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의 성장기 4.(엄마의 두 가지 운동)

by 하니오웰


나는 전술한 대로 경직성 뇌성마비(선천성)로 태어났다.

5살(1981년) 때 전라도 광주에서 큰 수술을 했다.

집도의는 아버지 후배 중 한 명으로 광주에서 정형외과를 개업한지 얼마 안 된 젊은 의사였다.

나는 기억력이 안 좋아서 그 희뿌연 시절의 순간들이 차르르 기억나지는 않는데 어렴풋이 차가운 침대에 누워서 수술실로 들어갔던 기억, 수술 후 두꺼운 석고를 드릴로 쪼갤 때 겁먹었던 기억 정도는 난다.

아버지는 구치소에 있었고 엄마는 옥바라지를 하느라 큰 고모님의 장녀가 내 간병을 일체 해 주었다.

천사 누나는 예정되어 있던 본인의 결혼식 날짜까지 미루고 나를 지극 정성으로 돌봐주었다.

양 다리 아킬레스건을 연장한다고 무릎 뒷편과 고관절 근육 일부를 잘라 냈다.


수술은 대실패였다.

엄마는 의사를 죽여 버리겠다고 했고 아빠는 출소 후 엄마한테 미안하다며 깊이 사과하셨다고 한다. 어떻게 무마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시간의 덧댐'과 '세월의 질곡'만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했을 것이다.

나는 수술 전보다 까치발이 더 심해졌고 결혼을 하고 한참 뒤인 2022년에야 다시 재수술을 시도할 수 밖에 없었다.

40여년 간 엄마는 '내 자식의 몸에 다시는 칼날을 대지 못 하게 하리라'는 그 날의 피 맺힌 다짐을 철저히 지켜내셨다.


엄마는 내가 네다섯 살 때 잠깐의 직립이라도 시켜보려 몸부림 쳤던 그 초창기 입봉 시절의 말씀은 거의 해주신적이 없다. 너무도 참담했고 시렸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리라.

남편은 철장에, 연년생 핏덩이에, 기약 없는 앉은뱅이의 조합을 어떻게 마감 지옥의 회사 생활 속에서 버텨내실 수 있었을까?

나를 가까스로 벽에 세워 두면 픽 쓰러지고 다시 힘겹게 세우면 또 쓰러지고 그 단순하고 명료한 좌절의 과정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미친 듯이 반복하셨다고 한다. 착한 연년생 형은 어느새 내 옆에 와서 나를 잡아주며 혀 짧은 소리로 "ㅇㅇ야 아파도 일어나봐. 형아 잡고 버텨봐"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엄마는 결국 나 때문에 사표를 던졌다.

내가 그래서 어떻게 근육을 붙이고 매커니즘의 전향적 전환을 이루어 일어나 버텨 설 수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몇 년에 한 번씩 어렵게 드리면 "모르겠어. 더 이상 묻지마. 괴로워"라는 말씀만 반복하셨다.


엄마는 나의 운동에 점점 더 혈안이 되셨다.

크게 두 가지의 운동이었다.


1) 섰다 앉았다 운동 : 제자리에 섰다가 그대로 앉았다가를 반복하는 운동. 하루에 200번 넘게 시키셨고 나는 매 번 땀범벅이 되어 꼬꾸라지길 반복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비효율적이고 관절에 좋지 않은 무자비한 운동 방식이었다.

길어지지 않은 아킬레스 건과 수술로 짧아진 뒤쪽 힘줄들 때문에 균형을 못 잡았고, 까치발이 심했으니 나는 힘겹게 일어설 때마다 제자리에서 전후 좌우로 세차게 뒤뚱 거렸고 엄마는 뒤에서 때때마다 흔들지 말라 하시며 회초리를 때리셨다.

어릴 때 밖에 나오면 엄마는 내 뒤에 바짝 붙어 '왼발. 왼발!'을 외치셨다.

오른쪽 보다 더 짧았던 왼쪽의 뒷꿈치를 땅에 붙이고 걸으라는 언명이었는데 될리가 없는 것이었고 참 끔찍했다. 나도 착륙하고 싶었다.


2) 누웠다 앉았다 운동 : 이름들이 참 단순한데 달리 붙일 이름이 없다. 정말 우리 모든 가족은 이 두가지 운동을 다 이렇게 붙여 불렀다.

엄마가 무릎이 안 흔들리도록 양 무릎을 잡으면 나는 누웠다가 일어나는 운동. 지금의 '윗몸 일으키기 운동'인데 나는 무릎이 심하게 뒤틀리고 고정이 안 되었기에 무릎을 아주 강하게 눌러줘야 제법 앉아볼 수가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엄혹한 시절 속 '언론민주화 운동의 최일선'에 계셨기에 항상 도망을 다녀야 해서 집에 들어 올 수가 없었다.

두번째 이 운동 때문에 엄마의 여린 양 손목은 평생 고생이었다. 이 운동 역시 하루에 100번 이상을 해야했다. 돌이켜 보면 나의 고통은 내 엄니의 그것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음을 알겠다.

엄마는 힘들 때마다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를 읽으며 버텨보셨다고 한다.

결혼 직전까지 이 두가지 운동은 계속 되었고 결혼 후에도 틈만 나면 엄마는 물어보셨다.

"너 운동 열심히 하고 있니?"

"너 자식을 위해서라도 정신 차려라."


효능과 효율을 넘어 이 두가지 지독한 운동의 반복으로 나의 건강은 좋아졌다. 팔삭둥이인 나는 모든 내장 기관이 미숙했고 오로지 주둥아리 하나만 남들보다 발달 되어 있었다고 하셨는데 이 성실함의 누적으로 내외의 건강이 눈부시게 좋아졌다고 한다.

나에겐 정말 지옥 같은 시간이었는데 그 덕에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잘 살고 있는 것임은 분명하다. 이 글을 써내리며 엄마에 대한 깊은 고마움과 미안함 때문에 몇 번 겨누기가 힘들었다.

이화여대 사회 복지관의 엄마의 친한 지인은 수 차례나 "포기해. 그냥 여기에 맞겨 버리고 너 인생 살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엄마는 이 얘기를 나한테 딱 한 번만 하셨다.

어릴 때부터 정말 자주 하신 얘기는 따로 있다.

"너 정도면 뇌성마비 중에 최상급이야. 감사한 줄 알고 살아라."

어릴 때는 이 얘기가 참 듣기 싫었는데, 점점 그 말씀이 맞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지만 '감사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나의 친형.

순하고 착한 형.

내 형아는 공부를 잘 했다. 모범생의 총체였다.

‘본인의 존재가치’에 대해 참 많이 고민해 봤을 것이다.

엄마의 사랑이 갈급했지만 엄마는 항상 내 곁에 있어야 했을 것이다. 내 걱정만 하는 엄마를 바라보며 서러움을 많이 느꼈을 것이다. 외로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며 응석을 부릴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것은 엄마 근처의 나를 돌보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착한 아이가 되는 것이었을 것이다. 엄마한테 주목 받는 방법은 '공부' 뿐이었을 것이다.


오늘은 더 쓰기가 좀 곤란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도터 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