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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공무원 일기 3.(교육원 생활과 서대문 세무서)

국세 공무원 교육원. 서대문 세무서

by 하니오웰
국세청.jpg



지금은 제주도 서귀포로 옮겨 간 국세공무원 교육원.


수장은 2급이다.

옛날 세무대학교 건물을 그대로 썼다.

2005년 1월에는 수원시 파장동에 위치해 있었다.


나는 입교 했다.

두 번의 공무원 수험 기간 은평구립도서관 메이트였던 엄마는 첫 입교날에 함께 하셨다.

어떠한 조담을 나누며 그 푸른 아침 상념과 지키지 못 할 기약들을 떠내려 보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친형이 세번 째 의사고시에 도전 했던 해였고, 아들들의 투명에 가까운 답안지들 때문에 정처 없던 엄마는 가장 오래 전부터 근원적인 걱정이었던 '장애인 막내 아들의 직업전선의 불확실성의 제거'에 고양되어 있던 시절이었고 동행하셨다.

엄마와 같이 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입교 절차를 마치고 돌아가실 때 나는 배웅을 나왔다.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친 동기(국민대학교 응원부장 출신)가 엄마에게 씩씩한 인사를 올렸던 기억이 있다.

이 놈은 동기 중 가장 빨리 세무사에 합격했고 마곡에서 자리 잡아 매끈하게 살고 있다.


2인 1실이었고 나에게 배정된 방은 매우 넓었다.(장애인 우대)

룸메이트는 한 팔을 못 쓰는 동갑내기 부산 친구였다. 목소리가 걸걸했던 친구는 90일 내내 나한테 소리쳤다. "이 초빼이 새끼야. 좀 적당히 마셔라."


극상의 ENFP 시절.

나는 서울 팀의 중심이었고 가라앉지 않는 가슴과 들썽거리는 마음길을 가누어줄 도우미는 '알코올' 뿐이었다.

신체의 항상성을 유지 해야 하는 심장과, 유해 물질을 분해하고 배출해야 하는 간은 미성숙한 뇌의 일방향 착오 입력으로 제 기능을 망실해 갔고 신체와 정신의 균형 잡힌 조절에 실패하였다.

그 시절 나의 9할은 음주였고 나머지 1할은 원샷이었다.


친구는 취중에 오늘 꼭 고백을 해야 한다고 했고 나는 PC방에 가서 카트라이더를 했다. 친구는 돌아왔고 우리는 더 취했다. 그 두 아이는 며칠 뒤부터 사귀었다.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고 그것은 익숙한 뿌듯함과 시림을 주었다.

나 역시 짝사랑의 기치를 세웠는데 그 결과는 '언제나처럼'이었다.

잔을 채우고 비우는데 '거창함'이나 '주저'가 없던 시절.

유난히 77년 생이 많았고(270명 중 30명이 훌쩍 넘었다.) 난 동갑 기장까지 되었다.

두 발로 나간 초빼이는 매일 '공중 부양' 되어서 돌아왔다.


국세 공무원은 '회계 실무 2급'과 '조사요원'(세법 시험)이라는 내부 자격증을 의무적으로 취득해야 한다. 이 두가지가 없으면 조사과에 갈 수가 없다. 그래서 대다수의 직원들은 최대한 단기간에 합격하려 하고 일부 직원들은(칼질을 싫어하는) 최대한 늦게 따려 한다. 합격 할 때까지 응시해야 하고 미취득시 인사상 불이익을 주기 때문에 따지 않을 수는 없다.


교육원 입교 기간 중 '회계 실무 2급' 시험이 치러졌는데 그 첫 시험에서 나는 불합격 했다. 취중 고백의 좋은 결실을 얻는 상술한 제일 친한 아디다스 추리닝 친구는 합격했다.(이하 이 친구는 '아디다스') 나와 불면의 취중 진담을 나누던 여타의 많은 동기들도 합격했다.

공대를 나오고 회계학을 유난히 싫어했던 나는 1년에 두 번 치러지는 그 시험에서 불합격을 거듭했고 2009년 7급으로 다시 재합격 해서 들어왔을 때에서야 합격 했다.

그 당시 중부 세무서에 근무(서울청 직원 교육원이 있었음) 했던 아디다스 친구는 나의 익숙한 재방문에 순대국을 계속 사줬다.

아이다스도 나와 90일 연속 음주를 했던 부산 초빼이인데 때때마다 '비장미'에 휩싸여 있던 나 때문에 교육기간에는 우리는 단 한 번도 술을 마시지 않았고 마지막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합격하지 못 했다.


그 2005년 겨울은 소중한 귀인들을 만난 다시는 내 인생에 없을 '별의 순간들'이다.

아마 죽을 때까지 떠올릴 '달뜨게 충만했던 어떤 순수함 자체의 시절' 이다.

20년이 지난 지금. 조직을 여러 번 바꿔 외떨어진 내가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내 공무원으로서의 소속감의 원형인 사람들이다.

2005년 3월.

교육 기간 중 내 친형이 용산의 한 성당에서 결혼했는데 교우들이 10명 넘게 와주었다.

지금도 20명 정도는 때때마다 꾸준하게 만나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인연들인가?

아디다스는 안정된 세무사가 되어 며칠 전에도 우리 집에 와서 마늘과 문배주를 마셨다.

'조세 정의의 실현'은 조금 더 유예하기로 밀약하고 더 이상 '갑이 아닌 을들의 팍팍함'을 토로하고 갔다.

아디다스가 떠난 뒤 5만원 짜리를 거머 쥔 내 딸이 말했다.


"아빠. 삼촌 부자야. 지갑에 이런게 참 많아."


빛깔은 다르지만 익숙한 뿌듯함과 시림이 20년 만에 또 올라왔다.


발령은 성적 순이었다.

고득점 순으로 서울청, 중부청에 배치했는데 평생을 용의 머리보다 뱀의 꼬리를 지키는데 익숙했던 나는 교육원 평가 순위에서 역시 맨 뒤켠을 차지 했지만 장애인 우대 덕에 '서울청'에 입성하게 되었다.

암묵적으로 예상했던 바이고 그 비의를 찰떡 같이 흡수 활용하여 놀던 나였지만 막상 결과가 나오니 중부청으로 던져진 친한 동기들에게 참 미안했다.

퇴교일에 교육원장님은 '국세청의 중추적인 기둥'이 될 것을 주문하셨고 나는 그리 되지는 못 할 것을 직감했다.


며칠 뒤 전화 한 통.


"서대문 세무서 징수과 정리2팀으로 4월 13부터 출근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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