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의 일이다. 내가 필진으로 참여하고 있는 씨프로그램C-program의 매거진 <해외특파원이 발견한 제3의 공간>의 그 해외특파원들이 줌zoom 화상미팅으로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각자 본인이 살고 있는 나라의 아이들을 위한 놀이공간을 소개하는 것이 특파원의 주된 업무이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것이 잠시 중단된 상황에서 특파원들의 취재 업무도 함께 멈췄다. 집놀이 이야기나 홈스쿨링 이야기들이 드문드문 올라오긴 했지만, 3월 이후 이렇다 할 취재내용이 올라오지 않았고, 차마 올릴 수 없는 분위기이기도 했다. 나 역시도 폴란드 휴교령이 내려지기 2주 전에 취재삼아 아이와 박물관과 과학관, 도서관을 다녀왔지만 사진만 잔뜩 남겨둔 채 글이 멈췄다.
그러던 중 매거진 담당자인 민매니저님이 해외특파원들이 모두 모여 근황도 물어보고 서로 이 시간을 어떻게 이겨내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한국, 독일, 미국, 폴란드, 홍콩, 영국 등 시차가 제각각이지만 그래도 한국에 계신 분들의 새벽시간을 희생하고 미국에 계신 분들의 기상시간을 앞당겨가며 모두가 깨어있을만한 시간을 하나 찾았다. 근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활성된 화상미팅 프로그램은 오히려 멀리 떨어진 우리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2시간여의 미팅이 끝나고(남편은 화상미팅을 2시간동안이나 제대로 하는 건 불가능하다며, 그건 미팅이 아니라 수다라고 했지만), 각자의 소회를 이메일로 나누다가 홍콩특파원이자 나의 올케언니인 정훈 님의 '너무 신이 나서 잠이 잘 안오더라'는 후기를 읽었다. 그랬다. 나도 정말 하루 종일 신이 나 있었다. 그저 온라인으로 누군가와 인사를 나누고 소개를 받았을 뿐인데 너무 신이 났다. 왜 이렇게 신이 났는지 의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흥겨움이 이틀 후인 오늘까지도 쭉 이어졌기 때문이다. 아니 대체 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제현주 님의 <일하는 마음>을 읽다가 찾았다. 나는 나와 비슷한 삶을 사는 예시를, 이를테면 롤모델을 내내 찾고 있었다. '일상의 테트리스'라는 꼭지에서 저자는 30대 중반까지 아이를 낳아 기르는 삶의 예시가 가까운 곳에 없었던 것이 아이를 낳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게 된 이유라고 말한다. 그러다 40대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여성 동료를 만났고, 그녀를 보면서 '30대 초반에 이런 선배나 친구가 옆에 있었다면, 나 역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삶을 진지하게 고려해볼 수도 있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그 여성동료가 씨프로그램C-program의 대표인 엄윤미 님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30대 이전에 이미 애엄마의 타이틀을 획득했던 나 역시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간절히 찾는 것은 그런 선배나 친구였다. 나와 비슷한 삶의 궤적 속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
내 커리어는 2014년 여름, 둘째를 임신한 채 유학가는 남편을 따라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던 그날 이후로 멈췄다. 그보다 1년 앞선 2013년 초여름에 석사학위논문 본심을 일주일 앞두고 남편이 회사 내에서 학술파견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멈춤'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운좋게 학회 간사로도 일하고, 연구비를 받으며 논문도 쓰면서 그럭저럭 3살배기 딸아이의 엄마이자 파트타임 주부로 얇은 커리어의 끈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때의 나는 사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여러가지 일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대학동아리의 졸업생 동문회를 조직해서 분기별 모임을 여는 일이었다. 내가 속해있던 연구실에는 전공특성상 여성동료가 수두룩빽빽했지만 지도교수부터 대학원생까지 모두 싱글이거나 결혼했지만 아이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일상의 답답함과 고충을 털어놓을, 그리고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엄마이면서 사회인인 '언니들'이 간절했으나, 주말 저녁에 대학가 술집에서 열리는 기존 홈커밍에는 기혼이면서 아이가 있는 여자 선배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대낮에, 아이를 데리고, 밝은 조명의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만나자고 선배들을 불렀다. 그 모임을 통해 같은 학교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면서 같은 동네에 사는 아홉 학번 위의 여자 선배를 만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이 모임에서 나는 아이를 키우는 삶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기 어려웠고, 그마저 내가 미국으로 출국한 이후에는 모임이 완전히 끊겼다. 오히려 그 이후의 내 여성동료들은 남편의 커리어를 따라 해외에 나와서 애를 키우는 엄마들이 되었다.
미국에 있는 동안 만난 사람들은 한때는 높은 교육수준과 커리어를 자랑했을지언정 지금은 그 모든 역할을 잠시 내려놓고 엄마와 아내의 자리에 충실한 이들이었다. 힘겨운 커리어와 육아를 병행하려고 애쓰는 처지가 아니라 그 휴식의 틈을 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임신중이었거나 막 출산을 했거나 아이를 계획하고 있었다. 남편이 아직 '학생'이라는, 상대적으로 젊은 연령특성도 한 몫 했으리라. 나 역시 갓 태어난 둘째는 어렸고 F2라는 비자의 한계는 내게 그 어떤 경제적활동도 하지 말고 그저 F1의 배우자로서 조용히 집에서 아이를 키우다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둘째를 임신한 채로 미국행 비행기를 탔던 것처럼, 2년 후에는 셋째를 임신한 채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내 커리어에 대한 어떤 계획도 없었고 주변에서도 그걸 당연하게 여겼는데, 딱 한 사람, 큰딸 눈에는 그게 이상해보였다고 한다. 큰애는 일을 하는 엄마의 모습을 기억하는 유일한 아이여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당연히 내가 다시 일을 시작하거나 혹은 학교(대학원)를 다닐 거라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엄마는 아무 데도 나가지 않고 계속 집에 있었고 드디어 한국에 계신 외할머니가 나를 다시 키워줄 거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실망했다는 섭섭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친정엄마에게 눈치보이지 않고 아이를 맡기고 일을 나가는 것도 아이가 하나일 때나 가능한 이야기였다는 걸 아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리고 뭔가를 꿈꿔볼 새도 없이 셋째가 두 돌이 되기 전 다시 유럽행 비행기를 탔다. 회사에서 폴란드 주재원으로 파견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들은 날, 나는 세계지도 속에서 폴란드가 어디 붙어있는 나라인지 처음 알았다. 수십년 간 단 한번도 살아볼 것이라 꿈꿔보지 않았던 나라에서 살아야했기에, 그리고 나의 1차적인 역할은 '엄마 그리고 아내'였기에, 20대 중반까지는 내 꿈의 리스트에서 별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하던 '현모양처'라는 타이틀이 이제는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되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숨이 콱 막히고 가슴이 답답했다.
남편의 커리어로 인해 내 거취가 정해지고, 그 한계 안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삶. 그것은 단순히 육아를 병행하는 삶을 넘어 또 하나의 벽을 부숴야만 겨우 커리어의 끈을 이어갈 수 있는 삶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이외의 경우의 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나는 내가 폴란드라는 명백한 지리적 한계 안에서 해볼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고, 그 중에 하나가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비교적 적은 '글쓰기'였다. 무작정 많이 읽었고, 잡다하게 많이 썼다. 그러다 그 글을 읽어주던 지인의 소개로 기회가 닿아 지금의 해외특파원 매거진의 필진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 작업을 시작한 이후로 내게 있어 폴란드에서의 생활은 여러가지로 의미가 달라졌다. 하나는 내가 한국에 있었더라면 할 수 없었던 작업인지라 폴란드에 살고 있다는 지리적 한계가 오히려 이점으로 작용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뭐라도 한다'라는 사실이다. 의미없는 쇼핑과 집안일로 채워나가는 해외살이가 아니라 나는 어떤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는 감각.
그리고 이틀 전의 화상미팅을 통해 나는 '뭐라도 하고 싶은' 동지들을 만났다. 남편의 커리어로 인해 해외에 살고 있는 특파원들. 아직 아이들은 어리고, 일상은 버겁지만, 해외에서 아이를 키우며 커리어의 얇은 끈을 이어가기 위해 부지런히 매듭을 엮어나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니까 8년 전부터 애타게 찾아헤매던 '나와 비슷한 삶의 궤적 속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을 만났다. 해외살이의 선배이자 친구이며, 한때 내가 느꼈던 막막함과 때로는 분노의 감정으로 표출되던 그 억울함에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들.
작년 말에 해외특파원 활동 보상(?)으로 책을 몇 권 선물받았다. 그 중 가장 인상깊었던 책인 <뒤에 올 여성들에게>에는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었던 저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박사학위 취득 이후에도 남편의 거취를 고려하지 않고는 구직 시장에 나갈 수 없었던 저자는 일자리가 정해지지 않은채 두 아이를 데리고 동부에서 서부로 이사를 한다. 저자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당시는 교육을 아주 많이 받은 전문직 여성조차 남편을 따라 움직였다. 남편의 커리어가 우선이었다. 나는 순종적으로 살기로 결정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결정도 하지 않았다. 돈 잘 버는 남편을 둔 여성은 아이를 보며 집에 있어야 한다는 관습은 비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존재하는지도 깨닫지 못한 관습을 비웃는 것은 불가능했다. 샘과 나의 의사 결정 방식은 평범해 보였다. 나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자연스럽게 기대하는 방식이었다. (마이아 스트로버, <뒤에 올 여성들에게>. 192쪽) 이 문장을 읽고 난 이후로는 지금의 삶 마저도 내가 규정지은 한계라는 자각이 생겼지만, 그 관습을 무시할 만한 배짱과 용기는 아직 내게 없다. 아마 모두들 그러하리라. 나의 커리어가 소중한 것처럼 남편의 커리어도 소중하고, 가족이 한 공간에 함께 있을 때 얻을 수 있는 유대감과 행복은 그 어떤 가치에도 견줄 수 없다. 그러나 그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서 분명 내 희생은 존재했고, 그렇기 때문에 이 행복은 때론 씁쓸하다.
너무너무 신이나던 그 흥겨움에서 시작한 글이 끝도 없이 길어졌다. 그러니까 이 긴 글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뭐냐고 묻는다면 모두에게 반갑고, 고맙다고. 그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인연이 만들어져 가는 그 모든 과정에서 애쓰는 사람들에게 고마웠고, 앞으로도 고마울 것이다. 매거진의 의미가 활자로 표현되는 컨텐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글로만 읽을 때는 미처 몰랐는 데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준 이점이 뭐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나는 주저없이 이날의 화상미팅을 그 하나로 꼽으리라.
그리하여 행복의 쓴맛을 이해해 줄 것 같은 해외의 동지들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책 뒤표지의 가장 마음에 들었던 문장을 마지막으로 어설픈 글을 마무리해본다. 건강하게, 지금 이 어려운 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