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무언가 하려고 하면 누군가는 방해하는가
지금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가?
진행이 어려운가?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매우 당연한 현상이다.
변화와 저항은 늘 한 쌍이다.
작용과 반작용이다.
영향력을 미치려 하면, 저항으로 돌아온다.
영향력이 없다는 것은 안티의 이유조차도 없다는 뜻이다.
더 많은 영향력은, 더 많은 반대자를 의미한다.
가장 많은 안티를 가진 것은 가장 큰 리더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에게 가장 안티가 많다.
초기 기독교 역사에 이방 선교를 통해
전 세계에 기독교의 씨앗을 뿌린, 사도 바울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예수를 알지 못할 것이다.
종교적 관점이 아닌, 역사적 관점에서의 기독교를 살펴보자.
초대교회는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까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 사도 바울은 이방 선교에 전념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그는 변화했고,
스스로 리더가 되었고, 자신에게 권능을 부여했으며,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최선을 다해 곳곳에 교회를 세웠다.
사도 바울이 위대한 일을 행하는 가운데에도,
예수 기독교의 본산이었던 예수살렘과의 갈등은 존재했다.
야고보는 '인간 예수'의 생물학적 동생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었고,
바울이 세운 세계 모든 교회에 대표단을 보냈다.
실제로 인간 야고보와 바울을 알지 못하니
인간적 평가는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위대한 야고보였지만, 그런 행동들은
아마도 바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넌 오리지널이 아니야'라는 생각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이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의 사도 회의에 소환되었다.
그리고 변화에 대한 저항을 실감했을 것이다.
모두가 '변화하지 않기 위해서' 에너지를 사용한다.
이것은 생존의 당연한 본능이다.
그는 변화를 지속시키기 위해 발버둥 쳤다.
테살로니키 로마 필리피 등
그가 세운 대부분의 교회에 재차 서신을 보내고
자신의 사도권(apostleship)을 보호하는 데 힘썼다.
기독교를 통해 사랑의 씨앗을 전파하는 과정에도,
변화에 대한 저항은 늘 존재했다.
결과를 보자.
수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사도 바울의 서신들은 신약성경의 일부가 되어,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결과적으로는 신념을 가진 리더의 영향력이 승리했다.
변화를 추구하는 리더라면
저항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자.
누군가는 당신이 무언가를 만들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준비가 되면 방해를 시작할 것이다.
무언가를 시도하라.
이래라저래라 하는 무리들이 자연스레 나타날 것이다.
당신의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세력은 커질 것이다.
리더라면,
오른손에는 신념을,
왼손에는 저항을 들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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