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독서와 글쓰기의 역사(대학 시절까지.)

by 하니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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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부터 나는 '단련된 근육'이 좋았다.

'비겁하지 않은 우직함'이나 '남을 속이지 않는 소박함'을 상징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가동 범위의 한계와 운동 능력의 열위가 분명하였기에 멀쩡한 몸과 그것의 기능성들을 동경했다.

어린 시절 나는 글을 쓰는 사람들을 '얇은 팔과 하얀 손으로 흰 종이에 편한 손재주, 말재주나 부리는 사람'으로 여겼다.

열등 섞인 오만으로 나는 글쟁이들을 '나약과 소심의 산자'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내 몸의 병약함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과 왜곡된 경멸감, 경도된 수치심에 의한 오조준의 발로였다.


국민학교 3학년 때의 '이승례'선생님이나, 5학년 때의 '정주영' 선생님에게 '일기' 따위를 잘 쓴다는 칭찬을 좀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것을 나는 '깊은 정신 노동의 산물'이나 '관조와 다독에 이은 문학적 달성'에 의한 것이 아닌 '적당히 얌전하고 친구들의 멸시를 묵묵히 견딜 줄 아는 몸이 불편한 어떤 어린이에 대한 온정적 보상'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나의 엄마는 형한테는 그러지 않았는데 '내가 책 보는 것'을 무조건 막았다.

안 그래도 상상력과 공상이 깊은 내가 책을 보면 더 깊이 나만의 드림 랜드로 빠질 것을 염려했으며 무엇보다 장애인 아들의 취업을 국민 학교 시절부터 걱정했던 탓이기도 했다. 학교 공부와 관련되지 않은 책은 보이면 무조건 뺐어갔다. 공부만이 답이라 생각했다. 나는 오히려 더 비껴 나갔다.

가만 놔두면 밤새도록 쥐죽은 듯이 책을 보는 형처럼 내가 될까바, 그처럼 조용해지거나 혹 어두워질까봐 걱정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가 아니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엄마 지갑에 몰래 손을 대어 오락실에 가는 위인이었다.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물에 빠져 뒤져갈 때도 아빠의 두꺼운 아랫입술을 그대로 이어 받은 내가 '그 입술만은 물 위에 둥둥 띄울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객쩍은 수다쟁이'라는 뜻은 아니고 조용히 파묻혀 닥치고 곱단하게 다리를 꼬아가며 자세를 유지하고 있을 사람은 아니라는 뜻일게다.

하고 싶은 말이나 입장이 있으면 어떻게든 그 방법과 시기를 엿보다가 기어코 분연히 말하거나 전달하고 마는 '반골인'이기 때문이리라.

9급 말단 공무원 시절 외압을 받아 부당한 '세금 감액'을 강요한 과장한테 불려가 지청구를 먹으면서도 눈을 희번덕 거리며 '저는 못합니다. 안합니다.'를 지껄이고 나온 기억이 있다. 더 몰아 붙이면 법대로 하려는 장애인을 '인권의 사각지대'로 모는 것이라고 글을 써서 청와대에 올려 버린다고 말하고 나왔다. 나는 제 때 8급을 달았다.


나는 엄마나 형처럼 책을 몰래 볼 정도로 '활자'에 대한 애착이 있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나의 아버지는 '화장실에 갈 때도 저는 책을 봐요'라는 구라를 쳐서 엄마를 꼬셨지만 엄마가 결혼하고 보니 '화장실에 갈 때만 책을 보는 탕아'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결혼하면 교회를 간다'고 마누라를 꼬셔서 행진해 놓고 '마음이 다 올라오면 교회에 간다'는 말로 현재의 무료한 일요일을 아직 잘 유지하고 있는 바이다.


나의 엄마는 내가 대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나의 독서'를 막았다. 다른 부모들과 다른 기가 막힐 교육 방식이었다.

그러한 장기간의 독서 금지 기조와 일기 쓰기 금지, 일상화된 불허의 연속들은 오히려 '독서와 글쓰기에 대한 목마름'을 조금씩 더 키워주었다.

내 몸에 결코 맞지 않은 이과를 강제로 선택하게 한 엄마는 기어코 나를 '환경공학과'로 우겨넣었다.

나는 문과를 선택해서 '국문과'나 '사학과'를 가고 싶었었다.

나는 공업수학을 삼수강 하며 해마다 새로운 후배들에게 반가움과 예우를 다했다.

꽂히면 술은 세 번 이상 사주는 좋은 선배였다. 그래서 그 당시 나의 지갑은 돈이 마를 날도(이혼한 아버지가 돈을 적시에 잘 꽂아주던 시절임) 젖을 날도 없었다.


대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남들과 중앙 도서관에 함께 있었지만 '서양철학사' 및 '문화이론 서적'을 들여다 보며 공책에 요약 정리하고 쳐자빠져 자다가 침을 흘리며 일어나 술을 마시러 가는 별종 중의 별종이었다. 나는 남의 눈치 따위는 개의 똥에게나 발라줘 버리는 스타일이라 굴하지 않고 반 년을 그리 촘촘하게 살았다.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독서를 꾸준히 한 시절이었다.


신영복 선생님의 책에 감동 받는 나는 그 무렵 다음(Daum)에 '가족에게 보내는 빛깔이 있는 엽서'라는 카페를 만들었다. 가까운 친구나 선후배들만을 회원으로 초대 했다.

'가족들에게 섭섭한게 생길 때마다 편지를 쓰며 마음을 녹이고 사랑을 이어나가자'는 따위의 취지로 카페를 만든 것이었다. '개한량-24hour forever'였다.

사람들은 나처럼 솔직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글 쓰는 것을 생각보다 두려워했다.

엄마에게, 아빠에게, 형제에게 보내는 엽서 등으로 게시판을 분류했다.

그 당시 나는 24살이었기 때문에 '자식'이라는 개념이 그저 추상의 저 끝에 위치한 관념어에 불과하여 '자식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게시판은 만들지 않았다. 지금 나의 블로그는 큰 틀에서 딱 그거인데 말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시종일관 거의 나 뿐이었다. 대학교 후배들 중 내가 술을 자주 사준 귀요미들만 억지로 꾸역꾸역 글을 가끔 올렸다.

기억이 정확히 나지는 않지만 띄엄띄엄 '엄마나 형, 언니 때문에 힘들다'는 글을 후배나 친구가 하나 올리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놈년들을 데리고 가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 사는거 다 뻐큐 아니겠냐'며, '한 잔 술에 그 분노를 재우고, 두 잔 술에 새로운 다짐으로 가족들을 사랑하자'고 말하며 매 번 업혀 갔다.

그 뻘짓은 3개월로 그쳤다.

카페를 폐쇄했고 가족에게 괄시 받는 '빛깔이 있는 실업자'가 되었다.

나는 꾸준히 마셨고, 책도 계속 사서 집 책상 서랍에 숨겨 두었다. 발견 즉시 엄마는 책을 버렸다.

고약한 엄마에 더 고약한 아들이었다.


엄마한테 이따가 문자로 묻고 싶다.

'엄마? 그 오랜 기간 저 책 못 보게 하니 좋으셨서예? 책 많이 본 형이 더 좋은 대학 갔자나요?'

엄마의 대답은 뻔하다.

'나는 내 선택과 철학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광산 김씨들 지긋지긋하다. 답 불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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