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족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과정이 이 브런치의 목적 중 하나인데 어제 밤 책장을 뒤지다가 아버지의 기록을 찾아 그것을 토대로 적어본다.
나는 기억력이 무척 안 좋아서 나의 성장기를 쓰다가 멈췄는데 이 기록을 찾은 것을 기점으로 다시 끄적여 볼 수가 있겠고 나의 선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전무한테 이렇게 옮겨 쓸 수 있어서 저 방에서 곤히 자고 있는 내 딸에게 괜한 미안함이 덜어지는 기분이다.
우리 집안은 광산 김 씨 집안이다. 10대조 이전부터 전라도 광주에서 살았다고 한다.
나의 고조 할아버지는 광주 일원에서 제일 큰 지주였다고 한다. 열세 살에 그 큰 살림을 물려 받았다고 하는데 열세 살에 물려 받게 된 배경과 그 살림이 생성된 연유가 몹시 궁금한데 기록에는 없다.
지금의 전남방직에서 전남대학교까지 사이의 논이 전부 고조 할아버지의 논이었다고 한다.
고조 할아버지는 인물이 좋아 우물가에서 아낙네들이 '달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달이 떠오르듯이 인물이 좋았다는 뜻이다.
글을 좋아하셔서 밤낮 없이 글을 읽으셨고 봄가을로 광주 읍내 대상들이 시세를 물으러 왔으며 집안에서는 과거철만 되면 나귀를 끌고 할아버지 집으로 와 과거를 보러 한양에 가자고 졸랐다고 한다.
고조 할아버지는 과거 공부엔 뜻이 없고 경세와 실학 공부를 하셨다고 한다.
증조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고조 할아버지께서 어찌나 책을 가까이 하셨던지 할아버지 방은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여 창문 있는 곳만 겨우 남아 있었으며 돌아가신 뒤에 손에서 책을 빼낼 정도였다고 한다.
나의 증조 할아버지는 3형제 중 둘째였는데 노름을 좋아해서 당대에 그 큰 살림을 통째로 날려 버렸다. 머슴들이 대청에 산같이 쌓인 동전꾸러미를 지게로 실어냈다고 한다.
증조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3줄로 끝나는 걸 보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증조 할아버지에 대한 평가도 어지간했던 모양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1남 4녀였고 할아버지가 국민학교 4학년 때 학업을 중단해야 했을 정도로 몹시 적빈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할아버지는 생선장사와 금은방 직공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조끼를 주로 만드는 양복점에 취직 해서 옷 짓는 기술을 배웠고 양복점을 운영했는데 잘 되어서 아버지 대 7남매는 부족함 없이 살았으며 대학까지 잘 다녔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사촌들은 지주 집안 자식들이어서 8형제가 일본 유학을 갔고 전부 좌익 운동에 뛰어들어 6.25 때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어 버렸고 할아버지는 학력은 짧았지만 사촌들의 영향을 받아 물이 살짝 들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머리가 아주 좋으셨고 기민한 판단력과 불 같은 성미를 가지고 계셨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있지도 않을 큰 아들을 잡으러 광주 학동집 대청에 올라서려 하면
'내 아들은 너희 같은 버러지 놈들에게 잡혀갈 위인이 아니니 썩 꺼져라'라고 호통을 치시며 물리셨다고 한다.
독자였던 할아버지는 큰아들을 잘 가르쳐 보려고 무척 애 쓰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충장로 5가 양복점에서 십 리 떨어진 친척들이 보여 사는 제매(지금의 광주 북구 신안동)라는 동네를 아버지 손을 잡고 잘 걸어 다니셨는데 아무도 안 다니는 농고 앞 포플러나무들이 늘어선 신작로를 지나갈 무렵이면 아버지 손을 꽉 잡고 부르르 떨면서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라고 웅변조로 외치면서 엄숙한 표정을 짓곤 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키가 180cm에 피부는 희고 인물이 좋으셨다.
어른들의 중매로 할머니를 만났는데 첫날 밤 휘둥그레 떠 있는 달을 올려다 보고 깊은 장탄식을 하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키가 145cm 정도에 피부는 까무잡잡하고 인물이 안 좋았다.
나의 아버지는 키가 170cm에 피부는 까맣고 인물이 내세울 정도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랫 입술이 무척 두꺼웠는데 두 형제 중 나의 입술이 더 두껍고 그 두꺼움은 저 방에서 두껍게 자고 있는 내 딸에게 그대로 날아 들었다.
어릴 때 나는 분명한 의문점이 있었다.
왜 나의 아버지를 제외한 6남매, 고모와 작은 아빠들은 하.나.같.이. 인물이 참 좋은데 아버지 인물만 저럴까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다.
답은 가감 없이 너무나 명확한 것이었으며 나는 그 오답을 정답으로 삼아 살아가는데 몇 십년이 걸렸다.
할아버지는 독자로 자란데다 자수성가를 한 탓으로 성질이 그야말로 불이셨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어릴 때 아프면 손을 잡고 병원에 갔다가도 대합실 문을 살짝 열어 보고 다른 손님의 신발이 한 켤레만 있어도 들어가지 않으셨다고 한다. 기다리지 못 하는 성품 때문이었고 그 병원이 있는 블록을 빙 돌아 다시 병원 문을 열어 보고 신발이 없으면 들어가셨다고 한다.
몸이 안 좋으면 약을 사다 입에 막 털어놓고 다 나은 기분이라고 바로 말씀하셨다고 하니 그 성질이 참 대단하셨다.
아버지가 국민학교 2학년 때 할아버지한테 구구단을 배웠는데 어찌나 다그치시던지 주눅이 들어 더 외우기가 힘들었고 그러면 더 크게 혼난 기억이 생생하시다고 한다.
내가 어릴 때 학동 집을 갔을 때 할아버지는 중풍이 와서 주로 누워 계셨는데 목소리가 쩌렁쩌렁 하셨고 머리맡에는 항상 소주 됫병이 있었다.
어떤 분 덕분에 역시 할아버지 때의 가세도 다 기울었을 무렵이었는데 학동 집은 남아 있었고 할아버지는 나만 보면 "ㅇㅇ야, 세상 참 모질다. 이 짠한 것. 이 집은 다 니 꺼다."라고 말씀하셔서 어린 마음에 동공이 꽤나 커졌던 기억이 있다.
할아버지는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는데 아버지 위로 6살 위인 누이가 한 분 계시고 그 사이 두 분(형과 누이) 이 있었는데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아버지 손아래로 두 살 터울로 다섯 동생분이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