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애써 외면해 오고 있었던 노화의 시작을 노안으로부터....
작년부터인 듯하다. 아니면 좀 더 일찍? 컨택 렌즈를 낀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어려워진 시점이다.
렌즈를 바꿔야겠다고만 생각했지 나에게 노안이 왔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안경을 낀 상태에서도 책을 읽는 것이 적정 거리를 유지해야 더 잘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며 이것이 노안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에게 노안이??? 인정하기 힘든 일이었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나의 기억력과 내가 모르는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나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물론 주변에 내 이야기를 들은 지인들은 이제서 시작이냐며... 본인은 벌써 오래전에 시작했고, 각기 기가 막힌 건망증 스토리를 털어놓아 조금 위로가 되긴 했지만.....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나는 언제나 한 가지에 매달리지 못하고 이것저것 기웃거렸다. 한 가지만 하고 있는 나를 견딜 수가 없었다. 연극을 보면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듣고 싶어 지고, 오케스트라 듣다 보면 길거리의 뜻하지 않은 작은 음악회가 그리워지고...... 쇼펜하우어에 빠져 있다 보면 니체가 궁금해지고..... 공과대를 들어가 놓고는 제일 먼저 듣고 싶었던 것이 심리학 강의이고, 불문학 강의였다. 최근엔 재봉틀로 뭐든 만들어내는 일이 너무 흥미로워 한국 방문 시 시간 쪼개서 강의 듣고, 집에 가정용 머신을 놓고 연습 중이었는데, 한동안 미국에서 구하기 힘들었던 마스크를 만들어 교회분들과 나누는 일도 하면서, 너무 재미있고 기뻤고 행복했고.... 악필인 내게 내내 도전거리였던 캘리그래프도 배워서 이젠 제법 집에서 나 스스로 만족하며 즐기고 있고.... 이젠 도자기? 워낙에 그릇을 좋아하는 나는 그것을 내가 만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요즘은 내 멋대로 생긴 작은 내 그릇을 사용한다면 너무 좋을 것 같아 코로나가 좀 진정이 되고 나면 도자기 클래스를 들어볼까 한다.
이토록 하고 싶은 것이 많은 나는 항상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워야만 내 삶이 가치가 있다고 느끼며 살아왔다. 그랬기에 항상 바빴고 가만히 있는 것을 견디지 못했고, 그렇게 정신없이 지금까지 와버렸다.
그리고 지금의 나를 보니....
여기저기 기웃거리느라 제대로 한 개의 전문가도 되지 못했고, 그렇다고 돈 버는 재주가 있어 돈을 벌어놓은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채로 그저 늙어가고 있는 초라한 내 모습을 발견한다. 내 나름대로 치열하게 내 젊음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깊게 고민하고 나에게 롤모델이 되어주는 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동경했고, 사랑했고, 연극과 뮤지컬에 빠져 월급을 몽땅 탕진하기도 했고..... 일은 언제나 바빠 늦은 퇴근이 일상이었고, 결혼 후엔 그야말로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두 아이를 키우고 생계를 이어가는 일로 바빴다.
치열하게 내 삶을 살아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치열함이 갖어다 준 결과 치고는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에 오는 허탈감과 좌절감은 이제 시작된 노화와 더불어 나를 더욱 준욱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든 것은...... 어릴 적부터 위인전을 좋아했던 나는 그들의 삶을 동경했고, 그들이 나라를 위해? 아님 세계를 위해 본인을 희생하는 그들의 삶의 가치를 존경했기에 그 가치를 따라 살았고.... 그것만으로 난 나 스스로가 양심적이고 올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본 나의 모습은 이런저런 이유로 크고 작은 범법을 마치 잘한 처세술쯤으로 여기며 살고 있었고... 누군가에게 도움되는 일에 눈 돌릴 겨를 없이 나 하나, 내 가족만 돌보기도 버거워 허걱 대며 살아가고 있는 나의 모습은 너무 초라했다. 돈 같은 것은 중요치 않다던 대쪽 같은 신념은 무능력자의 변명 같았고, 양심에 손을 얹으면 몇 점 부끄럼까지...... 정말 한동안 너무 힘들었고 지금까지도 힘들고 있는 중이다.
그러던 중 내가 알게 된 가장 최악으로 생각되는 내 삶은.........
온통 내가 하게 될 실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무언가에 집중하지 못했고, 잘 해내지 못했을 때 그 패배감이 두려워서 조금 해 보다가 다른 것을 시작하고 또 다른 것을 시작하고... 그렇게 살아온 삶은 아니었을까? 지적받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헸고, 내가 무언가를 잘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 스스로 받아들이는 일이 참으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지금까지도..... 어처구니없는 아집과 교만? 아니 두려움으로 결국 난 실패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언가에 나를 온전히 밀어 넣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것저것 한꺼번에 여러 개에 나의 손과 발을 뻗어 걸쳐놓고.... 작은 어려움에 봉착하면 다시 다른 것을 시작하고 또 그렇게 말이다. 그리고 항상 한발 뒤로 물러나서, 이건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아니야..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일이라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의 회피처를 나 스스로 마련해 놓고 시작하기 일쑤였던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내가 이루어 온 결과치가 다른 사람들의 것과 비교해서 좀 초라해 보이는 것쯤은 잠시 나를 스쳐 지나갈 뿐 나를 힘들게 하진 않는다. 왜냐면 어느 누구인들 각계 분야에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있긴 있을까? 그리고 모두가 최고일 수도 없고, 우리에게는 각기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고 그 역할을 해내는 것이 삶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기에, 내게 맡겨진 삶을 열심히 살아내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필요한 곳에 필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 뿐 누가 더 잘나고 못난 게 아니라, 누가 조금 더 열심히 살아내고 아니면 덜 열심히 살아내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한때 그저 초라한 내 모습에 대한 후회와 우울함으로 이 글을 작가의 서랍 속에 넣어두고 쓰는 동안 열심히 살아온 사랑스러운 나의 삶을 다시 한번 바라보게 된다. 음악, 연극, 뮤지컬을 좋아해서 항상 월급이 부족했던 그때도 그립고.... 한동안 책에 빠져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이나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등 그때 너무 많은 양을 마구 읽어내다 보니 대부분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런 책들을 읽으며 이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고 그러다 보니 염세주의에 빠져 쇼펜하우어에 심취했던 고등학교 시절.... 그러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같은 것을 읽으며 겨우겨우 염세주의에서 빠져나오려 하던 그 시절의 나를 사랑한다. 위인전을 좋아하고 그들의 삶을 동경한 내가 좋고, 그 덕분에 아직도 내 안에 나 혼자 아닌 많은 사람들을 위해 사는 삶에 더 가치를 두고, 서로 배려하는 마음과 우리는 모두 함께 따뜻함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는 가치관을 갖게 된 것도, 내가 조금 불편해도 많은 사람 위해 조금씩 양보하며 사는 삶의 가치관을 갖게 한 나의 그 시절이 감사하다. 음... 다시 돌아가도 이렇게 루저로 살아갈 것 같긴 하다. 하지만 해보지 못한 실패에 대한 후회는 앞으로 더욱 날 괴롭힐 것 같다.
그래서 결심해 본다. 실패 한번 제대로 해보기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나이 들면서 한꺼번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줄어들어서 이젠 무언가 하나에 어쩌면 제대로 집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2년 전부터 하고 싶은 공부가 있었는데 돈도 좀 들기도 하고.... 기껏 공부했는데 무용지물이 되면 어쩌지? 그것을 지금 시작해서 막 대학 졸업하고 나오는 많은 젊은 친구들과 경쟁력이 나에게 있을까? 그러다 등록까지 다 해 놓고 포기한 적이 있다. 이젠 다시 도전해 보려고 한다. 잘해서 좋은 일자리까지 잡는다면 대성공이지만 안 되면 더 성공이다. 정말 제대로 내 인생의 실패를 맛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이렇게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여전히 가슴 뛰는 나를 나는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