑적한 거리였다.

휩싸였다.

갈등했다.

뱀 띠 친구들에게 갈까, 말까 물어보려다,

'알겠어'를 날렸다.

천사 친구들의 답은 뻔했기 때문이다.

가다보니 비가 온다.

가길 잘 했다.

태워서 장모님 댁으로 향한다.

딸이 영상을 만든다며 핸드폰을 가져갔다.

나는 방에 들어가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을 집었다.

좋은 문장 몇 줄을 종이에 옮겨 적어봤다.

악필이라 '필사'를 필사적으로 비껴왔는데,

느낌이 정말 좋았다.

단어가 돋는다.

문장의 결이 드러난다.

생각의 흐름이 엿보인다.

선택과 배열 사이의 긴장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여백 하나하나에 겸손해진다.

집에 오는 길, 딸과 또 투닥인다.

이틀 만의 해후의 반가움은 찰나를 못 지킨다.

서로의 시퍼런 말칼들이 시뻘건 춤을 춘다.

'침묵'과 '거리두기'를 강하게 다짐한다.

한글날.

'필사'의 즐거움을 알게 되어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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