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막달의 기록 : 어디에나 임신부가 있었다

by 주정현



어디에나 임신부가 있었다


스무 살 무렵에 내 돈으로 자전거를 샀었다. 버스 세 정거장 거리에 남자 친구네 집이 있었는데, 걸어가자니 멀고 매번 버스를 타자니 편도 천 원이 넘는 버스비가 아까웠다. 그런 이유로 동네 자전거 판매점에서 저렴이 자전거를 한 대 샀는데, 그 이후로 놀라운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나는 우리 아파트 단지에 그렇게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많은 줄 몰랐다. 주위를 둘러보니 경비아저씨들도 다 자전거를 타고 있었고, 교복 입은 중고생들도 모두 자전거를 타고 있었고, 시장을 보러 가는 아줌마들부터 동네 꼬맹이들까지 모두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5초에 한 대씩 자전거가 지나갔다. 여기도 자전거, 저기도 자전거. 같은 동네에서 10년을 살았는데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었다. 갑자기 세상 모든 곳에서 자전거가 나타난 것이다.

임신을 하자 이 이상한 일이 또 발생했다. 갑자기 내 신체 어딘가에서 임신부 감지 레이더가 자라난 것 같았다. 내가 가는 곳 어디에나 임신부가 있었다. 주말마다 성당에 미사를 보러 가면 옆자리에도, 앞자리에도, 뒷자리에도 임신부가 있었다. 미사 중간에 제대 앞까지 나가서 성체를 모시고 내 자리로 돌아오는데, 복도를 따라 쭉 걸어오는 동안 앉아있는 사람들의 불룩한 배만 보였다. 세상에 임신부가 이렇게 많았나? 다들 그동안 어디 숨어있다가 내가 임신을 하니까 갑자기 툭 튀어나온 거지?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대중교통에서 이 센서는 더 민감하게 작동했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스물한 개 정거장 거리의 학교로 출근하느라 매일 지하철만 한 시간 반을 탔는데, 우리는 임신부 배지 따위 없이도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았다. 가끔 자리에 앉아있는 임신부가 내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며 "저 다음에 내리니까 여기 앉으세요."라고 자리를 인수인계(?) 해주기도 했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날 때면 임신부 센서를 작동시켜 혹시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없나 두리번거렸다. 처녀 적에 내 앞에 서 있는 '배가 조금 볼록한 젊은 여성'을 보면서 '저 사람은 임신부인 걸까 아니면 그냥 똥배인 걸까' 하고 고민한 적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임신부가 되자 그 고민이 사라졌다. 내 배를 보고, 내 얼굴을 보고, 한번 서로 씩 웃어 보이면 그 사람은 '동료'였다. '우리'라는 의식이 싹트는 순간이었다.

이 신기한 일은 나뿐만 아니라 친정엄마에게도 일어났다. 딸이 임신하니까 왜 이렇게 거리에 임신부가 많이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고, 집에서 10분 거리의 재래시장까지 걸어가는데 자기가 몇 명의 임신부를 봤는지 아느냐며 호호 웃으셨다. 어쩌면 내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중년 여성에게서 가장 자리 양보를 많이 받은 건, 그들의 임신기에 혹은 그들의 가까운 가족이 임신한 시기에 발달했던 그 감지센서를 끝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대학 캠퍼스에서 한 번도 자리양보를 받지 못했다고 서운해 하기보다는, 기혼자든 미혼자든, 아이가 있든 없든, 모든 사회 구성원이 그런 감지센서를 갖게 하려면 대체 무엇이 필요한 걸까 고민해보게 되었다. 관심과 애정, 그리고 배려. 내가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도 이 감각을 잊지 않고 소중히 간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출산 휴학계


출산예정일이 5월이었기 때문에 3월에 시작하는 봄학기에는 휴학계를 냈다. 다행히 대학원에는 '출산휴학'이라는 제도가 있어서 산부인과에서 임신증명서나 출산 예정 증명서를 떼서 제출하면 전체 휴학 가능 기간 이외에 별개로 1년을 더 휴학할 수 있었다. 대학교 3학년 때였나, <여성 교육론> 수업을 듣는데, 같은 반 학생 중에 둘째 아이를 임신한 언니가 있었다. 어느 날 수업에선가 '여성이 임신 및 출산을 한다는 것이 병역의무 면제의 사유가 될 수 있는가'라는 매우 고전적이고 오래된 토론 주제가 대두된 적이 있었는데, 임신 중인 그 언니가 조용히 손을 들고 말했다.

"저는 첫째 출산 때 일반휴학으로 사용 가능한 학기를 거의 다 소진했어요. 학적 시스템에 군 휴학은 있는데 출산휴학은 없거든요. 저는 둘째 출산을 하고 한 학기 내로 바로 복학하지 않으면 아마 제적될 거예요. 병역 의무와 임신/출산이 완벽하게 대치되는 개념은 아니지만, 저는 이번 일을 통해 여성들의 임신 및 출산이 남성들의 병역 의무에 비해 훨씬 제도적으로 외면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휴학계를 제출하려는데 그 언니 생각이 났다. 과연 그 언니는 둘째 출산 이후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는지 궁금했고 '대학원에는 다행히 출산휴학이 있어요.'라고 말을 전해주고 싶었다. 대학원생은 출산 가능 집단으로 보면서 학부생은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않냐고, 같은 학교에서도 학생 신분에 따라 이 무슨 차별이냐고 투덜댈 것 같았다. 연락처라도 물어볼 걸. 그때는 그 언니를 바라보며 엄마의 신분으로 대학교를 다닌다는 걸 신기하게만 생각했었다. 어쩌면 그때의 나도 임신부를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 '완벽한 타인'으로만 여겼던 것 같다. 2년 뒤에 내가 아이를 임신할 줄은 전혀 모르고.


휴학기간을 체크하는데 1년이 기본값이었다. 나는 5월에 출산하니까 9월에는 복학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보통 기업에서도 출산휴가는 3개월 정도 주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9월에 다시 복학을 하고 싶으면 어떻게 휴학기간 변동 신청을 하죠?"하고 사무실 직원에게 물어봤다.

"네? 아기 낳고, 9월에 복학하시게요?"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찬다는 말투로 사무실 직원이 되물어봤다. 마흔쯤 되어 보이는 그 여직원이 살짝 비웃었던 것 같기도 했다. 웃으며 '아기 안 키우세요?'라고 되물어봤던 것 같기도 하고. 내 질문이 그렇게 황당한 것이었나? 연구실로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나는 교사나 공무원 같은 특정 직군을 제외하고는 다들 3개월 정도만 쉬고 다시 현업에 복귀하는 줄 알았는데. 출산 이후의 삶이 가늠이 안 되었다. 그러나 물어볼 사람은 없었다. 지도교수님을 비롯해서 아무도 '엄마'인 사람이 직장에 없었으니까.


그 질문이 육아의 현실을 1도 모르는 자의 입에서만 튀어나올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는 걸 나는 그 해 9월에 깨달았다. 다음 해 3월에, 나는 복학은 커녕 한 학기 휴학을 연장하기 위해 일반휴학으로 전환 신청을 했다.





역아 되돌리기


휴학은 했는데 대학원 연구실에는 여전히 출근하고 있었다. 수업만 안 들었다 뿐이지 연구실 책상에 앉아서 개인 연구는 계속하고 있었다. 원래 겨울방학에도 여름방학에도 변함없이 출근해서 자기 책상을 지키는 것이 내가 속한 연구실의 규칙이었다. 나는 그냥 겨울방학을 길게 연장한 셈이었다. 게다가 그때 나는 한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학술재단에서 연구비 지원과 장학금을 받고 있었고, 조건은 그 해 말까지 해당 연구의 결과보고서를 제출하고 추후 재단의 지원을 명시한 학술논문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출산한 이후에는 아무래도 당분간 일에서 손을 놓아야 할 테니, 그전에 최대한 해 놓을 수 있는 만큼 연구를 마무리해둬야 했다.

그런데 산부인과 검진에서 담당의 선생님이 아이가 거꾸로 있다고 말씀하셨다. 25주까지는 아기도 작고 가벼워서 어떤 자세로 있든지 간에 상관이 없는데, 30주가 다 된 이 시점에서 아기가 여전히 하늘을 보고 우뚝 서 있는 건 문제가 있다고 했다. "엄마가 무슨 일 하세요?"라고 물어본 선생님은 "오래 앉아있으면 안 돼요. 32주까지 기다려보고 그때도 여전히 거꾸로 있으면 수술을 생각해 봐야겠네요. 근데 내가 맡은 환자 중에 제일 젊은데 너무 아깝잖아요. 어떻게든 해 봐요."라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생님. 저도 어떻게든 하고 싶기는 한데, 그게 마음을 먹는다고 되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일단 해볼 수 있는 일은 다 해봐야 했다. 나는 그날부터 매일 틈이 나는 대로 '역아 돌리기 체조'를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결단을 내렸다.


최근에 읽은 이진민 작가님의 <나는 철학하는 엄마입니다>를 보면 이런 글이 있다. "의학적 근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학생인 엄마들에게 이런(역아인)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서 태아가 돌 공간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도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확한 출처는 모르겠는데 나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그 당시에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역아가 학생인 엄마들 대부분에게 있는 문제라면 학생을 때려치우면 되잖아? 이상한 논리적인 흐름이지만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더불어 32주쯤에 뱃속의 아기가 커지고 체내 장기가 압박을 받자 제대로 기능을 못한 소화기관 때문에 입덧은 한참 전에 끝났는데 웩웩거리며 연신 토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결국 탈진한 상태로 산부인과에 가서 수액을 맞으며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데 '내가 과연 이 몸 꼬락서니를 하고 계속 출근을 해야 하는가'하는 현타가 왔다. 그날로 집에 와서 지도교수님께 이메일을 썼다. '몸이 도저히 안 좋아서 연구실 출근은 못하겠습니다. 아이도 역아라고 하고요...(주절주절). 하고 있는 연구 프로젝트는 재택으로 어떻게든 열심히 해볼게요(못하면 어쩔 수 없고요).'


교수님은 갑작스러운 퇴실(?) 선언에 약간 벙 찐 상태였지만, 임신 중인데, 휴학도 했는데, 게다가 아프다는데(!) 연구실에 나오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호기롭게 내 연구는 내가 마무리짓겠다고 선언한 임신 8개월의 나와 달리, 임신 9개월의 나는 달라진 일상과 닥쳐온 출산 날짜에 연구 따위는 저 멀리 어디론가 던져버리고 신나게 출산준비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 방만함은 훗날 나의 발목을 크게 잡는다. 그래도 34주쯤, 기적적으로 아이는 바른 자세로 돌아왔다. "역시 엄마가 젊으니까 해내는군요!" 초음파 기계를 들고 의사 선생님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진통과 함께한 결혼기념일


출산예정일 딱 한 달 전. 그날은 우리 부부의 결혼 1주년 기념일이었다. 작년 이맘때의 즐거웠던 신혼여행 생각도 나고 곧 아기가 태어나면 당분간 장거리 외출이 힘들 테니 어디로든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출산일이 임박해서 해외여행은 힘들었고, 가까운 국내 여행지를 알아보다가 충남 서산에 있는 '수화림'이란 펜션 외관에 반해서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마침 때는 4월, 서산 개심사의 왕벚꽃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소문마저 나를 설레게 했다.


서산 목장의 푸른 들판과, 해미 읍성의 아기자기한 매력과, 마침 부처님 오신 날이 가까워져 연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개심사의 전경은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힘든 줄도 모르고 산꼭대기에 있는 절 입구까지 신나게 걸어 올라갔다. 남산 만하다는 비유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9개월 임신부의 불룩한 배를 보고 지나가는 어른들이 한 마디씩 덕담을 건네기도 했다. 아유, 힘들지 않아요? 기운도 좋네. 그랬다, 그때까지는 기운도 기분도 좋았다. 숙소에서 야무지게 바비큐까지 즐기고 최고의 결혼기념일 여행이라며 만족스럽게 잠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그날 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위기가 왔다.


새벽 3시쯤, 식은땀이 날 정도로 온 몸을 조이는 고통에 눈이 번쩍 떠졌다. 이게 뭐지? 진통인가? 말로만 듣던 진통이 이건가? 근데 아직 임신 36주인데. 예정일이 한 달이나 남았는데. 숨을 못 쉴 정도로 배가 아파왔고, 혼자 침대에서 끙끙대다가 안 되겠다 싶어 옆에서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웠다. 나 배가 너무 아픈데, 왜 아픈지 모르겠어. 이게 말로만 듣던 가진통인가? 만약 가진통이라면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터였다. 잠깐 참아보면 아픈 게 스스로 가라앉겠지... 싶어 숙소에 누워 간격을 재며 고통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누워서 몸을 웅크리고 끙끙 앓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새벽잠이 확 깨버린 남편은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바라보며 그저 발만 동동거릴 뿐이었다.


새벽 6시. 세 시간이 지났는데도 고통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서울로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펜션 주인아주머니께 이른 아침에 연락드려서 너무 죄송하지만 사정이 있어서 바로 퇴실하겠다고, 부탁드린 조식은 취소해달라고 전화했다. 걱정되신 아주머니가 주차장에 나와 우리를 배웅하는데 내 얼굴을 보며 말씀하셨다.


"에구, 나랑 눈 마주치고 인사하는 거 보니까 아직 괜찮네. 하늘이 노-래져야 애기가 나와요. 조심히 올라가요."


허엉. 나는 진짜 아파 죽겠는데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나도 이게 진진통이 아니고 가진통이길 바랐다. 그래야 아기가 예정일까지 날짜를 꽉 채우고 건강하게 나올 수 있으니 제발 가진통이길 바랐다. 그리고 대체 진짜 진통은 얼마나 아픈 것일까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초고속으로 달려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진통은 스르르 잦아드는가 싶더니 산부인과 로비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에 그 난리를 친 게 민망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기왕 많은 것을 포기하고 여기까지 왔으니 의사 선생님을 한 번 뵙고 가기로 했다. 새벽에 있었던 내 증상을 들은 의사 선생님은 진통 검사를 해주셨는데, 검사해보니 정말 비규칙적인 자궁수축이 있었다. "벌써 이 정도면, 다음 주에는 애기가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어차피 이번 주만 버티면 37주라서 만삭 출산이니까 조금만 버텨봐요." 5월 마지막 주였던 출산예정일이 어린이날 즈음으로 확 당겨졌다.




아기는 대체 언제 나올까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전하자 친정엄마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내 출산예정일이 5월 말이니까 이번 여름에는 꼼짝없이 딸아이 산후조리로 자유를 박탈당할 테니 미리 놀아두자(?)고 5월 초에 해외여행을 예약해 두셨던 것이다. 시부모님도 사정은 마찬가지. 양가 부모님 모두 최후의 자유(?)를 누리러 비행기 티켓을 끊어둔 것이다. 5월 초에 양가 부모님이 모두 해외로 떠나고 없는데 나 혼자서 애 낳으러 가게 되면 어떡한담? 정말인지 예측 가능한 것도 내 맘대로 되는 것도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부모님 없이 아기를 낳으러 가야 할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다. 남편만 한국에 붙어 있으면 된다... 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내가 바라는 건 딱 하나밖에 없었다. 남편이 해외 출장만은 가지 않기를. 이미 임신 중에 호주로 출장을 다녀온 적 있었고, 갑자기 하루 만에 출장 일정이 잡혀서 바로 다음날 비행기 티켓을 끊는 일도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나를 절대 혼자 한국에 두지 말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래서 5월 중순에 있었던 그의 출장을 직장 동료가 대신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고 나와 남편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5월의 일상을 보냈다.


5월 초에 아기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을 들으니 매일이 긴장상태의 연속이었다. 친구랑 식사 약속을 잡다가도 "근데 혹시 나 너랑 밥 먹다가 애 낳으러 갈지도 몰라."라고 예고를 했고, 가까운 거리라도 외출을 할라치면 '이대로 그대로 병원으로 직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옷차림에, 특히 속옷에 신경을 썼다. 미뤄뒀던 빨래도 하고, 신생아 옷도 죄다 삶고, 물려받은 아기 침대도 조립하고, 그렇게 분주하게 5월 한 달을 보냈다.


그리고 아무 소식도 없었다.

5월 마지막 주가 가까워졌는데도.


39주. 마지막 검진에서 선생님은 '왜 아기가 안 나올까...' 하며 중얼거리시다가, 아기는 이미 충분히 커졌고(초음파 측정으로만 3.5킬로가 넘었다), 오히려 양수 양이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 출산예정일보다 조금 앞당겨 유도분만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유도분만이라고요? 초산 산모의 경우 2박 3일 동안 시도하기도 하다가 결국 진통이 안 걸리면 수술하기도 한다는 그 유도분만이요? 그때쯤 나는 매일매일 맘 카페에 올라오는 출산 후기란 후기는 모두 다 섭렵하며 읽었고, 세 자릿수가 넘는 출산 후기를 읽으며 나의 출산 시나리오를 상상하는 게 매일의 일과였다. 근데 다들 유도분만의 장황한 실패담을 어찌나 많이 늘어놓던지, 특히 초산모의 실패담을 어찌나 많이 읽었던 지 유도분만이란 말을 듣자마자 그것만은 안 된다며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어떻게든 자연 진통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다음 주 월요일로 분만 날짜를 예약하고, 주말 내내 집 근처 호숫가를 산책했다.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둘레 2.5킬로의 그 호수를 세 바퀴쯤 돌았을 때, 산책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 눈을 한 번씩 마주치며 씩 웃었다. 저 배가 남산만 한 임신부, 아까 저편에서 봤는데 또 보이네. 계속 보이네. 참 씩씩하게도 걷네. 많이도 걷네. 그들의 얼굴에 쓰여 있는 그 말들을 읽으며, 그리고 민망하게 웃으며 걷고 또 걸었다. 물론 뱃속의 아기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다가온 월요일. 수능 아침 날 보다 오백 배는 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하늘이 노래지고서야 아기가 나왔다


아침 7시부터 분만대기실에 누워있었는데 한참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다들 아기 낳으러 가기 전에 거하게 최후의 만찬을 즐기고 온다는데, 나는 워낙 이른 아침에 공복으로 온 지라 슬슬 배도 고프고 기운도 없었다. 분만유도제와 수액이 들어가고 있으니 뭘 먹을 필요도 없겠지만, 아까 관장까지 한 마당에 뱃속에 음식을 넣을 수는 없었다. 지루하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내 옆에 누워있던 산모들은 벌써 두 명째 사람이 바뀌었다. 다들 둘째를 출산하는 경산모라고 했다. 나는 대체 언제쯤 이 방을 나가게 될까. 제발 수술이 아니고 자연분만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말로만 듣던 공포의 내진이 시작되었다. 내진이란 출산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알아보는 과정으로, 의사나 간호사가 직접 손을 넣어 자궁문이 얼마나 열렸는지 알아보는 검사이다. 이미 막달 검사 때 한번 내진을 해봤고, 그 뒤로 살짝 피도 비쳐서 '이게 이슬인가 내진혈인가' 긴가민가했던 경험도 있었다. 매일 탐독하던 출산 후기들은 '간호사 내진은 의사 내진이랑 다르게 겁나 아파요'라는 후기들을 토해내고 있었기에 분만대기실에서 첫 내진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가. 처음엔 그렇게 무섭고 아프던 내진도 시간이 지나자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내 몸속에 손을 넣어 마구 휘젓는데도 그렇게 태연할 수 있다니. 자궁문이 4센티쯤 열렸을 때, 새우등을 만들어 척추에 꽂은 무통주사도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내진은 아프다기보다는 오히려 시원했고, 되려 오른쪽 허벅지와 다리에 아무 감각이 없어서 이렇게 약발이 잘 들어도 되는 것인가, 무통주사가 너무 센 거 아닌가 하며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아무 고통 없이 조용하고 지루한 시간이 계속되었고, 간호사는 때때로 내 침대로 다가와 40프로? 50프로? 으음, 여전히 너무 느리네요. 하며 고개만 갸웃거리다 돌아갔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지나자 간호사 한 분이 들어와서, "진행이 너무 느려서, 제가 좀 도와드릴게요."라고 하더니 내 자궁을 사정없이 휘젓기 시작했다. '아기가 잘 내려올 수 있게 도와주는 마사지'라고 했는데, 대체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그저 전문 의료진들에게 맡겨진 한 마리의 순한 양이었고, 온갖 바늘을 팔뚝과 허리에 꽂고 침대에 무력하게 누워 그들이 내 몸에 무슨 짓을 가하든지 간에 그저 얌전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인위적으로 양수를 터뜨렸고, 자궁문을 여는 마사지를 받고 나자, 오후 세 시경 드디어 분만대기실을 탈출할 수 있었다.


바퀴가 달린 침대에 눕자 사람들이 나를 어딘가로 옮겼다. 침대에 멍하니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형광등의 전구가 하나 꺼져있다는 걸 발견했다. 병원이 곧 건물을 이전한다고, 시설에 투자를 안 한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그러고 보니 천장에 때도 많이 끼었네. 이런 잡생각이 내가 아기를 낳기 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생각이다. 한참 전에 무통 마취제는 그만 넣는다고 했었는데, 여전히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배에도 감각이 없었다. 진통이 올 때 그때 힘을 줘야 해요,라고 말했는데 도무지 언제 진통이 오는 건 지 알 수 없었다. 어떤 간호사는 '배를 만져봐서 딱딱해지는 느낌이 들 때'라고 말해줬고, 어떤 간호사는 '배변을 할 때처럼 자연스럽게 아래에 힘이 가해질 때'라고 말했다. 둘 다 모르는 감각이었다. 무섭도록 아무 감각이 들지 않았다. 무통빨이 심하게 잘 들었군, 하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타이밍을 알기 어려우니 간호사들이 구호를 외칠 때 그냥 힘을 주기로 했다. 배에 힘을 줘야 하는데 괜히 머리에만 핏대를 세운다고 혼났다. 도저히 어디에 뭘 어떻게 힘을 줘야 하는 건 지 알 수 없었다. 다들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거라 했었는데, 유도분만에 무통분만에 온갖 인위적인 현대 의학이 개입한 분만 과정에서 나는 무력하고 무지했다.


결국 깔때기처럼 생긴 흡입분만기가 등장했다. 내가 제대로 배에 힘을 주지 못하니 간호사가 푸시를 도와주기로 했다. '푸시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하는 궁금증이 미처 생기기도 전에, 간호사 한 명이 팔꿈치를 내 명치에 대고 침대 위로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성인 한 명의 체중이 배 위에 쏠리자 무통이고 뭐고 폐가 압박되는 기분에 억 하는 비명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갓 태어난 핏덩이는 흡입분만의 영향으로 머리가 세모 낳게 뾰족했다. 무통주사의 영향으로 8시간 내내 아무 감각이 없었는데, 아기가 태어나는 그 순간에는 정말 하늘이 노래졌다.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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