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늘 일기를 쓰기 시작하기'까지의 일기.

by 하니오웰
1487209737163 (2).jpeg 내 딸 3살 때 1.
1487209740445 (1).jpeg 내 딸 3살 때 2.


나는 방금 멜론에서 John Barry가 작곡한 'Out Of Africa' OST의 End Credits를 틀었다.

매우 웅장하고 서정적인 멜로디의 연주곡이라 자주 듣는다.


마음을 다스리고 뭔가에 집중하고자 할 때.


오늘 나는 새벽에 서너 번 깬 것을 빼면 7시 27분에 일어났다.

새벽에 일어나서 일기를 올리는 것이 자리잡혔단 터라 좀처럼의 시간에 동공이 제법 커졌다.


일요일은 마늘과 딸이 9시까지 교회를 가는 날이라 상당히 루틴하게 움직인다.

마늘은 등교 준비를 마치면 청소기를 돌린다.

나는 딸을 8시에 깨우기 전까지 아침을 준비한다.


그런데 오늘은 내가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딸의 아침을 준비하기가 애매해졌다.


마음이 쫓겼지만 일단 노트북 앞에 앉았다.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티의 사색' 독서 발췌 일기를 올리려 조금 끄적이던 차.

양처가 소리쳤다.


"적당히 해라!"


변신이 두려워 샤워를 시작했는데 밖에서 멍울멍울 익숙한 '주파수가 다른 두 개의 펄스'가 들려온다.

뭐라고들 하시는건지 들리지 않았으나.


1) 아. 나가면 닦치고 빨리 준비해야지.

2) 딸 아침에 못 안겠네.

두 가지 자주 하던 생각을 했다.


나오니 딸은 오늘 입고 나갈 옷을 꺼내 들고 멍하니 보고 있었고 양처는 예상 외로 참하게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다.

요즘 나를 지배하고 있는 방화범에 대한 이빨을 털려 했으나 '나 지금 건들지 말아라'는 언명이 돌아왔다.

나는 삐쭉해서 나왔고 마루와 방에 널부러져 있는 딸의 옷들이 눈에 들어왔다.


"너 아빠가 이거 한 곳에 모아두라고 했지!"

화살은 쏘아졌고 이미 엄마와 기상 일기토를 마친 딸은 즉시 반격 했다.

심기가 뒤틀려 있던 딸의 단어들은 날카로왔고.


"너 이것들 정리 매일 잘 안 하면 용돈 끊어버린다!"

2차 오발 화살이 발사 되었다. 마늘은 혀를 쯧쯧 찼고 나도 후회 했다.


"아빠도 똑같자나! 아빠는 정리 잘해?"

얼마전 딸은 웃으며 자기는 'ENFJ'지만 J 중 가장 P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더 같은 공간에 있어봤자 좋을게 없다고 생각한 나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시동을 걸었고 파헬벨의 '캐논'을 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십여분 뒤 내려온 딸의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바로 내 핸드폰을 가져가서 자기 앨범을 틀었다.


교회를 가던 중 딸이 견제구를 날린다.


"아빠 카드 줘. 삼각 김밥 사먹게."

마음 다 잡아 놨는데 딸이 보낸 화해의 제스처를 너그러이 받아내지 못하고 3차 오발 화살마저 쏘았다.


"너 용돈은 대체 언제 쓰는거야?"


침묵 2분.


"엄마가 카드 줄테니 버거킹 가서 치즈 스틱 하나 사서 교회로 올라와"


교회 앞 횡단보도에서 나는 딸을 내려주고 괜히 창문을 열어 잘 가라고. 차조심 하라고 2번쯤 말한다.


비루한 아빠보다 마음 곳간이 몇 곱절 넓은 이쁜 딸이 고개를 끄덕이고 웃어주기까지 한다.


구청 건너편 매머드에 가서 '베트남 연유 커피'를 주문하고 반샷으로 해달라고 말한다.

집에 와서 '딸의 MBTI'라는 글제로 오늘 일기를 바로 쓰려고 장부 사인을 서둘렀다.


아주 가끔 잘 잔 날. 머릿 속에서 활자들이 터지는 날이 있는데 오늘이 그런 날임을 느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집에 와서 걸레질을 해야 했다.

마늘님은 'INFJ' 중 극J라서 아주 꼼꼼히 오래 청소기를 돌리기 때문에 매 번 걸레질은 'ENFP' 중 극P인 나의 몫이다.

그 분은 항상 제발 꼼꼼히 해달라고 부탁하고 나간다.

나는 항상 양처의 걸레질 시간의 3분의 1 정도면 임무를 완수하는데 오늘은 7분의 2 정도였다.

물기가 남긴 흔적이 징검다리 수준은 아닌데 제법 여백의 미가 찬연하다.


활자들이 달아나기 전에 빨리 쓰고 싶었지만 오는 차 안에서 갈등을 거듭하다가 '청소'를 선택했다.

청소를 마치니 '똥'이 마려웠다.

나는 때때마다 갈색이 연해져 가는 정도를 확인하는데 오늘따라 계속 닦아도 쉽게 옅어지지 않아서 7번을 닦았다.

나오니 연유커피가 식어 있길래 700W 전자레인지에 1분 30초를 돌렸다.


본격적으로 오늘 일기 런칭 준비를 하려고 멜론에서 노래를 틀었더니 '중복 스트리밍'.

홍광 교회에 계신 ENFJ께서 먼저 트신 것이다.

집 정리를 10분 정도 하고.

어수선한 마음을 다스리려 연주곡 앨범을 틀어보니 잘 나온다.


'Out of africa'...


난 언제나 'Out of aprosexia'가 가능할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여보의 깊은 조언과 2014.11.15 태교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