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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2.

by 하니 아빠 Mar 1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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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아버지의 집(광주 충장로 5가)은 중고생들이 학생복을 제조,도매했기 때문에 상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남평, 장흥, 고흥, 화순, 함평 등 인근에서 물건을 구입하러 온 상인들이 집에서 숙박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밤 11시쯤 되면 나무로 만들어진 돈 궤짝을 뒤엎어 지전들을 분류하고 돈을 세어 다발로 묶는 등 어려서부터 돈을 만지며 자랐고 용돈이 떨어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만, 아버지는 돈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별로 돈 쓰는 일에도 관심이 없었다.

 나의 성장기에는 할아버지가 여러 연유로 가세(도박 등)가 기울어 충장로 5가에서 '학운동 배고픈 다리 근처 최씨 사당이 있던 집'으로 송사 끝에 이사하신 상태였고 내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시절의 그리움의 원형이 된 학동 집도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다.


 고모들은 중고등학생 시절에 제일 좋은 옷을 사입는다거나, 밤 늦은 시간에 중국요리를 시켜먹기도 했는데, 그 주문을 기다리기 위해 충장로 5가에서 제일 큰 청요리집은 밤늦게까지 문을 열어두었다고 하니 아마 그 빈도와 주문양이 꽤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7남매 모두 사람을 좋아하고 정이 많다.

 아버지는 1954년도에 중학교 입학 시험을 두 차례나 치렀다. 전국의 모든 중학교가 똑같은 시험 문제로 입시를 치러 합격자 발표도 끝났는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무효로 하고, 중학교별로 시험을 다시 치렀다고 한다.

 아마 이승만 떨거지 주변의 고위직 자제의 합격을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사전 문제 배포에 실패했다던지의 이유로 말이다.

 당시 광주 서중학교는 서석, 수창 초등학교에서 각 학급당 20~30명씩 합격을 시켰는데 아버지는 학급에서 2등으로 서중에 들어갔고 그 시절 별명은 '신용 보따리'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1970년대 중반 합동통신사에 근무할 당시 안양에서 사업을 하는 국민학교 동창 남상만을 시내버스 막차 안에서 만났고 두 분은 잠실 종점에서 내려 포장마차에 들어가 소주를 비워댔다고 한다. 그 때 남상만이 깜박 잊고 있었던 국민학교 시절 아버지 별명을 일깨워 주었다고 한다.

 "ㅇㅇ이 자네, 그 땐 신용 보따리였지?"


 아버지는 유복했고 인간 일반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매우 깊은 분이었으니 학비가 부족하거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친구들에게 지전을 남발하셨을 것으로 충분히 유추된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서울대까지 간 친구들 숫자가 적지 않다고 엄마한테 들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 "아들아. 사람 위에 사람 없다. 너가 만약 너보다 부족한 사람에게 베풀게 있으면 조건 없이 베풀고 따뜻함을 나누고 살아라" 이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돌이켜 생각하면 아버지는 나의 표상임이 분명한데 술잔을 부딪힌 횟수가 참담하게 적어 아쉽다.


 아버지 집에는 직공들이 사용하는 재봉틀이 10대가 넘게 있었다고 한다. 양복 만드는 공원들은 재봉틀을 타면서 유행가를 불러댔는데, 그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아버지는 학교를 다녔다. 공부를 하도록 조용한 주택가를 택하여 따로 안집을 두고 살았으나 그런 탓에 집안은 공부할 분위기는 아니었으며 중3 때는 15~19등 정도의 성적 밖에 낼 수 없었다고 하는데 그 석차의 기준이 반인지 학교 전체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시절 할아버지의 엄격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아버지는 그 슬하에서 잔뜩 주눅 들어 지내셨다. 그 엄격함은 중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학생 관람 불가 딱지가 붙은 영화는 단 한 편도 보지 못하셨단다.

 나중에 엄마한테 들은 바로 할머니가 무슨 잘못을 했을 때 할아버지가 발가벗겨 집 밖으로 쫓아 버린 적도 있다고 하셨으니 할아버지가 마룻장을 쾅 누르며 서슬퍼런 호령을 하면 감히 누가 반기를 들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나의 아버지는 순하고 천성적으로 겁이 많다.


 광주일고를 졸업할 때까지 변변한 친구 한 명 제대로 사귀지 못하셨다고 한다. 정 많고 사람이라면 꼴깍 넘어가는 성격에 친구랑 제대로 놀지도 못 하고 숨 막히게 사셨으니 '신용 보따리'라는 별명에 맞는 시여를 계속 하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장남이기에 가장 엄중한 통제를 받았을 것으로 판단 되는게 여동생들(고모)과 남동생들(작은 아버지)은 각자의 분방함을 구현하며 성장한 것에 대한 일화를 들은 바가 좀 있다.

 고2 때는 '땡초'라는 애정 어린 별명이 붙기도 했는데 충장로5가인 집에서 학교까지 너무 가까워서 역설적으로 지각을 자주 했다고 한다. 지각을 하지 않으려고 어느 날 일찍 등교를 했는데 시간이 남아 궁리 끝에 학교 구내 이발관에서 이발을 했고 결국 수업 시작 시간을 넘기게 되었다. 뒤늦게 입실하는 아버지 머리가 반짝거렸던지 그 때 급우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고 한다. 또한 수업 중에 신소리도 잘했다고 한다.


 고3때 입시원서를 쓸 때가 되었는데 아버지의 담임선생님은 서울대 원서를 써주지 않았다고 한다. 학년에서 200등을 맴도는 아버지에게 서울대 원서를 써주면 광주일고의 서울대 합격률을 저하시킨다는 이유였다.

 할아버지는 전남대 의대 지망을 권유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께 애원하듯 말했다.

 "아버지, 제발 서울로만 보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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