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교양'이란 무엇인가.

by 하니오웰


IggHR8AjUpm.jpg


나는 '교양'이란 말이 풍기는 교묘한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교양. 사전적 의미로 '지식, 정서, 도덕 등을 바탕으로 길러진 고상하고 원만한 품성'이라고 되어 있다.


거기에는 지식인들의 미적지근한 자기 만족과 시혜가 도사리고 있으며 투명과 열정이 없다.

'교양'은 무언가 진부하며 눅눅하다.

'교양'은 분명 인간이 세상을 헤쳐나가는 밑천이기는 하다.

세속에서 '자신의 상품가치'를 끌어올리고 미끈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좀 더 기울여 보면 '교양'은 오랫동안 특정한 환경과 습관의 누적으로 형성된 성향이나 가치관,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포함하는 총체적인 것이다.

'교양'은 개인의 역사를 관통한 학문적 지식, 예술적 감성, 사회적 경험을 포괄하고 수렴하여 생성된다.


그 위대한 교양과 위대한 인간, 또 그 위대한 인간의 자유를 섞어서 생각을 좀 해보면.

인간은 '자유'를 이해할 때, 자기의 이유를 열어 내고 자기 삶의 목적을 깨달아 스스로 입각점을 세워 정립할 수 있을 때 참된 의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데 이러한 자기 삶의 목적과 방향을 스스로 세우는데 작용하는 것이 '교양'이다.

'교양'은 단순한 지식은 아니고 교육과 경험을 통해 내재화된 중층적이고 탄력적인 사고방식의 덩어리이다.

그렇다면 자유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첫째, 스스로 주체적으로 사고하여 사실을 분석하고 판단하여 상황에 맞는 결론을 찾는 것이다. 외부의 권위나 전문가라고 참칭되는 집단의 짓눌린 규격화된 사고에서 용기있게 벗어나 보는 것. 그것이 자유다.


연애 시절.

나는 출근을 하고 마늘은 휴가를 냈다. 전화가 온다.

"오빠. 나 이제 뭐 해야 해?"

"..."

맥락이 좀 다르지만 나는 그 때 생각했다.

'아 내 소중한 아가가 막내긴 하구나. 주체성이 좀 더 필요하겠구나. 휴가를 냈지만 진정한 자유를 찾지 못 했구나'


둘째, 스스로 돌이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죄를 저질러 놓고도 개전의 정이 없는 반성하는 기계로 전락하는 인간이 점점 많아지는 세상에서 우리에게는 반성의 능력이 필요하다. 일관성이나 정해진 답에 대한 의문을 가해 보는 것이다.

정답이라고 이 사회의 불문율이라고 칭해지는 많은 것들이 반성이 들어가기 힘든 우상화된 교리의 영역으로 틈입해 버리는 경우는 참 허다하지 않은가?

섣부른 우상화의 정답 시스템과 승자 독식이 가져오는 왜곡과 기가 막힌 은폐를 경계하려면 자꾸 맴돌려 생각해 보는 버릇을 가져야 하겠다.


번외의 잡설을 첨언해 보자면 나는 2013년에 결혼을 했는데 주례를 집행한 어떤 교회의 담임 목사가 몇년 뒤 자신의 직을 내려놓는 대가로 수억원을 요구했다가 종국에 2억원이 깎인 금일봉을 수취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또 착취의 기치를 올리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흔전하게 널려 있는 첨탑의 높이들을 욕하자는 것은 아니고 그 권위에 짓눌려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지 않으려 하는 개인들의 습관화된 경직된 자세를 경계해 보자는 얘기니 오해들 하시지 말기 바란다.


셋째,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돌이켜 판단을 거듭하는 자세를 가지고 남을 존중하며 잘 어울려 살아보는 것이다.

내가 밥벌이를 하고 있는 직장은 지방직 공무원 사회이다. 아무래도 집이 유복하지는 않고, 또 아무래도 E 보다는 I가 많고, 사기업에 비해 경쟁이 치열하지는 않으며 역시 아무래도 보수적이다.

금전적 보상은 미약한데다 사회적 시선은 갈수록 저렴해 지는 판에 얼핏 주체적으로 돌이켜 생각해 보면 보상은 '승진' 밖에 없다.

승진을 한다고 호가호위 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또 승진이 어그러져 동기들. 심지어 후배들에게까지 밀리면 기분은 참담하다. 별 것 아닌 내가 더 별 것 아닌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상술한 여건상 앞담화 보다 뒷담화에 길을 잘 들인다.

물론 그 기약 없는 뒷담러들의 자의식 부재와 주제의 빈곤이 그러한 작태들의 주원인이 되긴 하고 말이다. 그들은 얼핏 보면 잘 어울리는 것 같지만 좀처럼 정상적인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 하고 사람 사이의 갈등 사이를 넘나들며 그 갈등을 교묘하게 종용하며 기생하며 살고 있다. 조직을 와해시키는 자들이다.

병마에 시달리다 돌아온 사람에 대해서도 팩트 체크 없는 공격으로 본인의 알량한 밥그릇을 사수하려 하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과 염치가 없는 자들이 있다.

일부 소수에 대한 얘기이지만 이 사회의 전반적인 암약자들의 민낯일 것이다.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맡은 바 임무에 헌신하고 서로의 긍정 에너지를 교차 시키며 악성 민원을 참아내며 고군분투 하는 전장에 바로 서 있다.


중층적이고 총체적인 서로의 씨줄과 날줄이 만나는 것이 삶일진데 여기서 각자의 '교양'이 작동한다.

대화와 소통을 한다는 것은 언어를 주고 받는 것만이 아니고 내재화된 교양들이 서로 섞이고 배어드는 묵직한 과정이다.

참된 인연이 된다는 것. 나의 손을 모아보게 하는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연유들에 의해 '교양'을 고양 해보려 노력해야 한다.

학위 취득의 높이나 경제적인 배경, 사회적 지위의 축적에서 나오는 것이 '교양'이 아님을 깨닫고 '타인의 삶을 얼마나 잘 헤아려 들여다볼 줄 알고 기쁨과 슬픔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지'의 척도가 진정한 '교양'임을 알고 그 계단의 높이를 올려 보려 노력하는 것이 '자유'를 이해하는 길인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스스로 잘 서지 못 했다. 그래서 자주 생각한 바가 '몸은 직립하지 못 하지만 정신은 직립해보자'이다.

아직 몸도 마음도 제대로 직립하지 못 했지만. 인간은 죽기 전까지는 책임 귀속적인 존재이니 '이제부터라도 잘 자유하려 노력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을 또 해본다

마음으로 자기를 세우는 것, 마음으로 자기의 이유를 찾는 것이 참된 진보일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져 갈 때 비로소 우리는 남에게 정신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자기의 삶을 스스로 형성해나가는 책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교양'은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책임을 주체적으로 하는 '자유인'이 되는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의 아버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