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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엄마 1.(엄마의 엄빠)

by 하니오웰


이 안경 쓴 빨간 아줌마를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여 꼬여 버린 사슬을 풀어 내려는 시도만이 참을성 있는 나의 진보의 길임을 알겠다.

가눌 수 없음과 견딜 수 없음이 무서워 다른 사람들을 등판시키며 정면승부를 피해 왔는데 어제 일기를 쓰면서 더 이상 미루지 않고 그 가장 중요한 '대장정'을 이제 시작해야 함을 깨달았다.


나의 엄마는 1950년 12월 21일생이다. 문경에서 6남매의 큰 딸로 태어났다. 위로는 3살 터울 오빠가 있고 제일 밑으로 12살 터울 남동생이 있다.

방배동 아니면 흑석동 외할머니 댁 마당으로 추정되는 윗 사진에 외삼촌들이 없어서 아쉽지만 참 반가운 시절의 얼굴들이다. 형보다 내가 더 귀여웠음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귀한 사진이다.

사진 속 우측 하단이 외할머니(세례명 홍사비나)시다. 작년 1월. 98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일관된 당신이었다. 손주들 중 유일하게 나 어릴 때만 좀 돌봐주셨다고 한다. 몸이 약하고 잔병치레가 많아 수면제를 포함하여 평생 많은 약을 달고 사셨다.

5살 때 열흘 정도 외할머니 집에 머물다 온 나는 당신 덕분에 젓가락질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무서운 엄마의 다그침으로도 좀처럼 고칠 수 없던 영역이었다고 하니 외할머니는 엄격할 때는 그 어떠한 분명함의 기치를 정확히 세울 줄 아시는 분이셨음을 알 수 있겠다.

외할머니는 손주 중 나의 대학교 졸업식에만 참석하셨다고 한다.


외할머니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시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나의 외가는 장남과 장손만을 끔찍하게 우대하고 예우하는 가부장적 집안임이 분명했는데 생각해 보면 몸이 불편한 아픈 손가락에 대한 사랑이 꽤 깊으셨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항상 구석에서 조용히 웃고 계셨다.

설날 아침. 어김 없이 해주시던 떡국은 참 정갈하고 맛이 좋았다. 외할머니가 따로 해준 양념장이 짜지도 않고 내 입맛에 딱 맞아 따로 숟가락으로 계속 퍼먹다가 형한테 제지 당했던 기억도 난다.

외할머니는 엄마가 어릴 때부터 외할아버지한테 하시는 잔소리가 끊이질 않으셨다고 하는데 엄마는 자식들을 포함한 온 세상이 외할아버지만을 칭송하는 것에 대한 오래된 깊은 질투라고 표현하셨다.

외할머니를 끔찍히 아끼셨던 외할아버지는 그 멈춤 없는 공격들에 단 한 번도 화를 내시지는 않았지만 눈은 자주 감고 계셨다고 했다.

엄마는 이 세상 남자들이 다 외할아버지 같은 줄 착각하고 결혼하셨다고 했고 맞아가면서 이 세상 남자들의 다양성을 깨달으셨다고 한다.

재작년 하니를 데리고 마지막으로 찾아 뵈었을 때 외할머니는 손녀딸을 자꾸 부르셨다.

"아가. 근데 너는 누구니? 몇 살이니? 참 이쁜게 좋다."

11번 부르셨다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하니가 말했다. 딸은 그 때를 떠올릴 때마다 말한다.

"아빠. 왕할머니 보고 싶어. 귀여웠는데 불쌍해"


나의 친가와 달리 외가는 무척 잔잔한 집안이었다.

어릴 때 나는 친가에 가는 것에 비해 외갓집 가는 것은 너무 재미가 없었다.

내 몸엔 친가의 피가 훨씬 더 세차게 흐르고 있기도 했지만 절정은 물론이거니와 발단도 좀처럼 솟아 오르지 않는 스토리텔링, 직선형 내러티브 일색이던 분위기였기에 몇 시간 내내 몸만 베베 꼬다가 돌아오기 일쑤였다. 2세들도 막내 이모의 큰 딸을 제외하면 다들 새초롬 했다. 심지어 세뱃돈 마저 반토막이었다. 고스톱 판의 취한 흐느적에서 나오는 뽀찌가 전혀 있을리 없었다. 술이 없는 작살나게 고요한 명절들이었다.


일단 외할아버지는 20대 중반에 술을 끊겠다 선언하시고 단 한 번도 술잔을 다시는 입에 올리신 적이 없다고 한다. 그냥 딱 여기서 게임 오버인 분이다.

외할아버지는 문경여고 선생님이셨다고 하는데 별명이 '줄리앙'이었고 젏은 시절 사진을 보면 큰 키에 얼굴도 상당한 미남이셨다.

나의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해사함이 분명 저렇게 속절 없이 드높은데 왜 나는 중학교 때는 '베이징 원인', 고등학교 때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 불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나중에 옥황이 형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우스 형과의 모종의 거래 여부가 있었는지 확인해 볼 요량이다.


외할아버지는 훈육 주임에 미술과 도덕 선생님까지 겸하셨다. 고매한 성품과 출중한 업무 능력으로 이사장의 신임이 매우 두터워 학교 중요 사안의 크고 작은 결정을 도맡아 하셨다고 한다. 학력은 국민학교 졸업 밖에 못 하셨다고 했는데 전혀 부족하지 않은 다른 가산점들이 차고 넘쳤으리라.

외할아버지는 말수가 적었다. 우리 집안이 조선 왕족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상당하셨는데 분명 전주 이씨이기는 하지만 그 헛마음들은 자가발전을 통해 계속 부풀려지고 심각히 왜곡된 것이라고 엄마는 여러 번 말씀하셨다. 유일하게 외할버지의 그 부분에 대해서만은 일관되게 아주 조금 부정적인 평가를 하셨다.

그래도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외할아버지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다.


외할아버지가 자식들이나 손자들에게 할 말이 있으시거나 새해 덕담을 해주실 때는 항상 우리네 모두의 무릎을 꿇리셨는데 오직 나만이 예외가 될 수 있었다.

말씀은 항상 '우리 집안은'으로 시작 되었는데 들을 때마다 없던 자긍심이 계속 반감 되는 놀라운 '체험 반역의 현장'이었다. 적어도 내 마음 속의 현주소는 항상 그랬다.

엄마는 거의 대부분 졸고(일부러?) 계시던 기억인데 그 방자한 수업 태도에 대한 지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엄마만이 외할아버지에게 반대 급부의 발언을 가뭄에 콩 나는 정도라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치매로 누우셨을 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모두 큰 딸이 집에 들어오는 소리만 들으면 축 처저 계시다가도 방긋 웃으며 일어나셨다고 한다. 효성 지극한 6남매는 두 부모의 마지막 몇 년을(합치면 10년이 훨씬 넘는다.) 요일별로 하루씩 번갈아 자고 오며 간병 하셨다.

엄마가 형제 중 가장 솔직하고 장난기도 제일 심하기도 한데다가 그 시절들에는 일부러 애먼 소리를 끝없이 던지셨다고 한다. 결국 유일하게 손에 절대로 안 잡히는 자식이기도 했다.

나중에 아빠를 데리고 결혼 하겠다고 인사 드리러 갔을 때 두 분 다 분명하게 반대하셨지만 엄마는 입장을 뒤집지 않으셨고 몇 달 넘게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다고 하니 케이 장녀에 대한 두 분의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 대략 가늠이 된다. 결국 나중에 거의 모든 재산은 두 아들에게만 배달되었지만 말이다.

아빠의 구애는 집요하고 참 정열적이었다고 한다. 그 비법을 나에게 참하게 전수해주고 가셨다면 나는 지금 누구랑 살고 있을까? 이변은 없었을 테지만.


엄마 대학 시절. 아주 더운 여름날 중 하루였다고 한다.

6남매를 모아 무릎 꿇려 놓으시고 집안 조상 어르신 중 한 분에 대한 일장 연설을 시작하셨는데 더위에 엄청 취약한 울 여사님께서 뭐에 씌인 듯 손을 번쩍 드셨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 그래 봐야 첩의 자식이잖아요? 아닌가요?"

눈을 감으신 채 정말 10분 넘도록 말씀이 없으시던 외할아버지께서.

"됐다. 일들 봐라"

이후 다시는 그 조상분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않으셨다고 한다.


엄마와의 빕스 식사는 항상 '이정구 선생님은'으로 시작해서 '이정구 선생님'으로 끝이 난다. 외할아버지에 대한 너무 많은 유사 래퍼토리를 들어서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것이 오히려 별로 없다. 그래도 걱정은 없다. 다음 식사 때 제대로 또 들으면 된다.

두 분은 '절약'과 '근면함', 시의적절한 부동산 투자로 6남매를 훌륭하게 키워내셨다.


장남을 서울대에 반드시 보내겠다는 일념으로 엄청난 사교육비를 들이셨는데 결과는 '중앙대 기계공학과'였고 심지어 외할아버지 제자의 입김을 더해 외삼촌은 '태영건설'에 들어갔는데 그마저 오래 버티지 못 하고 나오셨다고 한다.


엄마를 찾아가는 징검다리가 좀 많다. 그러나 밟아보지 않을 수 없고 집지 않을 수 없는 소중한 돌들이다.

나의 엄마는 아직은 그렇게 거거서 항상 기다리고 계심을 알고 있지만 조금 이 작업들을 서두르기는 해야한다. 치매 초기의 전조가 분명 있기 때문이다.


마늘에게 방금 전화가 왔다.

어제 나의 은밀한 밀회를 눈치 챈 전화인 줄 알고 철렁했다.

"오빠, 내가 빨랫대에 원피스를 널려고 접어 두고 그냥 나왔다. 바로 옷걸이에 넣어 걸어줘."


다행히 한 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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