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이들 예방접종을 위해 병원에 다녀왔다. 폴란드를 비롯한 중부유럽지역에서 유행하는 진드기매개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FSME 3차 접종이었다. 2차 접종을 작년 8월에 맞았기 때문에 1년 뒤인 올해 8월 이전에 3차 접종을 완료했어야 했는데,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소아과 예약이 쉽지 않았다. 아이들 가을학기 입학에 앞서 학교 건강검진 리포트도 받아야 하는데... 한 달 넘게 기다려 병원 코디네이터를 통해 겨우 예약을 하고 병원에 다녀왔다. 아이 한 명당 30분씩, 총 1시간 반 동안 병원에 있었다.
의사선생님은 세심하고 꼼꼼하게, 그리고 친절하고 차분하게 아이들을 봐 줬다. 평소와 다른 모습이라면 마스크를 쓴 선생님의 얼굴과 의사가운 위에 의료용 방호복을 덧입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한 번씩 알콜티슈로 소독하며 사용했다는 것이다. 폴란드에서는 여전히 하루에 수백명씩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가 나오지만 여기 사람들은 무슨 생각에선지 실외는 물론 실내에서도 종종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있다. 그 모든 안이함에 질려서 불안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의사선생님의 철두철미하고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며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정말 필수적인 최전방에서는 그래도 최소한의 전문성을 잃지않고 있다는 사실.
의사 선생님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은 소아과 닥터로서 아이들이 낯선 병원에서 무서워하지 않게 배려하는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는데 그 또한 인상적이었다. 시력검사표를 또박또박 읽던 둘째 아이에게 매번 대답을 할 때마다 칭찬을 잊지 않았고, 눈썹 한 번 움찔거리지 않고 의연하게 주사를 맞는 첫째아이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가장 겁이 많고 무서워했던 셋째아이에게는 아들이 손에 꼭 쥐고 있던 장난감 아이스크림트럭을 함께 살펴보며 폰트7로 쓰여 있는 과일맛과 색깔을 하나하나 같이 살펴보았는데, 나중에 검진표를 보니 청력과 시력이 모두 다 '이상 없음'으로 체크되어 있었다. 아직 지시수행이 안 되는 만 세살 아이에게 아이가 무서워할만한 검사표를 들이대기보다는 융통성 있게 아이가 좋아할만한 자극으로 검사를 수행한 것이었다. 덕분에 모든 검사 절차가 수월하게 끝났고, 따끔한 예방주사에도 짧은 울음으로 이벤트를 마무리하며 이날의 병원행을 마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원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와 아이들을 차에 태우는데, 왠지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졌다. 그 모든 배려와 서비스정신에 내가 치유받는 느낌이었다.
아, 나는 이런 걸 굉장히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문적이고 섬세한 사람의 서비스. 그리고 그 안에서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함께 위기를 극복해나가고 있다는 느낌. 코로나 이전엔 누군가에게서 때때로 받던 느낌들이고, 특히 매일 만나던 아이들의 학교 선생님들과 공유하던 느낌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아이들의 건강검진을 마치고 활짝 웃으며 "She's perfectly healthy(최고로 건강해)"라고 말해줬을 때의 그 기쁨을 다시 떠올려본다. 내가 지극히 바라고 항상 염원하는 '아이들의 건강'을, 나 말고 다른 누군가, 사실은 타인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나와 연대된 누군가가 같이 소망하고 있다는 감각. 그것은 내가 타인과 연결되어있다는 소중한 느낌이었고, 내 일상을 지탱해주는 동력 중 하나였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벗어나 지금은 낯선 나라에 터를 잡고 살고 있지만 때때로 누군가 아무 대가 없이 그런 마음을 내게 선뜻 건네주었고, 나는 그 작은 공동체의식에 기대어 매일의 일상을 버텨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꼭꼭 걸어잠근 대문 속에 갇혀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며 살아간 지 몇달 째. 한 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그 감각을 다시 마주하자 비로소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의사선생님이 수고했다며 아이들에게 주신 스티커. 나는 그 이상의 값진 시간을 보상으로 받았다.
문득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마찬가지로 병원에서 느꼈던 기묘한 위로의 감각이었다. 스물여덟살의 어느 날 아침, 아침에 눈을 떴는데 갑자기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턱에 문제가 생겼는지 아무리 애를 써도 통증 때문에 입을 1센티미터 이상 열 수가 없었다. 찾아보니 다행히 집 근처에 턱관절 치료만을 전문으로하는 치과 의원이 있어 그곳으로 갔다. 엑스레이를 찍고, 아랫턱이 탈골되었다는 의아한 진단을 받았다. 아랫턱과 윗턱이 연결되는 부분의 뼈가 삭아 없어진 것이다. 고작 스물여덟살인데. 이렇게까지 턱뼈가 마모되어 빠졌다는 것은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니었고 지난 십수년간 나의 '지나치게 이를 악무는' 습관 때문이라고 했다. 뼈가 다시 재생되려면 내가 더 이상 이를 악물지 않아야했고, 결국 습관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의사선생님은 내 직업이라든지, 일상이라든지, 평소에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사건들이 무엇이 있을 지 하나씩 물어보셨다. 나는 그날 졸지에 심리상담가도 아닌 치과의사선생님 앞에서 당시의 내 시시콜콜한 일상을 털어놓게 되었는데, 간단한 히스토리를 듣던 의사선생님이 한 마디 하셨다.
"아니, 지금 아이를 키우면서 그 힘든 일을 한다고요? 아이구, 이를 악물지 않고는 살 수 없었겠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왈칵 눈물이 흘러나왔다. 진짜 창피할 만큼 많이 울었다. 아니 이런 말을 치과에서 들을 지 그 누가 알았겠는가. 전혀 기대하지 않은 장소에서 들은 말이었지만 그때 내가 간절히 원한 말이기도 했다. 겉으로는 백조처럼 고고한 척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어떻게든 물 위에 떠 있기 위해 바둥거리던 내 모습을 엑스레이 사진 한장으로 들킨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쩌다 우연히 만난 치과의사선생님에게 좀 들킨들 어떠겠는가. 그냥 나의 힘듦을 알아주는 누군가를 만났고, 그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고 있었으며, 함께 이 위기를 타개해나가 보자며 나를 독려해주었다. 나는 그 마음에 힘입어 또 그 시기를 무사히 헤엄쳐나갈 수 있었다.
나도 사실 그런 위로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대학원에서 임상심리를 전공했던 건 그런 내 마음의 반영이었다. 3년 전쯤에 임상심리사 말고 다른 직업을 갖는다면 무엇이 좋을까 싶어 전문가선생님께 진로검사를 받았던 적이 있다. 아이셋을 낳고 키우느라, 그리고 해외에서 근무하는 남편을 따라 이나라 저나라 옮겨다니느라 본디 전공이었던 심리치료사라는 커리어 루트에서는 너무 뚝 떨어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검사결과 진로 1순위에는 너무 당당하게 '심리상담사'라는 다섯글자가 있었다. 그 결과를 본 순간 좀 어이도 없었고, 그래도 과거의 내 선택이 영 그른 건 아니었다는 묘한 안도감도 있었는데, 내 진로검사 결과가 그렇게 나온 건 본디 내가 직업적 선택에 있어서 '사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뒤따랐다. 직업적 성취가 사람을 향하고, 사람에게 위로받으며, 사람이 있어야 직업의 의미가 있는 삶. 내가 인생에서 필요로 하는 가치란 그런 것이었기에, 그런 마음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내겐 꼭 필요한 삶의 버팀목이었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 '엄마'도 사람을 향하는 훌륭한 직업이기 때문에 내 적성에 맞긴 하다. 그렇지만 오늘의 사건으로 나는 명백히 깨달았다. 내게는 가족처럼 끈끈한 관계 뿐만 아니라 느슨한 타인의 연대도 절실히 필요했다는 사실을.
나와 적당히 무관한, 인생에서 한 두번쯤 스쳐지나갈만한, 그러나 나에게 위로가 되는 타인의 호의가 그립다. 카페에서 종업원과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그가 정성스레 내려준 커피를 마시고 싶고, 놀이터에서 유모차가 지나갈 수 있게 철문을 열어주는 낯선 사람의 친절을 경험하고 싶다. 내 옆을 지나가는 사람과 2미터 이상 간격을 벌이려고 주춤거리는 게 아니라, 길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으면 일부러 그 길을 피해 빙 돌아가는 게 아니라, 그냥 거리낌없이 인사하고 그들 사이를 스쳐지나가는 날을 꿈꾼다. 눈인사를 건네며 'Dzien Dobry(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해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