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속의 카인, 나 속의 프린.

by 하니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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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누님이 ‘데미안’의 카인 부분을 언급하신 글을 보고 잡념이 올라왔다.

소설 데미안에서 가장 난해하여, 자주 책장을 닫게 했던 부분이다.

나는 오래도록 ‘부끄러움’의 표식으로 살아왔다.
남들이 말하지 않아도, 내 안의 목소리는 늘 자문했다.
“너는 왜 다르냐, 왜 서툴고, 왜 더디냐.”


숨길 수 없는 표식,

나만의 주홍 글씨를 찾아 더 깊이 새겨 넣었다.

나는 나의 목을 조르는 아벨이기도 했고,

나의 아벨의 목을 조르는 카인기도 했다.


나의 아벨은 자꾸 앉으려 했다.

안일을 잡고 평온하려 했다.

나의 카인은 자꾸 일어서려 했다.

불편을 품고 깨어나려 했다.

아벨을 죽이는 일은 생각보다 힘겨운 일이었다.


고통의 나날이었다.

나의 숨결을 잡아 준 팔 할은 증오와 각성이었다.

카인의 불온한 숨결이었다.


육체의 더딤과 굴곡을, 누군가는 ‘결함’이라 불렀고,
나는 ‘흉터’라 부르며 억울해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건 나를 멈추게 한 그림자가 아니라 일으킨 빛이었다.


아벨은 착했다. 그러나 머물러 있었다.
카인은 불온했다. 그러나 깨어 있었다.
아벨의 평온보다 카인의 불안이 좋다.
카인에 빠질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읽었던 ‘주홍 글씨’의 헤스터 프린도 비슷한 맥이다.

가슴팍에 ‘A’(간통) 표식을 달고 살아야 했던 여인.

부끄러움을 안고, 수많은 시선의 칼날을 견뎌야 했던 여인,

청교도적 위선과 가부장적 남성 중심의 도덕이 팽배했던 시대,

프린은 자신을 부정하지 않았다. 무너지지 않았다.

민들레로 끝내 다시 피어났다.


누구나 표식 몇 개 다 있다.

표식이 없다고, 잘 산 게 아니다.

표식을 찾지 못하거나 숨기고 있는 것뿐이다.


문학의 힘은, 참 위대하다.

‘문학은, 우리가 숨긴 표식을 비춰주는 빛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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