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동 양우 아파트에서 기자촌으로 이사를 간 여섯 살 무렵부터 나는 제법 뒤뚱거리며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동생이 엄마에게 혼나며 운동을 하는 동안, 걱정과 체념에 얼어붙은 채 곁을 지키던 형은 내가 걷기 시작하자 신이 났다. 나의 손을 꼭 잡고 골목으로 나갔다. 또래들은 별종의 등장에 신이 나서 깔깔댔다. 나는 굴하지 않았다. 박해 앞에서 당당했다. 내 죄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리병신, 다리병신~”
놀림이 시작되면, 나는 일부러 더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왠지 그러면 금방 끝날 것 같았다. 만사에 호기심이 들끓던 아이들은 금세 나에게서 흥미를 잃곤 했다. 일부러 당당히, 담담한 척을 했다.
무거운 곤혹을, 나약한 무너짐으로 드러냈다면 조금 더 오래 비아냥을 받을 것이라고 어린 나는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비열함과 교묘함이란 없는 맑은 잔혹함의 시기였다. 그렇게 나는 사람들 속에 욱여 들어가는 법을 배워갔다.
나갔다 오면 무릎이 깨져 돌아왔다. 이명래 고약을 달고 살았다. 터진 무릎이 아물기 전에 또 고꾸라졌다. 딱지가 앉을 새도 없이 곪아 터졌다. 엄마는 말했다. “계속 나가라”
“내 동생 놀리지 마!”
착한 형은 주먹을 휘둘렀고, 처맞고 돌아와 매 얼굴이 푸르디 죽죽 했다. 용감한 형제는 위아래로 이명래 고약을 나눠 발랐다.
우리는 기자촌 꼭대기 집에 살았다.
154번 버스 종점 초입에서 우리 집까지는 어른 걸음으로도 이십 분이 넘게 걸렸다. 계단을 바삐 세워놓은 듯한 경사길의 연속이었다. 나는 오 분만 걸어도 숨이 턱에 찼다. 제멋대로 구부러진 새다리 병신에게, 그 길은 지옥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굳이 밖으로 자주 나갈 일이 없었는데, 사건의 지평선을 위해 일부러 한 정거장이라도 나갔다 돌아오는 서사를 자주 만든 것 같다. 엄마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를 두고 홀연히 언덕을 올라가버렸다.
서러움과 두려움이 나를 키웠다. 눈물범벅, 땀범벅이 되어 나는 올랐다.
지금까지 내가 이리 강짜 있게 세상을 버텨낸 건, 홀씨가 되어서도 바특하게 살아낸 엄마의 온전한 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