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에서 태어난 69학번 엄마는 교내 학보사 기자 활동을 하며 활자 속에서만 노니는 문학 소녀였다고 한다.
그 당시 숙대의 위상은 지금보다 높았고 과내에는 유력 집안 여식도 많았는데 그네들은 한껏 이쁘게 치장하고 서울대, 연고대생들과 취집을 위한 쉼 없는 미팅에만(엄마 눈에) 전념했다고 한다.
엄마한테도 미팅 제안이 많이 들어왔는데 단 한 번도 나가신 적은 없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말더듬증이 심했고 체력도 너무 약해 2학년 무렵까지는 대인기피가 심했다고 한다.
만남에 열 올리는 학우들이 한심해 보여 곁을 주지 않았으나 신기하게 왕따는 안 당했다고 한다. 오히려 조용한 책벌레에 학보사 기자인 것을 신통해 하며 편지 대필을 부탁했다고 한다.
정서적 풍요와 낭만이 넘치던 시절.
르네상스 클래식 음악실에서 엄마를 따라 다니던 키 크고 매끈한 나중에 교수가 된 연대생이 있었다던데 잘 생겼다는 점에서 그 얘길 들을 때마다 나는 맥락 없이 아쉬워 했다.
훗 날 아빠와의 만남이 첫 연애에 이은 결혼이었고 긴 환해풍파의 단초가 되었다.
광주에서 태어난 42년 생 광산 김가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불러 성악과에 가고 싶어하셨고 심지어 한양대 성악과에 합격했으나 "남자가 할게 없어서 무슨 광대짓이냐!"는 할아버지의 불호령으로 삼 수 끝에 서울대 사학과에 들어가셨다.
몇 년 뒤 대학생활에 좀처럼 적응을 못 하는 아버지를 남산 위에 데려가신 할아버지는 "한 자락 뽑아보라" 하셨고 눈을 감고 '선구자' 한 곡조를 다 들으신 당신께서는 아버지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셨다고 한다.
여리디 여린 은둔형 문학 소녀는 연년생으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시린 친할미는 이런 천형을 얻은 나를 낳고 웅크려 누워 있는 엄니에게 "누구랑 붙어 먹은거냐? 우리집에는 저런 씨가 없다"는 폭언을 여려 번 퍼부었다고 한다. 그 갖가지 우악에 대해서는 달리 쓸 기회가 또 있겠다.
나의 아버지는 한국일보과 합동통신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해직 기자가 되었고 서슬 퍼런 전두환 군사 정권 시절인 1980년에 기자협회장이 되었다.
계엄이 있었고 기약 없는 도망이 있었다.
1980년 6월 어느 새벽 2시경 양우 아파트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에 엄마는 어둑시니가 되었고 문을 열자마자 이마에는 차가운 총부리가 겨누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