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형에게는 그러지 않았지만, 내가 책을 보는 것만은 기를 쓰고 막았다.
산만하고 잡념이 많은 내가 책을 보면 깊은 공상의 늪으로 빠질까 염려하셨다.
무엇보다 장애인 아들의 ‘사람도리’를 국민학교 시절부터 과하게 걱정한 탓이었다.
학교 공부와 관련 없는 책은 모두 금지였다.
국민학교 3학년 때, 아버지는 오락실을 한다며 기자촌 집을 날려먹었다.
엄마는 집에서 부르던 형의 이름을 빌려 ‘석이네 집’이라는 양품점을 열었다.
계산대 뒤 선반 위에 돈통이 있었다.
플라스틱 의자를 밟고 뒤꿈치를 바짝 세워야 겨우 닿는 높이였다.
앙상한 다리로 어떻게든 엄마의 동전통에 손을 집어넣어 오락실에 다녀왔다.
위배의 인간이었다. 걸려도 맞아도 소용이 없었다.
곱단한 형과는 애초부터 결이 달랐다.
일단도, 이단도 나는 엄마나 형처럼 활자에 중독된 사람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화장실에 갈 때도 책을 본다'라고 말해 엄마를 꼬셨지만, 결혼하고 보니 '화장실에 갈 때만 책을 보는 탕아'였다.
아버지의 모든 면 판박이인 나는 '결혼하면 교회에 다니겠다'라며 그녀의 손을 바삐 잡고 행진해 놓고, 결혼 후엔 '마음이 더 무르익으면 가겠다'라는 말로 12년 동안 일요일의 혼낮을 즐겼다.
엄마는 내가 대학에 들어간 뒤에도 독서를 막았다.
그 오랜 금지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목마름을 키웠다.
절묘한 코칭이었다.
나는 외탁의 불면을 타고났다.
그 긴 새벽을, 넷플릭스와 유튜브로 채우며, 잠과 각성의 틈에서 공허한 외로움을 달랬다.
몸이 삐걱거리기 시작하자 금주를 결심했다.
그 다짐을 붙잡기 위해 금주 일기를 썼다. 단조로운 낙서는 오래가지 않았다.
다른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제의 폭이 넓어지자, 오랫동안 비공개로 묻어 두었던 블로그를 공개로 돌렸다.
새벽은 단순한 불면의 연장이 아니었다.
낮에는 자본의 요구에, 밤에는 가족의 책무에 휩쓸렸지만, 새벽만은 내 호흡을 되찾는 시간이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낭창한 가로등 불빛, 첫 버스의 그르렁거림, 발끝에 닿는 바닥의 까끌까끌한 감촉까지 모두 벗이 되어 주었다.
글쓰기는 내 감각을 예민하게 다듬었다. 미세한 바람, 누군가의 표정, 그 사소한 것들이 재료가 되었다.
그 이전의 무감하고 무례했던 감각으로는 도무지 돌아가고 싶지 않다.
산만하던 나는 차츰 조용해졌다.
반응은 잔잔해지고, 마음은 한결 정돈되었다.
단어를 고르고 문장의 순서를 바꾸는 일은 즐거움이었다.
흩어져 있던 생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지저분했던 마음들이 천천히 흘러가면, 그 작위와 부작위의 경계, 그 중층의 틈에서 문장이 태어났다.
글쓰기는 내 의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