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one and only one social responsibility of business
- to use its resources and engage in activities
designed to increase its profits so long as it stays
within the rules of the game,
which is to say, engages in open and free competition
without deception or fraud."
"비즈니스의 유일한 사회적 책임은,
규칙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기업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설계된 활동에 참여하고
그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기나 기만 없이 공정하게
열린 경쟁에 참여하는 것이다."
01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의 사회적 책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논하기 전에, 지성인의 사회적 책임도 논하고 싶다.
밀턴 프리드먼은 경제학에 대한 공로로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경쟁적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뜨겁게 지지했고, 그에 대한 정당성을 전파하는데 앞섰다.
기업 활동에 대한 그의 관점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말이 Friedman doctrine 이다.
기업의 궁극적인 사회적 책임은 주주의 이익에 기여하는 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1970년에 뉴욕 타임즈에 기고된 그의 아티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다'의 마지막 문장은,
프리드먼 독트린의 상징으로 자주 인용되었다.
"비즈니스의 유일한 사회적 책임은, 규칙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기업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설계된 활동에 참여하고 그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기나 기만 없이 공정하게 열린 경쟁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의 글이 발표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고, 유행과 사상도 다시 돌아올 때가 있지만,
나는 그의 생각에 동의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을 각 경제 주체의 자유에 맡기고,
우리가 만든 경쟁의 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자유 사회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관점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내버려 두면' 모든 경제적 활동은 제대로 돌아갈 것이라는 뜻이다.
바보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생태계처럼 알아서 평형 상태를 이루거나, 이루려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실력이 없는 의사는 도태될 것이므로 의사 면허제도를 폐지해도 괜찮다고 한 그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밀턴 프리드먼이 살아 있다면 이렇게 이야기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 예외적 돌팔이 의사에게 목숨을 맡기게 되어도 그런 말이 나올까?
극단적인 시장 근본주의,
극단적 사회적 책임.
그 사이 타협과 공감의 위치는 어디일까?
02 기업의 책임, 이익 증대
The Social Responsibility of Business is to Increase its Profits
Milton Friedman
The New York Times Magazine
September 13, 1970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이익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기업가가 '자유 기업 체제에서의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들으면, 70세가 되어 비로소 자신이 평생 시를 읊으며 살아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한 프랑스 노인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기업가들은 사업이란 이익과 '별로' 상관이 없으며, 바람직한 '사회적 목적'을 촉진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자유 기업 체제를 지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기업이 '사회적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고용을 창출, 차별 철폐, 오염 방지, 그리고 현대 혁명가들의 슬로건과 관련된 심각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사실은 그들은 순수한 사회주의(socialism)를 설교하고 있는 것이거나, 설교하게 되는 것이다. 앞서 말한 요소들을 기업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업가들은 지난 수십 년 간 자유 사회(free society)의 기초를 훼손하고 있는 지적 움직임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둘러싼 논의들은 그에 대한 분석의 느슨함과 엄격함의 부재를 의미한다. "사업"(business)에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사람'(people)만 책임을 가질 수 있다. 기업(a corporation)은 '인공적인' 인물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공적인' 책임을 질 수도 있다. 하지만, "비즈니스"라는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책임을 가질 수 없다. 모호하게라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교리를 검토할 때, 명확성을 향한 첫 번째 단계는 사회적 책임이란, '누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묻는 것이다.
아마도 책임이 있는 개인은 '비즈니스맨' 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개인 사업주나 기업 경영진을 의미한다. 사회적 책임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는 '기업'을 대상으로 하므로, 다음은 개인 사업자는 배제하고 기업 경영진을 다룰 것이다.
자유 기업, 사유 재산 시스템에서 기업 경영자는 비즈니스 오너의 직원이다. 그는 고용주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이란, 법률에 구현된 것, 사회 윤리에 구체화 된 사회의 기본 규칙을 준수하면서 가능한 한 많은 돈을 벌어 들이고자하는 욕망에 따라 사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고용주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병원이나 학교와 같은 자선 목적으로 법인을 설립 할 수 있다. 그러한 법인의 관리자는 돈, 이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특정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요점은, 기업 경영진으로서 가진 능력 안에서, 매니저는 회사를 소유하거나 자선 기관을 설립하는 개인의 대리인이며, 그의 기본 '책임'이란 '그들'에게 있다.
관리자가 임무를 얼마나 잘 수행하고 있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성과의 척도라는 것은 명확하게 존재하며, 누가 자발적 계약 관계에 있는지는 명확하게 규명되어진다.
물론 기업 경영진 또한 고유 권리를 가진 '사람'이다. '사람'으로서, 그는 자발적으로 책임을 규정하거나 알고 있는 다양한 책임을 가질 수 있다. 자신의 가족, 양심, 자선 활동, 교회, 클럽, 도시, 국가와 같은 것들이다.
그는 이런 책임들로 인해, 자신이 가치있다고 느끼는 것들에 소득을 일부를 내 놓거나, 특정 기업을 위해 일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일을 그만둘 수도 있다. 심지어 예를 들어, 군대에 갈 수도 있다.
우리가 원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책임 중 일부를 '사회적 책임'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대리인이 아닌 주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는 고용주의 돈이나, 헌신하도록 한 목적에 투자하기로 되어 있는 시간과 에너지 대신, 자기 자신의 돈이나 시간 또는 에너지를 소비한다. 이것들이 '사회적 책임'이라면, 그것은 비즈니스의 책임이 아닌 개인의 사회적 책임이다.
기업 경영진이 비즈니스맨의 능력 한도 내에서 '사회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진술이 순수한 수사학이 아니라면, 그가 고용주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가격 인상이 회사의 최선의 이익에 부합한다 해도, 인플레이션을 방지하는 사회적 목표에 기여하기 위해서 제품 가격을 올리는 것을 삼가야 한다. 또 그는 환경 개선의 사회적 목적에 기여하기 위해 기업의 최대 이익에 부합하는 수준을 해치거나, 법의 규제를 넘어서는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또, 기업 이익을 희생시키면서 그는 빈곤 감소라는 사회적 목표에 기여하기 위해서 재능있는 직원 대신 진정한 실업자를 고용해야 한다.
이 모든 경우 기업 경영진은 일반 사회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돈'을 지출하게 된다. 그의 '사회적 책임'에 부합하는 행동이 주주의 이익을 줄인다면, 그는 주주의 돈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의 행동이 일부 직원의 임금을 낮춘다면, 그는 주주의 돈을 쓰고 있는 것이다.
주주, 고객, 직원이 별도로 원한다면 그런 특정 행동에 대해 자신의 돈을 지출할 수 있다. 기업의 돈을 원래 사용했어야 할 곳에 사용하지 않고 다른 쪽으로 사용한다면, 경영진은 주주, 고객 또는 직원의 대리인으로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경영진이 만약 이렇게 한다면, 한 쪽으로는 세금을 부과하고, 한 쪽에서는 거둔 세금을 어떻게 쓸지를 결정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과정은 두 가지 수준에서 정치적 질문을 던진다.
즉 '원칙과 결과'다(principle & consequences).
정치 원칙의 수준에서 세금의 부과 및 세금 수익의 지출은 정부 기능이다. 우리는 국민의 기호와 욕구에 맞추어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이러한 기능을 통제할 수 있는 정교한 헌법, 의회 및 사법 규정을 수립했다. 결국 '대표성 없는 과세'(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미국 혁명의 전쟁 구호가 되었다. 세금을 부과하고 지출을 통제하는 법적인 기능을 세금 징수 및 지출 프로그램 집행 기능과 분쟁 중재 및 법 해석의 사법 기능에서 분리하는 확인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서 기업인은 - 스스로 선택했든 주주들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뽑혔든 간에 - 입법자, 행정관이자 동시에 법무관이 된다. 그는 누구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어떤 목적으로 세금을 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며, 그 돈을 지출해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환경을 개선하고, 빈곤과 싸우라는 것과 같은 높은 권고에 의해서만 실시된다는 것이다.
주주가 기업 임원을 선임하도록 허용하는 것에 대한 모든 정당성은, 경영진이 고용주(기업의 오너)의 이익에 기여하는 대리인(agent)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당성은 기업 경영진이 세금을 부과하고 '사회적' 목적에 그 수익금을 지출할 때 사라져 버린다. 그는 사기업의 피고용인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함에도, 사실상 공무원이 되어 버린다. 정치적 원리에 근거해서, 공무원 같은 사람들이 기업의 경영인으로 선택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사회적 책임이라는 이름 하에,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공무원이 되려면 정치적 절차를 통해 선출되어야 한다. 그들이 '사회적' 목표를 지원하기 위해 세금을 부과하고 지출해야 한다면, 세금을 산정하고 정치적 절차를 통해 그 '목적'에 기여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정치적 기구가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사회적 책임' 독트린이 시장 메커니즘이 아닌 정치적 메커니즘이, 부족한 자원을 대체 용도로 할당하도록 결정하는 적절한 방법이라고 보는 사회주의적 견해의 수용을 포함하는 기본적 이유다.
그런 결과에 기반해, 기업 경영진은 그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허용할 수 있는가? 한편으로 그가 주주, 고객 또는 직원의 돈을 쓰는 것으로 가정해 보자.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람들이 그에게 인플레이션과 싸우는데 기여해야한다고 말했다고 하자. 그는 자신의 의지가 그 일에 기여할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는 아마도 회사를 운영하는 전문가일 수 있다. 제품을 생산하거나 판매하거나 자금을 조달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들이 그를 인플레이션 전문가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의 제품 가격을 억제하면 인플레이션 압력이 줄어드는가? 또는 고객의 손에 더 많은 지출권을 남겨주면, 그 돈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가?
또는 더 낮은 가격으로 인해 덜 생산하도록 하면, 상품 부족에 기여할 수 있는가? 그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해도, 그는 이 사회적 목적을 위해 주주, 고객, 직원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가? 그의 적절한 몫은 어느 정도고, 다른 이들의 몫은 얼마인가?
그리고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주주, 고객 또는 직원의 돈을 소비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주주가 그를 해고하지 않을까? (현재, 미래 경영진의 행동이 기업의 수익과 주가를 낮추었을 때 말이다) 그의 고객과 직원은 그를 대체할 수도 있고, 특히 고용주는 사회적 책임 이행에 그다지 양심적이지 않을 수 있다.
이 '사회적 책임'의 교조적 측면은 노동조합의 임금 인상 요구 저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될 때 극명히 드러난다. 이해 관계의 충돌은 노조 관계자들이 회원들의 이익을 더 큰 일반적인 목적을 위해 희생시키라고 요구받을 때 분명해진다. 노조 관계자가 임금 억제를 강행하려 한다면, 결과는 파업, 직급별 투쟁, 그리고 노조 내 경쟁자의 출현이다. 따라서 적어도 미국에서 노동 조합 지도자들은 경영진보다 훨씬 일관되게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간섭에 반대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을 겪고 있다.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어려움에서 사적 경쟁 기업의 위대한 덕목을 발견한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만들고, 사람들을 어떤 목적으로든 '이용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좋은 일을 하려면, 자신의 돈으로 하면 된다.
이 정도까지 논점을 함께 해 온 많은 독자들은 정부가 오염 통제나 실업자 구제를 위한 직업 훈련 등과 같은 '사회적' 목적을 위해, 세금을 부과하고 지출을 결정할 책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은 모두 좋은 일이고, 유익하다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런 문제들은 너무 심각하지만 정치 프로세스의 느린 진행 과정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시급하며,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 수행이 현재의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더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사실의 문제와는 별도로 이러한 논쟁은 원칙적으로 거부되어야 한다. 나는 "공공선을 위해 무역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혜택에 대한 아담 스미스의 회의적 시선에 대해 언급할 것이다.
이는 세금과 지출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의 사람들을 같은 마음으로 설득하는 데 실패했으며 그들이 민주적 절차로는 달성할 수 없는 것을 비민주적 절차에 의해 달성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 사회에서는 한 사람의 '선'(good)은 곧 다른 사람의 '악'(evil)이기 때문에 악한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것은 어렵다.
나는 단순하게 논의하기 위해 무역조합에 대한 간략한 비판을 제외하고는 기업 임원의 특별 케이스에 집중했다. 그러나 정확히 같은 주장이 주주들이 기업에 사회적 책임을 행사하도록 요구하도록 하는 새로운 현상(예를 들어 최근 GM 크루세이드)에서와 같이 나타난다. 이러한 대부분의 사례에서, 효과적인 것들이 일부 주주들이 다른 주주들(혹은 고객이나 직원들)에게 그들의 의사에 반해 사회활동가들이 좋아할 만한 "사회적" 목적에 헌신하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이 성공함에 따라, 그들은 다시 세금을 부과하고 수익금을 사용하고 있다.
개인 소유주의 상황은 다소 다르다. 그가 "사회적 책임"을 행하기 위해 기업의 수익을 줄이는 경우,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돈을 쓰는 것이다. 그가 그러한 목적으로 돈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그의 권리이며,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 과정에서 그 역시 직원이나 고객에게 비용을 부담시킬 수 있다. 그러나 대기업이나 독점력을 가진 조합에 비해서 이러한 부작용은 훨씬 미미할 것이다.
물론 실제로 사회적 책임의 원칙(doctrine of social responsibility)은 다른 관점에서 정당화되는 행동의 배경이지, 행동의 이유는 아니다.
예를 들어 소규모 공동체에서 고용을 제공하는 기업이 장기적으로 관심을 갖진다면 해당 지역 사회에 편의를 제공하거나 행정기관을 개선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투입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좋은 직원의 채용이 쉬워지거나, 노동비 감소, 도난이나 태업 행위로 인한 손실을 줄이는 등의 다른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는 기업 기부금 공제에 관한 법률로 인해, 주주는 기업이 스스로 하려는 것보다 더 많은 기부를 할 수 있는데, 이는 어차피 법인세로 납부되었을 부분이다.
이와 유사한 많은 사례에서 "사회적 책임"의 실천이라는 명목으로 합리화하려는 유혹이 강하게 따른다. "자본주의", "이윤", "영혼없는 기업" 등에 대한 혐오감이 널리 퍼진 현재 분위기에서 이것은 기업이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완전히 정당화되는 비용의 부산물로서 '선의'(good will)를 창출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런 위선적 윈도-드레싱 작업이 자유 사회의 근간을 해치기 때문에 기업 임원들에게 자제하라 요구하는 것은 나로서는 모순일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행사하라고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기관들, 대중의 태도가 그들의 행동을 이런 식으로 위장하도록 한다면, 나는 적극적으로 그들을 비난하기 어려울 것이다. 동시에, 나는 사기에 가까운 그런 전술을 거부하는 개인 기업 소유주나 더 큰 기업의 주주들에게 존경을 표할 수 있을 것이다.
비난할 만한 것이든 아니든, 사회적 책임으로 눈가림하는 것, 그리고 그런 이름하에 유력하고 권위있는 사업가들이 주장하는 넌센스는 분명히 자유 사회의 토대를 해치고 있다. 나는 많은 사업가들의 정신 분열적 캐릭터에 몇 번이나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들은 기업 내부적 사안에 대해서는 매우 폭넓고 명확한 방향을 지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사업 외적으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근시안적이며 혼란스럽고, 비즈니스의 생존 가능성에 영향을주는 문제에 대해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근시안적 사고가 임금이나 가격 가이드라인 혹은 수익 정책에 대한 요구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효과적인 정부의 임금, 가격 통제보다 더 쉽게 시장 경제를 파괴하고 중앙 통제적인 것으로 교체하는 것은 없다.
근시안적 사고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기업인의 발언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는 단기적으로 그들에게 명성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이는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수익 추구는 악한 것이며 비도덕적이고, 외부적 세력에 의해 통제되고 제한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강화시킨다. 이러한 관점이 수용되면, 시장을 제한하는 외부 세력이란 사회적 양심이 아니라, 고도로 발전되고 위압적인 관료, 정부 기구일 것이다. 이에 가격 및 임금 통제가 일어나면, 사업가는 자살 충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시장 메커니즘의 근간을 이루는 정치 원칙은 만장일치(unanimity)이다. 사유 재산에 기반한 이상적 자유 시장에서는 어떤 개인도 다른 누군가를 강압할 수 없으며, 모든 협력은 자발적이며, 그러한 협력의 모든 당사자는 이익을 얻게 되고, 그렇지 않다면 참여할 필요가 없다. 개인의 공통된 가치와 책임 이외에는 어떠한 "사회적" 책임도, 가치도 없다. 사회는 개인과 다양한 집단이 자발적으로 결성하는 것이다.
정치 메커니즘의 근간을 이루는 정치 원칙은 순응(conformity)이다. 개인은 교회든 독재자든 다수에 의해 결정되든 보다 일반적 사회적 이익에 봉사해야 한다. 개인은 투표를 하고 무엇을 할지 의견을 말할 수 있지만, 만약 그가 표결에서 진다면 반드시 순응해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른 사람들이 일반적인 사회적 목적에 기여하라고 요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불행히도, 만장일치가 항상 실현 가능한 것은 아니다. 순응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정치 메커니즘의 사용을 완전히 피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적 책임" 원칙은 모든 인간 활동에 정치 메커니즘의 범위를 확대시킬 것이다. 그것은 가장 명백하게 정리된 교리와 철학적 부분에서 다르지 않다. 그것은 집산주의자(collectivist; 공동 소유를 주장)들의 목적이 집산주의적 수단없이 달성될 수 있다고 믿는 것에서만 다르다. 그것이 나의 저서 '자본주의와 자유'(Capitalism and Freedom) 에서 내가 사회적 책임 원칙에 대해 자유 사회에서 '근본적으로 파괴적인 믿음(fundamentally subversive doctrine)이라 칭하고, 자유 사회에서는 "비즈니스의 유일한 사회적 책임은, 규칙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기업의 이익을 증대시키도록 설계된 활동에 참여하고 그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기나 기만 없이 공정하게 열린 경쟁에 참여하는 것"이라 기술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