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의 공무원 일기 4.(서대문 세무서)

by 하니오웰


GbwY7ERq6LR.jpg


서울청으로 배정 된 것이 부끄러우면서도 나는 기분이 좋았다.

제일 친한 동기들이 비록 세무서는 달라도 서울청으로 많이 왔기 때문이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서대문 세무서로 발령을 받았다는 소식에 엄마는 안도하셨다.

나와 엄마의 밀월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지만(광풍음주세월로의 신속한 회귀) 첫 출근을 맞아 양복을 새로 사주셨다.

쓰리 버튼 양복.

바지통은 너무 넓고 버튼은 세 개나 되었으며 사이즈는 하나 컸으니 안 그래도 작은 키에 직립이 안 되는 엉거주춤한 곱추 자세의 내가 싣고 다니는 꼴이 참 볼썽 사나웠다.

이 양복은 나중에 결혼 후 마늘이 가장 먼저 의류 수거함에 넣어 버렸다.

넥타이를 맬 줄 몰랐던 나는 자동 넥타이를 서너 개 준비했다.

국세청에 대한 선망이 막연하게 강하셨던 엄마는 편한 복장으로 수지출장소에 출근하던 나에게 별다른 잔소리를 안하셨다. 아마 너무 멀리 출퇴근하는 아들에 대한 짠함 때문이었으리라.

같은 서에 발령 받은 다섯 명은 서로 그리 친하지 않았다.

나는 징세과 정리1계, 한 살 많은 형님은 총무과 업무지원팀, 동갑 놈은 소득세과, 여자애 둘은 각각 부가가치세과와 징세과 정리2계로 배치되었다.


정리계는 납세자가 세금을 납부기간 내에 내지 않으면 재산을 조회하여 압류 및 공매, 행정 제재 등 체납 처분을 하는 곳이고 업무지원팀은 세무서 내 직원들의 급여 및 인사, 청사 건물 관리 및 기타 제반 업무 일체를 총괄하는 곳이다.

부가가치세과는 과세사업자의 부가세, 소득세과는 개인소득자의 소득세를 신고, 사후관리를 하는 과이다.


나는 서울, 큰 형님은 전라도 광주, 동갑 놈은 대구, 두 막둥이들은 경주와 제주도 출신이었으니 그야말로 전국구 오방색이었다.

교육원에서 각자의 궤도에서 맴도느라 바빴던 우리는 저녁과 밤을 잇는 동안 신속하고 깊이 서로의 그럼다움을 나누어갔다. 모두가 '술'을 좋아하고 잘 마셨으며 적적했기에 그리 어려운 시간들이 아니었다.


큰 형님은 정말 착했다. 달은 차고 기울었지만 형님의 지갑은 신통하게 기운 적이 없었다. 나도 어디가서 술값을 빼지 않고 먼저 내는 편이지만 그 형님은 항상 몰래 빠져나가 계산을 미리 다 해놓곤 했다. 무취의 큰 형님과 발랄한 두 막둥이 여동생들 덕에 우리 동기들은 세무서 내에서도 금세 견고한 오각 블럭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서울청, 중부청 동기들 사이에서도 우리서 동기들의 단합력은 꽤 유명했다.


동갑 놈은 조금 조용했다. 좀 눈빛이 부담스러웠는데 여직원 책상에 턱을 괴고 쭈그리고 앉은 채 밀담을 나눌 수 있는, 평신도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지만 신비롭지는 않은 그만의 비의가 있던 친구였다.


막내는 속이 참 깊었다. 3남매 중 막내 였고 위로 나이 차가 있는 오빠가 둘인지라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티가 났고 말투는 조금 툭툭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부드럽고도 단단한 자신의 깊은 따뜻함을 나눠줄 줄 아는 그야말로 든든한 막냉이 역할을 잘 했다. 다른 서에 있던 나이 차가 꽤 있던 동기형 한 명이 막내를 보러 우리가 마시던 술자리에 자주 등장했고 그 둘은 몇년 뒤 결혼 했다.


넷째는 열정녀였다. 막내 보다 한살 위였던 언니는 상대를 한 순간에 미혹에 빠지게 할 수 있는 유달리 수려한 이빨을 가지고 있었다. 직장인 연극 모임에 열정적으로 나가서 공연을 자주 하는 친구였고 연애 전선이나 본인을 지켜 감싸주는 어떤 것들에 매우 깊이 천착하는 동생이었다. 우리 200명이 넘는 전체 동기 중에 가장 먼저 세무사를 땄고 지금은 잘 나가는 대표님이 되셨는데 이 아이에 대해서는 후술할 일이 있겠다.


정리1계.

당연히 문에서 가장 가까운 끝자리에 자리 잡은 나는 일머리가 좋은 편이 아닌데다 초장부터 군기를 잡으려고 거드름을 피우는 동갑내기 사수 놈 때문에 많이 버벅거렸다.

그 녀석은 나의 복장 및 상사에게 말하는 태도, 구부려 앉는 자세까지 지적질을 해댔는데 나는 당연히 짜증이 많이 났고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일을 배워야 했기에 잘도 참았다.


바로 옆자리는 조금 새침한 누나였는데 나중에 허당미도 발견하고 착한 심성이 많음을 알게 되었지만 농담 좀 건네고 다가가려 하면 기가 막히게 등장하는 동갑 사수놈 때문에 친해지는데 오래 걸렸다. 그 놈이 얼굴만 새침한 그 누나를 좋아하는가에 대한 오해를 꽤 오래 할 수 밖에 없었다.

업무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4차원 동갑 여직원도 있었고 주식 얘기를 자주 하시며 따뜻한 촌철 멘트를 날려 주시던 허허실실 형님도 계셨고 키가 아주 크고 유머 감각이 좋았던 형님도 성격이 참 좋았다. 차장님은 그림자 같이 조용히 웃음만 띠고 계시던 분이셨는데 술을 드시면 이런저런 좋은 말씀을 많이 섞어 주셨다.


무엇보다 세법의 어느 분야가 나오든 시행규칙까지 술술 읊으시던 매일 약주를 즐기던 얼굴은 우락부락, 마음은 몽글몽글 하셨던 팀장님 지금까지도 내가 가장 존경하는 팀장님 두 분 중 한 분이다. 나랑 집 방향이 비슷했는데 회식 후 내가 취했든 아니든 항상 택시를 같이 타셔서 나를 집 바로 앞에 꼭 내려 주고 가시던 분이다.

분명 잘못이 있고 어설펐던 점이 많았을 나의 기안문들을 항상 즉시 선결재 해주셨다. 달리 내가 좀 개선해야 할 점이 있으면 직접 말씀은 안 하시고 내 동갑 사수를 통해 전달하셨던 단점(?)을 빼면 정말 완벽한 분이셨고 알고 보니 조사 및 재산 분야에서도 국세청 내에서 널리 인정 받는 천재셨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전체적으로 그보다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았던 나의 세무서 첫 팀이었다.

몇 년 뒤 7급 공채로 다시 들어온 나에게 동갑 사수 놈은 조금 더 다정해지긴 했었고 그 이후에 다시 몇 번 더 만나보니 그냥 정이 많고 선의의 오지랖이 넓은 친구였다. 약간의 겉멋이 들어 있던 3년 차 9급이었을 뿐이었고 직설적인 나의 회상에 즉시 사과도 건네 준 착한 놈이다.


어느 날 고질 체납자 중 한 명이었던 아줌마가 예금 압류 통지서를 받고 퇴근 시간에 임박하여 전화 했고 저편에서 욕설이 날아 들었다. 이내 남편이라며 얼핏 봐도 프레임 찌그러진 날탱이 덩치 기둥서방을 대동해서 거칠게 사무실로 들어왔다.


'김ㅇㅇ. 개새끼 어디 있어!!!'


keyword
작가의 이전글김새론과 언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