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비가 자주 내리는 봄이다.
빗방울들이 울고 또 울고 있다.
"저기.. 우산 좀 빌려주세요"
돌아 보니 투명한 비옷을 입은 스물을 갓 넘은 듯한 여자가 서 있었다.
"저는 이 우산이 전부인데요?" 나는 바쁘게 대답했다.
"괜찮으니까 빌려주세요."
"네?"
"제가 이 비 옷을 드릴께요."
"..."
'무슨 생각일까?' '왜?' 머리 속에서 선문답을 계속 하고 있었지만..그녀는 이미 비 옷을 벋고 있었다.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빗방울 수 개가 그녀의 어깨를 차지하기 시작하였고.. 엉겁결에 난 우산으로 그녀의 어깨를 덮을 수 밖에 없었다.
간단한 거래를 마친 후 솔직한 다리는 다시 자신의 몫을 다하였다.
뒤돌아보니 그녀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내 쪽을 보고 있었더라면 멈췄을 터이지만 그녀는 내게 뒷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골목을 돌고 나서 설레이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에게서 풍긴 어떤 고약한 내음이나 불평등한 거래 때문이 아니었다.
뒷모습으로 마지막에 자기를 숨겨 버린 그 무례함에 대한 서운함의 엄습 때문이었다.
배가 고팠다. 그런 소소한 기억을 담고 우산도 없이 빗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데는 오랜 시간이 들지 않았다.
지갑이 비어 있었다. 아침 짧은 다짐이 떠올랐다. '돈 좀 아껴 쓰자'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책 3권씩을 사오는 버릇이 있는 나를 힐책하며 허공에 날렸던 그 다짐이 허기를 재촉했다.
주머니를 털어 보니 다행히 500원 짜리 하나와 100원 짜리 다섯 개가 있었다.
라면 두 봉을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보그보글... 후루룩~~’ 생계란을 안 풀어 아쉬웠지만..
먹고 배를 채웠다는 습관적인 포만의 만족감은 이내 잠을 불렀다.
택배 아저씨의 장탄성에 눈을 떴다.
나를 놀라게 한 건... 택배 물건을 적시며 그 위에 놓여 있는 내 우산이었다.
"아저씨, 이 우산을 어디서?"
"네. 올라오던 길에 어떤 사람이. 우비를 입고 우산을 받들고 있던데요? 미친 여자 같았어요."
뛰어 내려가 보고 싶었지만... 또 뒷모습만 보게 될 것 같아서 이내 숨을 돌렸다.
혹시 쪽지가 있으려나 하는 묘한 기대감에... 꿈에서 덜 깬 몽유병 환자의 그것처럼 더듬거리는 손길은 느릿했지만. 결국 쪽지를 발견했다.
"약수터에 한 번 오실래요?"
인근에 사는 소녀라는 증거가 되는 것인가?
우리 집 주변에 있는 약수터라면...
몇 년 전에 폐쇄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게 뭐야? 언제 오라는 말도 없네?' 나에게 물음표만 계속 떠오르게 함에 약이 올랐다.
그녀? 그 사람? 미친 사람?
하여튼 그 사람한테도 물음표를 안겨 주고 싶었다. 약수터를 가지 않으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궁금해져서 바로 가는 추리적 행동을 하지 않기로 했다.
며칠이 지났다. 몇 봉의 라면을 더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빗방울이 창문에 매달려 달리기 시합을 하던 날이었다.
초인종 소리.
문을 열었다. 우리 집은 대문을 열고 내려가 철문을 하나 더 열어야 되는 귀찮은 집이다.
비 옷 한 벌과 약수통이 있었다. 그리고 1층에서 목소리가.
"약수터로 오세요!"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가까운 산지름길을 두고 큰 길로 걸어갔다.
환청을 들은 것이 아님을 확인하려 손바닥에 빗방울을 모았다.
차가웠다. 약수터엔 아무도 없었다. 두리번 두리번...
약수터 대롱에서 물은 잘 나오고 있었다.
'저걸 보고 87까지만 세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집에 간다.'
외로운 공포를 혼자 이기기 위해 셈은 빨라지고 있었다.
'하나, 둘 , 넷, 일곱...'
숫자를 정확히 셀 줄 아는 고마운 재능이 있었지만 건너 뛰는 속도는 빨랐다.
기다리기라도 한 듯한 즈음에 그녀가 나타났다.
"푸념 어린 얼굴이시네요.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니요."
짧은 대답에 더해 빠르게 그녀를 살피기 시작했다.
비 옷도 우산도 없이 흠뻑 젖은 얼굴로 나를 보며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평소 사람의 눈망울을 잘 살피는 나는 이내 '악의 없음'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근데.. 여기에 왜 오셨나요?"
'그 목소리는 저 소녀의 목소리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아까 약수터로 오라는 것 아니었나요?"
그녀는 웃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던 눈은 더 커지고 있었다.
묘한 웃음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웃을 때 눈이 작아지기 마련인데..
장난기가 발동했다.
"눈은 웃지 않으시네요?"
그녀는 나를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무서웠지만 그것은 공포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호기심이 극대화 되었을 때 느껴지는 짜증과도 같은 무서움이었다.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앞 선 그녀의 발자욱은 그리 촘촘하지 않았지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빨리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걸음을 늦추는 순간 뒤에서 살 찐 비 옷을 입은 귀신이 날 송두리째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보름에 한 번씩만 말동무가 되어 주세요."
갑자기 멈춰선 그녀가 뒤통수만 보이고는 짧게 말했다.
나는 걸어가던 다리로 대답하듯 생각의 시간 없이 대답했다.
‘마법은 이렇게 삶 속에서도 일어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한 것은 내가 서서히 그녀에게 결박당하고 있다는 걱정 어린 생각을 한 다음이었다.
"보름 뒤에 아침 일찍 여기로 오시면 되요. 단 우산을 꼭 가지고 오세요!"
"그러죠. 그럼 이만.."
황급히 길을 내려 왔다. 귀신에 홀린다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묘한 메아리 같이 그녀의 젖은 목소리가 귓전을 세차게 치고 있었다.
'우산? 그럼 보름 뒤 그 날도 비가 온다는 것일까?'
그녀만 만나면 이유 없이 난처한 내가 되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제 걸음을 되짚듯 바람이 내 얼굴을 계속 찔러대고 있었고, 바람만은 시원하게 제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는 듯 했다.
그녀가 선물해 준 듯한 보름의 시간은 피아노 건반 15개를 손가락으로 한 뜸에 굴려내듯이 빨리 지나갔다.
일찍 일어났다. 더듬거리며 시계를 보니 새벽 5시였다.
어두웠다. 아침 일찍 약수터를 가야한다는 전 날의 새하얀 다짐은 그렇게 밤새 나를 깨웠나보다.
비가 오지 않는 쨍쨍하게 마른 날이었지만 우산은 내 유일한 무기처럼 한 손에 쥐어져 있었다. 우산을 약수통 삼아 걷고 있는 나는 이미 미친 사람이었다.
"이른 아침에 와주셨네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부지런한 태양을 등 뒤에 엎고 그녀는 나타났다.
"잘 지내셨나요?" 전혀 어색한 일성(一聲)을 내뱉은 나에게 살짝 미소를 지은 그녀는 아무런 대답 없이 또 걸어갔다.
축축한 산길로 10분 정도 걷던 그녀는 평평한 바위에 앉았다. 손짓은 없었지만 옆에 남은 공간은 좌석 번호 있는 자리처럼 나를 살펴 앉혔다.
"저를 님프라고 불러주세요."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럼 전 다프니스라 해두죠."
나는 그녀가 고귀한 정령이라 느껴졌기에 그렇게 말했다.
우울한 몽상에 휩싸이듯 어두운 표정을 잠시 짓던 그녀는..
"아뇨. 그럼 제가 당신을 장님으로 만들어버릴지도 몰라요. 디오니소스라 해두죠."
풍요와 술의 신... 그것은 괜찮은 제안이었다.
님프의 손에 자란 디오니소스...
푸근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그녀가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는 나에게 어떤 대꾸도 허용치 않는 견고함이 있었다.
물끄러미... 아침 공기에 시선을 미끄러트리며 나를 바라보더니...
"눈이 뭐죠?"
“하얀 눈?"
"아뇨. 지금 보이는 눈이요"
"아~ 시각이요? 음.. 무언가를 보고 인식하는 기관이겠죠."
이렇게 대답한 나는 시비를 떠나 잘못 대답한 것이 아니기를 바랬다.
"눈을 감아보세요."
"눈을 떠 보세요"
"어둠이 무서우신가요?"
"빛보다는 불안감을 일으키네요."
"눈은 빛의 강약을 감지하는 기관에 불과합니다. 눈이 사람에게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 빛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기 때문이에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아이의 눈이 어른의 눈보다 맑게 느껴지는 것은 어둠을 덜 본 것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님프의 부족한 긍정에도 나는 힘을 얻었다.
"아이들은 잠을 많이 자기에 눈을 떴을 때 모아 둔 빛을 힘차게 내뿜는 것 같네요."
살짝 웃음진 님프는...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는 거에요. 빛이 어둠을 감싸는 것은 어둠이 빛에게 공간을 빌려주는 것에 불과하죠. 그 만큼의 어둠이 다시 다른 공간의 빛을 감싸는 거죠."
"영원히 눈을 감는다는 것이 어둠을 뜻하나요? 죽음은 빛의 실패작인가요?"
"그것은 어둠이 빛에게 빌려주었던 시간을 되찾아가는 거죠."
"어둠은 빛이 쉬어가는 곳이니까요."
대꾸를 해보려 했지만 그녀의 모습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밤에 모아둔 빛의 기운이 다해가네요. 안녕히..."
그녀는 쉬러 간 것이다.
기다림은 간절한 집념이 되어 푸른 아침의 만남을 꿈꾸며 보름의 시간이 흐르게 했다.
"이제 숲 속으로 들어갈까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할 정도로 나는 그녀 앞에서 여유가 생겼다.
"어느 숫자를 좋아하시죠?"
님프의 질문은 항상 기대 이상의 전조 없는 파격이다.
"13이요."
"예상 못한 두 자리 숫자네요. 이유가 있으신지?"
"음.. 완전수인 10과 완전수인 3의 합이라서요. 또 제가 좋아하는 단어 인 '평등'의 단절 획수도 13이죠. 님프님은?"
"21. 이유는 60일 뒤에 가르쳐 드릴께요."
"디스님은 시간이 왜 흐른다고 생각하시죠?"
디스? 디오니소스를 그렇게 줄여부른단 말인가? 아무래도 좋았다.
말장난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는 언제 날아가 버릴지 모를 님프였으니까..
"음... 시간은 항상 과거에 죽은 자들이 산자들을 질투하기 때문에 강한 현재 진행형을 이어가는 것 같은데요?"
"사자(死者)들의 천박한 질투가 생자(生者)들의 시간을 뺏어간다..? 그런데 왜 곱해서 뺏어가지는 않는거죠?"
"..."
님프는 이내 온화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생각하는 숫자의 의미를 말해 드릴께요."
"1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곧게 우뚝 세우라는 숫자입니다. '결연'을 상징해요."
"2는 다른 사람 한 명, 한 명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라는 숫자입니다. '만남'을 상징해요."
"3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는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다는 것이죠. 기쁨과 슬픔의 부딪힘에서 작은 입장의 동일함이 만들어지죠. '연대'의 숫자라 할 수 있네요."
"4는 편을 가를 수 있을 네 명의 사람이 모이면 갈라질 수 있다는 것이에요. '분열'을 상징하죠."
"5는 손가락과 장이 다섯 개로 이루어져 있음에 감사하며 자신의 몸을 아끼고 건강하게 가꾸라는 숫자입니다. 몸을 쭉 펴면 5방향이 되죠. '수신(守身)'의 숫자입니다."
"6은 삼각형 두 개가 모이면 사각형이 되듯이 사람의 삶은 항상 불안한 것이다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경계'의 숫자이죠."
"7은 다리 한 쪽을 세우고 나머지 하나를 세우고 있는 모습으로 절반의 의미를 잊지 말고 소중히 여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연상'의 숫자"
"8은 사람과 사람은 끊어지지 않는 고리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에요. '이음'을 상징해요."
"9는 십이라는 완전수가 되기 전의 숫자로 '희망'을 상징합니다."
"10은 9에서 한 획이 분리되어 나와 생명 탄생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한자에서도 九에서 마지막 획을 떼어 내면 十이 되듯이 탯줄을 끊고 태어나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열 발가락의 두 발로 우뚝 서라는 '결연'을 마지막으로 강조하기도 하는 것이에요."
독특한 해석이었다. 억지라고 잡아떼기에는 눌변의 속도가 꽤 일정하게 빨랐다.
마침표를 찍고 도망치는 페이지의 한 면처럼 님프는 사라지고 있었다.
"힘겹게 속알이를 하신 얼굴이네요?"
아침 어머니와 짧은 다툼을 치루고 왔기에 어두운 표정으로 님프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어머니에 대해 말해보죠." 점점 적극적이 되는 나였다.
님프는 직선의 포물선을 그리듯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제가 어릴 때 일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되네요. 친구랑 싸움을 하던 끝에 나무 가지를 꺾어 그 아이의 눈을 찔렀어요. 제 어머니와 그 아이의 어머니가 모두 학교로 왔죠. 그 아이는 자기의 서러움을 눈물로 표현하고 있었고, 저는 시퍼렇게 얼굴을 퍼뜨리고 그 와중에도 분을 못 참고 차갑게 그 아이만을 쏘아보고 있었어요.
갑자기 어머니께서 무릎을 꿇으시더군요."
"어떠한 이유가 되었건 치료비 몇 푼으로 보상될 수 없는 아픔을 드려 죄송합니다."
나는 내 인생 가장 슬펐던 기억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감정의 선이 팽팽해진 나는 말을 이어갔다.
"저는 그 날 이후 -친구의 어머니는 '나'에게도 어머니다.-라는 말에 긍정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자식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은폐시키려는 수단어이고, 어머니들에게 필요 이상의 '모성애'를 강요하는 사회어가 될 수도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죠."
"다시 그날로 갑니다. 눈을 감고 그 날을 떠올리세요."
"어머니는 디스님에게 무릎을 꿇고 계신가요?"
그 날의 그 풍경이 조각조각 맞춰지며 내 앞에 나타났다. 어머니는 나한테 눈물 박힌 무릎을 꿇고 계셨고 내 눈에는 나뭇가지가 박혀 있었다.
내 한 쪽 눈에서는 피가 다른 한 쪽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눈을 뜨세요."
차가운 바람은 내 눈에 맺힌 젖은 슬픔을 말려주었다.
"그 친구분의 통증은 그대로 모든 어머니들의 아픔이 되는 것이죠."
"디스님의 덜 여문 이성에 의한 거친 행동은 또한 모든 어머니의 아픔이 되는 것이구요."
"오늘은 먼저 가세요. 매 번 제가 먼저 가는 것 같아서요."
"제 모습에 의아해 하시네요?"
마후라로 온 몸을 휘감은 님프가 나타났다.
"인간이 동물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죠?"
"음... 더 다양한 종류의 반복을 할 수 있다는 것이요."
"동물이 인간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죠?"
"발정기가 일정 기간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은 좋은 것 같아요.
인간보다 성을 목적 그 자체로 쓸 수 있는 것 같군요."
무표정하던 님프는 곧 입을 열었다.
"인간이 불쌍한 것은 자연에서 가장 멀리 도망친 동물이라는 것이에요."
"불쌍해 하는 존재도 인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에서 인간은 외롭죠."
"자연 중에서 가장 비실존적인 개체가 인간이죠."
"잡은 물고기를 손으로 잡았다가 놓아 주면 그 물고기는 화상에 걸려 물에 들어가자마자 죽어버린다는 것을 알고, 모르는 구조화된 의식을 할 수 있다는 것에서 인간은 스스로에게 가장 피곤한 동물이죠."
"인식을 모아서 의식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인간의 능력이 인간을 가장 약한 자연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러나 인간에게 무릎 꿇을 수 있는 것은 인간 뿐이죠."
"인간은 가장 고도화된 이성인 반성을 할 줄 아는 자연이니까요."
"먼저 가세요. 이 다음에는 비가 오겠네요. 저를 위한 시를 지어 오셨으면 하네요."
비가 오지 않는 아침이었다.
"아침 안개가 잔잔하네요."
'님프가 말한 비는 는개였군..'
"디스님 제 시 먼저 들려드립니다."
기억의 숲 -님프-
그림자만 버리고 간 당신.
그러나 제겐 기억의 빛이 되었어요.
잦은 기침 속에서도
6살 난 우산이
바람을 날려 제게 왔어요.
그 바람은 죽음의 찰나를
영원한 기다림과 만남의 집념으로
들썩이게 했죠.
이제 꿈 속의 현실이 되어
당신의 몽상을 안겨 주었네요.
오늘 나는 이뻤나요?
그 때만큼 고왔나요?
"이제 디스님이..."
님프. -디오니소스-
잦은 침과 땀이 내리고 있었다.
무례한 여신은 앞으로 숨었다.
당신의 빛은 어둠의 그림자였나요?
나는 너의 시간을 빌려 너와 같은 곳에 있었다.
한 개의 새벽을 열 때마다...
하루가 분수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았다.
너마저 내 꿈을 오려 도망치려는건 아니겠지?
하나도 알지 못 했다.
너가 숟가락질을 할 수 있는지조차...
만남은 두렵다.
기실 그리움의 시간을 더 많이 빌려야하기에...
그러나 너의 횡포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너가 타버리면 그 재를 혈관에 넣어
내 심장을 멈추게 하련다.
보름은 불현듯 지나버리고...
"마지막입니다. 디오니소스님"
님프, 그녀가 칭한 나의 이름을 온전히 불러주기는 처음이었다.
"오늘이 마지막이군요?"
"네. 오늘은 제가 누구인지 알려 드리려해요."
"디스님과 저는 21년 전에 만났어요. 어머님과 소풍을 나오신 디스님은 제 위에 앉아 계셨어요. 젖은 공기가 내리기 시작했죠."
"네? 무슨 말이신지.."
"비가 내렸어요. 디스님은 우산이 하나니까 그냥 비를 맞으며 집에 가자고 하셨어요."
"엄마! 우산은 여기 놔두고 가!"
그리고 저한테 다가 오셔서 "비 맞지 말아."
"바람은 선뜻 그 우산을 날려버렸죠. 그 날 이후 저는 비를 너무 많이 맞아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죠."
"제 이름은 여기서 만날 때마다 디오니소스님께 던진 첫 마디에 담겨 있어요."
"21년을 기다리고서야 만날 수 있었네요."
님프는 사라졌다. 아래로 스며들어갔다.
집으로 돌아오며 떠올린 건 그녀의 이름 뿐이었다.
님프는 '푸른 숲 속의 잔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