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는 1942년 생이시다.
아버지는 어릴 때 그다지 모범생은 아니셨다고 한다.
수창초등학교 다닐 때 고등학생이던 큰 고모는 아버지가 성적표를 받아오는 날이면 할아버지에게 혼이 나곤 하셨는데 동생 공부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하니 장남에 대한 할아버지의 향학열이 무척 강하셨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의 고향집의 기억은 정겨움 자체였다고 한다.
시멘트로 테를 두른 토방 가에 채송화가 조르르 피어 있었고, 담장에는 나팔꽃이 피어 올랐던,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잠시도 쉴 틈 없이 일손을 놓지 않았던 증조 할머니의 부지런한 모습이 떠오르신다고 했다.
나는 엄마한테 아버지의 할머니 얘기를 좀 들었는데 성격이 온유하고 얼굴도 해사하고 정이 참 많으셨다고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나의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지 못 했는데 증조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은 얘기는 숱하게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어릴 때 충장로 5가에 비싼 고급 설렁탕집이 생겼는데 할머니는 그 곳에 둘째, 셋째 아들만 데려가서 먹이셨다고 한다. 들키지 않으면 좋았는데 들켰고(일부러 들킴을 당하셨나에 대한 생각이 스침) 아버지는 깊은 상처를 받으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당신의 외모를 닮지 않은 두 아들을 편애 하셨다고 한다.
품이 넓은 울 아버지는 한 번도 당신에 대해 분노와 서운함을 어머니에게 전한 적은 없고 항상 그 특유의 유머와 해학을 섞어 표현하셨다고 한다. 내가 어릴 때 할머니의 농간으로 엄마를 때리시고 나서 자초지종을 들으신 아버지는
"자네. 참 미안해. 그래도 울 엄니 미워하지 말어. 울 엄니는 팔푼이도 아니고 칠푼이여"라며 엄마에게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서너 살 때 벽시계가 멈추자 누군가로부터 시계 밥을 주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밥그릇을 들고 시계 밑으로 가서는 숟가락으로 밥을 퍼서 시계에게 주었던 웃지 못할 장면이 어슴프레 남아 있다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지금의 전남방직이 있는 자리의 풀장으로 아버지를 자주 데려가셨고 참외를 띄워 놓고 그것을 잡게 하며 수영을 가르쳐 주셨다고 하니 떠올려보면 그 모습이 참 정겹기 그지 없다.
아버지는 친구들과 저수지에서 투망으로 천렵을 한 기억과, 무등산 계곡으로 용알(우무처럼 생긴 길이 15cm, 폭이 2cm쯤 되는 도롱뇽 알)을 먹으러 가자 해서 따라 다닌 일들이 생생하다고 하신다.
봄이면 온 가족이 나들이를 갔는데 맛있는 것을 잔뜩 싸들고 가는 봄나들이가 참 즐거웠다고 한다.
내가 어릴 때 명절 때마다 내려 갔던 학동 집을 떠올리면 넘치는 술과 안주 속에 고스톱을 치시는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들, 고모들의 끝 없는 웃음 소리와 어수선한 시끌벅적으로 가득하다. 그 옆에서 떨어질 떡고물들(누렇거나 푸르스름한 종이)을 노리고 스치듯 앉아 있으면 포획의 흥겨움을 얻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의 친가와 외가의 분위기는 극과 극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외할아버지가 그 방약무도한 고스톱 판을 보시면 얼굴을 붉힌 채 눈을 질끈 감아버리실 것이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할아버지의 일곱 아들 딸들은 큰 고모를 좀 제외하고(생각해 보면 아들 딸의 차이는 좀 있다.) 넘치는 유머 감각과 기민한 두뇌 회전, 한 탕에 대한 몰입 기질이 넘치도록 충천해 있다. 다들 기분파셔서 엄청난 즐거움과 시끄러움 속에 뜨거운 정다움과 걸죽한 욕설, 농담들을 끝없이 나누셨다.
그 7남매의 자식들의 입담과 주량도 쨍쨍하기는 매한가지이다. 7남매는 자식 농사에도 성실하셔서 그 알알이 2세들은 71년 생부터 81년 생까지 매 년 학력고사나 수능에 줄기차게 임하였다.(큰 고모의 자식들은 훨씬 나이가 윗자락임)
아버지의 기록에는 국민학교 1, 2학년을 제외한 담임 선생님들의 기록이 짧막하게 남아 있다. 생각해 보면 딱 그 시기가 6.25의 시절이긴 하다.
3학년 때 담임은 친구 어머니이기도 했던 김귀옥 선생님이었다. 3학년을 마치는 모임이 교정 뒤에서 있었는데 아버지가 떠든다면서 앞으로 나오게 한 다음 귀를 잡아당겨 피가 흐를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장난기를 아는 나는 충분히 그 지경의 이유와 역사가 헤아려진다.
아버지는 내가 여섯 살 때 다른 아버지들이 우유에 밥을 말아 주는 장난을 칠 때, 파격적으로 우리 형제에게 소주에 밥을 말아 주셨다. 형은 그 숟갈들에 취해 헤롱거리며 춤을 추었다고 하는데 내가 어쨌는지에 대한 말씀을 들은 바는 없다. 아버지 따귀를 때리지는 않았나 보다.
4학년 때 담임은 미술 선생님이었던 서상규 선생님이었는데 무척이나 아버지를 귀여워했다고 한다. 1년에 한번씩 열리는 학예회에서 아버지는 학년 대표로 뽑혀 전교생 앞에서 독창을 하셨고 성적도 상위권으로 도약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노래 실력에 대해서는 전술한 바가 있다. 어머니의 모기 목청을 물려 받은 나와 형은 그 부분을 두고두고 아쉬워 했다. 특히 나는 아버지의 외모와 기질 성격 등 모든 것을 거의 그대로 물려 받았는데 성량은 이어 받지 못 했다.
마누라와의 연애 시절 노래방에서 김동률, 이소은의 '기적'을 함께 부른 것을 녹음해 둔 것이 있었는데 결혼 후 부부 싸움을 하고 나서 함께 듣고 마음을 푼 적이 한 번만은 아니다.
5학년 때는 이경호 선생님이었는데 국어 시간에 책읽기를 잘하고 발음이 정확하다고 졸업식장에서 재학생 대표로 송사를 낭독하라고 하여 단상 위에 선 일도 기억에 남는다고 하셨다.
그 시절에도 학교 폭력은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사창가로 변해버린 북동 신영극장 골목에서 하교 길에 고무지우개와 잠자리가 새겨져 있는 일제 돔보 연필을 빼앗겼던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6학년 2학기 때는 담임 정정식 선생님 집에서 숙식을 하며 중학교 입시 준비를 하였는데 담임 선생님 집에서 기식을 하며 입시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문득 아버님이 남긴 기록(책)을 발견한 것이 참.으.로. 기쁘다.
매일 일기를 쓰고 기록을 남겨 딸에게 남겨 주고 싶은 내게 이 기록의 발견은 더할 나위 없는 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