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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터 데이

by 하니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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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의 3번째 겨울 방학.

전반기는 점심 한 끼를 위해 영어 캠프(2주 짜리)를 보냈다.

아침 8시에 나가 학원에 내려 주면 오후 2시에 집으로 돌려 보내주는 시스템이었는데 79만원을 냈다.

캠프를 마친 날. 딸은 말한다.

"아빠. 이제 와서 말하지만 점심 도시락도 별로였는데 79만원은 참 비싼거야. 배드민턴 자주 친 건 참 좋았지만 30만원이면 될 것 같아. 근데 나 다시는 이런거 안 할거야."

고액이라는 것에 나와 생각이 같아서 하이파이브는 했다.

2월 한 달은 점심 창구 당번인 날을 제외하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있는 걸로 차려 주기도 했지만 뒤로 갈수록 쿠팡 이츠 앱의 업데이트를 놓칠 일은 생기지 않았다.

나는 딸래미한테 요즘 화를 많이 낸 것이 너무 미안하기도 했고, 어떠한 끝이 오는 것은 좋았지만 아쉽기도 해서 좀 무리하게 휴가를 냈다.


아침 9시 정각. 하니가 깼다.

티비를 좀 보더니 노트북 옆으로 와서 구몬 숙제를 시작한다.

"아빠 숙제 빨리 끝내면 가서 옷구경 먼저 하자"

나는 오늘 하니와 홍대 반지공방에 가서 반지 만들기 체험을 하고 옷 구경 좀 하다가 불광 엔씨 백화점에서 옷을 사주기로 했다. 의류 구입 리미트 비용은 10만원.

역시나. 좀 깔작대더니 산만함을 뽐낸다.

"아빠. 그런데 10만원 넘으면 10만원으로 하자. 10만 9천원 나오면 10만원인 걸로 하자."

"아빠. 차 가져가면 안 돼? 홍대에서 마음에 드는 옷 없으면 빨리 엔씨로 가서 사고 싶어"

"아빠. 과학 숙제 3일치가 밀린건데 2일치는 아빠가 해줘. 그래야 우리가 좀 빨리 갈 수 있잖아."


좀 떠들더니 배가 고프시단다.

전날 사둔 '닭볶음탕 밀키트' 조리 시작. 저번에 딸이 너무 매워하던 기억에 레시피 보다 조금 더 물을 부었다. 꿀도 조금 넣었다.

"아빠. 최고야. 음. 뭔가 다른데 저번 보다 맛있어. 사실 저번 맛 기억은 잘 안 나."

숙제를 다 못 마쳤는데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예상대로였다.

나만 너무 바빴다. 일기를 써서 올리고, 밥 차리고 설거지 하고 잔소리 하고 체념 하고.


반지 공방 가게 도착.

꽤나 잘 생긴 남자였다. 나긋나긋 설명도 잘 해줬다. 하니는 사이즈 13호를 선택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숫자(9633013 대학교 학번)라 기분이 좋았다.

"학생은 꿈이 뭐에요?"

"디자이너요."

"와. 저도 어릴 때 꿈이 디자이너였는데 꿈을 이뤘어요."

하니는 다시 말한다.

"저는 반지 디자이너는 되기 싫어요"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벼리고 두드리고 갈고 나서 손가락에 넣어 보니 잘 맞았고 딸은 신났다.


하니는 ABC마트 쪽으로 가자고 했다. 거기에 옷 가게가 많다는데 거리가 좀 되었다.

날은 완전 풀렸고 딸 손을 잡고 걸으니 기분이 좋았다.

몇 걸음 가더니 들어간다.

회색 민소매 스웨터로 시작했다. 27,000원.

나는 속으로 오늘 엔씨 갈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몇 걸음 가더니 키링을 산다. 5,000원.

이번엔 좀 걷는다. 오래 가지 않았다. 베이지 색 티 하나 산다. 24,000원.

기세가 좋다. '잘 하면 약속 가기 전에 낮잠을 잘 수 있겠다'라는 기대를 해본다.

2주 전 세 명 핸드폰 케이스를 맞추자 해서 다 맞췄는데 요란한 앵두 케이스를 보더니 구입하신다. 5,000원.

"아빠 얼마 남았어?"

"39,000 원"

배가 고팠던 나는 30분 전부터 졸랐다. '닭꼬치'를 발견하더니 결제를 허한다.

우리 딸은 닭을 무지하게 좋아한다.

몇 걸음 더 못 가 갈색 야구 자켓을 산다. 30,000 원.

기호가 결코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성격 급한 딸은 나의 미소를 이끌어낸다.

아까부터 쉬가 마려웠던 나는 몇 번을 물었다.

"아빠 저 가게 들어가서 쉬 하고 나오면 안 돼?"

마늘과 이런 부분에서 데칼코마니인 대장님의 대답은 칼같다.

"아빠. 언제 정신 차릴래? 내가 이런거 제일 싫어하는 거 알지?"

몇 년간 대학 시절 숱한 노상방뇨 얘기를 해주며 이런 순간을 위한 빌드업을 많이 시도했지만 소용이 없다.

통과의례인 스티커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배설욕구 때문에 입꾹 했다.

'1분 캐리커쳐' 가게 발견.

저번에 삼청동 수제비 옆 캐리커쳐 가게를 못 간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한 기억이 났다.

하니는 이 부분은 잔여 비용에 포함 안 하는 것임을 확인받고서야 들어갔다.

가게 안 세 분이 시간차 칭찬을 날리셨다.

"따님이 참 예뻐요."

'오늘 저 분들은 저 말을 몇 번째 하시는걸까?' 잔망스런 생각이 스쳤다.

귀엽게 잘 나왔다.


홍대 입구역 장애인 화장실에서 나는 웃었고 하니는 굳이 겉옷을 갈아 입었다.

연남 cgv 근처 굿즈샵에서 한참 구경만 하더니 집으로 가잔다.

남은 잔액은 퍼핀 카드에 이체해 달라더니 '다이소'는 그냥 못 지나치신다.

나는 많이 피곤해서 낮잠 생각 뿐이었지만 짜증을 참아냈다. 오늘 '도터 데이'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젤리를 나눠 먹으며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고 나는 한 시간 반 뒤 알람을 해 두고 누웠다. 마늘이 들어오는 소리에 잠을 깼고 시계를 보니 꼴랑 30분 지났다.


마늘이 내 저녁 약속에 같이 가겠단다. 멤버가 좋아 가고 싶단다.

한 분은 내 인생에서 만난 모든 사람 중 제일 착한 서대문세무서 발령 동기 한살 위 형님.

한 분은 2007년에 함께 많이 취했던 한살 위 형님.

한 분은 2013년. 나의 인사교류 맞상대자 두살 위 형님.

세 명은 올해 같은 세무서 같은 과에서 만났고 신기하게 '나'를 공유하고 있었다.


급히 장모님을 호출한 우리 부부는 차 시동을 걸었다. 딸은 할머니한테 '닭발'을 해달라고 주문했다.

치킨 쓰리 콤보를 완성시켰다. 꼬꼬한 년이다.

선량한 그들과의 귀한 만남에 몇 주 전부터 기대하던 약속이지만 도터 데이에 오점을 좀 남기는 것 같아 미안했는데 하니는 신나 있었다.

잔소리라고는 단 한마디도 안 하시는 내가 만난 장모님 중 제일 착한 외할머니와의 시공간을 엄청 좋아하기 때문이다.

밤 10시에 장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 저희 좀 늦어요. 하니 두고 댁으로 먼저 돌아가세요. 오늘 죄송합니다."

바꿔달라니 딸은 유튜브 보느라 받지도 않는다.

한 시간 반 뒤 집으로 돌아가니 딸이 보이지 않는다. 둘 다 난리가 났다. 마루에도 안 방에도 딸래미 방에도 없다. 1분쯤 뒤 숨어 있다가 스멀스멀 어디선가 나온다. 여전히 기분이 최고조인 하니.


휴가 내길 참 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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