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둥이 와의 경찰서 나들이(연재 완료)

by 하니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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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서에 발령받은 다섯 명은 서로 그리 친하지 않았다.

나는 징세과 정리 1계, 한 살 위 형님은 총무과 업무지원팀, 동갑 녀석은 소득세과, 여자 동기 둘은 부가가치세과와 징세과 정리 2계로 배치되었다.

나는 서울, 큰 형님은 전라도 광주, 동갑 놈은 대구, 두 막둥이들은 경주와 제주에서 올라온 전국구 오방색이었다.

교육원에서 각자의 궤도를 맴돌던 우리는 금세 가까워졌다. 모두가 '술'을 좋아했고, 조금씩 외로웠다.

큰 형님은 내가 만나 본 두 발 달린 인간 중 제일 착한 사람이었다.
말 수가 적고 진중했고, 누구든, 무엇이든 다 괜찮다며 품는 사람이었다.
온갖 덕을 베풀면서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동갑 놈은 조용한 성격이었다.

눈빛은 조금 부담스러웠는데 여직원 책상에 턱을 괴고 쭈그리고 앉아 밀담을 나눌 수 있는, 묘한 독특함이 있었다.

막내는 속이 깊었다.

삼 남매 중 막내였고, 위로 나이 차가 제법 나는 오빠가 둘이라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티가 났다. 말투는 조금 툭툭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깊은 따뜻함을 나눌 줄 아는, 든든한 막냉이였다.

넷째는 열정녀였다.

막내보다 한 살 위였던 언니는 상대를 한 순간에 미혹에 빠지게 할 수 있는 유달리 수려한 입담이 있었다. 직장인 연극 모임에서 무대에 오르는 친구였고 ‘자신을 감싸는 일’에 깊이 천착하는 동생이었다. 결혼도 제일 빨랐다.

발령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고질 체납자였던 한 아줌마가 예금 압류 통지서를 받고, 퇴근 시간에 임박하여 전화를 걸어왔다. 수화기 저편에서 거친 욕설이 쏟아졌다. 십여 분 뒤, 날탱이 기둥서방을 대동해서 사무실로 쳐들어왔다.

"김ㅇㅇ. 개새ㅇ 어디 있어!"

술냄새가 진동했고 득달같이 과장님 탁자로 직행했다.

키는 180cm가 넘는 장신이었는데 다리를 조금 절었다.

당시 징세과장은 머리가 곱슬이었고 성격은 얄팍했다.

과장은 기둥이가 과장 손님맞이 소파에 앉음과 동시에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졌다. 퇴근 시간을 빙자한 치밀한 도피였다. 예상했던 가관이었다.


"김ㅇㅇ이 누구야. 씨O새끼야 빨리 압류 풀어!"

팀장님은 나에게 탁자 쪽으로 오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모두의 존경을 받던 술을 참 좋아하시던 팀장님이었다. 차장님과 선배 조사관 세 명을 배석시켰다.

"선생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줌마가 작은 목소리로 "아니 제가..."

기둥이가 바로 말꼬리를 낚아챘다.

"씨부릴 필요 없고, 이거 압류나 풀어"

"서류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팀장님이 손을 내밀자, 남자는 거칠게 그 손을 뿌리쳤다.

"니까짓 게 뭔데 이걸 보려 그래? 여기 총책임자야? 서장 나오라 그래!"

"일단 서류를 봐야겠습니다."

실랑이가 다시 시작되었다.

기둥이가 거칠게 서류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종이가 반으로 찢어졌다.

튕겨 넘어지려는 팀장님을 공 조사관님이 재빨리 부축했다.


"경찰 불러"

팀장님께서 말씀하신 지 일 분도 안 돼, 경찰 세 명이 들어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드잡이 소동 때문에 이미 일 층에서 대기 중이었다.

"저 새끼들이 공문서를 위조하고 공문서 파기까지 시도했어요. 다 잡아가 주세요!"

설왕설래가 거듭되었고 몇 분 뒤 경찰 한 명이 기둥이한테 말했다.

"선생님 이거 말씀을 들어 보니 선생님이 공무 집행 방해를 하신 거 같은데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시죠?"

"무슨 말씀입니까? 저 놈들이 나를 폭행하고 증거 인멸하려고 공문서까지 찢어버렸다고요! 저는 저 놈들을 심판해야겠습니다!"

쓸데없이 경건한 병신이었다.

그 경찰과 팀장님이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납세자 쪽 두 분과, 탁자에 계시던 분들 모두 경찰서로 가셔야겠습니다."

체납자 본인(여자)은 우리한테 연신 ’죄송하다‘ 말하며, 기둥이를 말렸지만 통할 위인이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게다.


이동했다.

서대문 경찰서였고 경찰차 세 대에 나눠 탔다.

나는 쿵쾅거렸지만 무언지 모를 설렘과 기대도 들었다.

엄마한테 별 일 아니니 걱정 말고 주무시라고 전화했고 예상대로 엄마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대기 시간이 제법 길었다. 돌아가면서 조사를 받았다.

나에게도 체납 세금의 종류와 금액, 이전 전화 응대 이력과 당시의 상황에 대해 긴 호흡으로 물어보았다.

질문이 끝날 무렵 형사가 물었다.

“더 할 말은 없습니까?”

“팀장님과 선배님들은 전혀 귀책사유가 없습니다. 이 모든 패악의 중심은 기둥이이고, 체납자 여자는 많이 불쌍해 보입니다. 남자는 취한 상태였고 여자 목 주변엔 멍이 보였습니다. 화장으로 급히 가리고 온 것 같습니다.”

조미료를 섞어 강변했다.


경찰서에 같이 간 직원분들이 다 흡연자였다.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모두의 담배가 동이 났다.

경찰 한 분이 담배 다섯 갑을 사다 주며,

"힘드시죠? 같은 공무원끼리 힘냅시다"라고 말하고 가셨다.

이후 상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그 말을 들은 이후로 마음이 만만디 하게 풀렸으리라.

중간중간 팀장님은 나한테 "신경 쓰지 마. 별 일 아니야. 우리 나가서 소주나 찐하게 빨자"며 북돋아 주셨다.

기둥이는 역시 남편이 아니었고 깽판 이력도 제법인 놈이었다.

새벽 다섯 시가 되어서야 우리는 경찰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팀장님께서 ’단도리 하러 가자‘고 하셨다.

우리는 선지 해장국에 소주를 시켰다. 그 시절에는 잔을 돌리는 술자리 문화가 당연했다. 내 동갑 사수도 그 새벽 술자리에 참석했다. 남직원, 전원 출석이었다.


한 시간 남짓 만에 우리는 많은 술잔을 비웠고 각자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다시 출근했다.

과장은 독수리 오 형제를 불러 세우고 전 직원들에게 박수를 치라고 했다.

과장은 대머리였는데 양 옆에 남은 가닥이 곱슬이었다.

그날 이야기는 이후로도 세무서 안에서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나는 국세 공무원 발령 첫 해에 값진 경험을 했다.

이십 년 간 많은 똘아이와 진상을 만났지만 그날이 가장 으뜸으로, 풍지게 끈끈한 날이었다.

기둥이는 공무 집행 방해로 처벌을 받았고, 선처를 위한 제스처였는지 체납자는 며칠 뒤 체납액을 모두 납부했다.

나의 서대문 세무서 첫 해는 두꺼운 추억 하나를 분명히 품고 막을 내려갔다.

그 짭 놈 덕에,

'두 발 달린 체납자는 잘해줄 필요가 없다'라는 금언을 깊이 매조지할 수 있었다.

의리와 낭만이 있던 시절이었다.


<연재를 마칩니다. 세무 공무원이 되었던 과정과 첫 느낌을 담아 보려 했습니다.

그동안 시간 들여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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