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만 하면 끝인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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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원에 빈 방 없습니다
무사히 아기를 출산하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일 중 하나는 예약했던 산후조리원에 연락하는 것이었다. 물론 처음에 계약금을 낼 때 조리원 측에 출산예정일을 알려주긴 하지만, 실제로 예정일에 딱 맞춰 태어나는 아기는 전체의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정말 아기를 낳은 이후에야 산후조리원에 들어가는 날짜가 결정된다. 유도분만 예약을 잡고 병원에 가는 아침에도 조리원에 연락을 했지만 당일에 아기가 나올지, 아니면 72시간 진통 이후에 나올지 알 수 없으므로, 정말 아기가 태어나면 그다음에 연락해달라고 이미 퇴짜를 한 번 당했다. 그런데 막상 산후조리원에 연락을 해보니, 현재 모든 방이 산모들로 꽉 차서 빈 방이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두둥)
아니, 이건 또 무슨 예상치 못한 변수인가.
이쯤에서 내가 예약한 조리원에 대해 살짝 이야기해보자.
내가 아기를 낳을 당시 살던 신혼집 근처에는 산후조리원이 정말 많았다. 워낙 아기를 많이 낳는 다산의 고장이었고, 그만큼 출산지원금도 서울시 내 지자체 중에서 제일 낮았다. 차로 20분 거리 내의 조리원을 다 합치면 두 자릿수가 넘었는데 선택지는 너무 많았고, 가격도 그만큼이나 다양했다. 고소영과 이영애가 산후조리를 했다던 일반적인 가격의 두세 배가 훌쩍 넘는 최고급 산후조리원부터, 평균 가격보다 더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었지만 산모들의 후기가 그렇게 좋지 않아 딱히 끌리지 않는 조리원도 몇 있었다. 이건 출산병원 선택보다도 더 어려웠다.
같은 아파트 단지의 산모들이 제일 많이 가는, 동네에서 가장 가깝고 평이 좋으며 가격도 무난한 산후조리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 조리원이 하필 시댁 바로 앞에 있었다. 말 그대로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되는, 시댁에서 도보 1분 거리. 게다가 건물 7, 8 층을 쓰고 있는 그 산후조리원은 높이까지 딱 맞는지라, 시댁 창문에서 바로 마주 보이는 그 조리원에 있으면 마치 감시탑 파놉티콘이 눈 앞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조리기간 내내 느낄 것 같았다.(실제로 감시한단 얘기가 아니라 내 기분이 그렇다는 얘기다. 매직미러형 창문으로 내부가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동네 애기 엄마들을 많이 사귈 수 있었던 그 조리원은 아쉽게도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후기도 많고 정보도 넘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프롤로그에 썼던 선배 엄마가 자신이 첫째 출산 때 갔던 조리원을 적극 추천했다. 다른 건 몰라도 모유수유는 여기가 최고라고. 혹시라도 '완모(분유 수유를 하지 않는 완전 모유수유)'를 노려본다면, 그곳 조리원 원장님이 이 분야에서는 베테랑 중에 베테랑이라고.
임신 6개월 경, 나는 서너 군데 정도 투어를 해 보고 최종적으로 그 조리원을 선택했는데, 내게 제일 와 닿았던 조건은 (아무 배경지식도 없고 너무 막연했던) 모유수유보다는 '위치'였다.
내가 예약한 조리원은 아예 다른 지역구에 있는 산후조리원으로 집에서부터 거리는 후보들 중에서 제일 멀었다. 대신 출산 병원과 남편 회사에서 가깝다는 이점이 있었다. 어차피 산후조리 중에는 집에 갈 일도 없으니 매일 조리원에서 출퇴근하는 남편을 고려해서도, 퇴원 길을 생각해도, 산후 검진을 갈 때를 생각해봐도, 회사와 병원과의 거리가 가까운 게 더 이득일 것 같았다. 게다가 인터넷 후기를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미 다녀온 지인의 추천도 있었으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예약한 조리원에 빈 방이 없다니?
길일에 태어난 아기
대체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는지 알아보니 그날이 '길일'이었다. 본디 길일이라는 것은 산모가 안전하고 무사하게 출산을 할 날짜로 산모와 궁합이 맞는 날짜를 선택.... 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날 아기의 사주팔자에 관여하는 날짜다. 사주팔자는 태어나는 해, 월, 일, 그리고 시간의 육십갑자로 이루어진 것. 근데 그해, 신묘년 5월의 가장 길한 날짜가 바로 내가 출산한 날이었다. 내가 출산하고자 하는 날짜와 시간을 정할 수 없는 나 같은 자연분만 산모들에게야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 일이지만, 제왕절개 산모들에게는 다르다. 어차피 수술 날짜야 의학적으로 안전한 범위 내에서 선택하면 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 중에서 기왕이면 길일이 낫지 않은가. 실제로 아는 언니는 새벽 3시가 가장 좋은 시간이라고 철학원에서 콕 집어줬기 때문에 수술실에서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다가 정확히 새벽 3시가 지나고 나서 배를 갈랐다고 한다. 이런 맞춤형 사주 제공 서비스 같으니라고. 근데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내가 딱 길일에 맞춰 아기를 낳았다.
전국에 있는 5월 말 만삭인 제왕절개 산모들이 모두 그날 수술을 받았다 한다. 아니, 아마 모두는 아니겠지만 참 많이들 그 날 수술을 받았다. 그래서 산후조리원뿐만 아니고 병원에서도 입원실이 부족해서, 한 대학병원 산부인과에서는 침상이 모자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제왕절개 비율은 일반 산부인과보다 대학병원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훨씬 많은데, 아무래도 수술이다 보니 혹시 모를 응급 상황에 대비해서 많이들 '큰' 병원을 선호한다.) 사정은 산후조리원도 마찬가지. 하루 이틀 산후조리원을 운영한 것도 아니고, 이런 변동사항에 대비해서 실제 수용 가능인원보다 좀 적게 예약을 받아두는 편이지만, 이렇게 같은 날 산모들이 우르르 쏟아지면 어쩔 수가 없다. 예약금을 돌려드리고 파트너 관계인 다른 산후조리원에 빈 방이 있어 소개해드릴 테니 그리로 옮겨가면 안 되냐는 제안을 받았다. 아니 그렇지만 이 난리통에 빈 방이 있는 산후조리원이라니...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좀 신뢰가 가질 않았다. 게다가 내가 조리원 예약하는 동안 얼마나 고민도 많이 하고 인터넷 검색도 많이 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결론이 나버린단 말인가.
결국 난 그 제안을 거절하고 내가 예약한 산후조리원을 꼭(!) 들어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는데, 가족들 간에도 '사정이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다른 데 가야지 무슨 고집을 부리냐' 하는 파와 '그래도 열심히 알아보고 예약한 좋은 데 가야지' 파로 나뉘었다. 나와 생각이 다른 가족들에게 울컥 서운한 마음이 올라왔는데, 그래도 최종 결정권자는 아기를 낳은 '나'이고, 내가 원한다는 데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내가 고집을 부린 만큼 산후조리원에 전화하는 건 내 역할이었다. 내심 전화를 걸면서도 진상고객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이걸 어떻게 협상하나 속으로 많이 걱정했었다. 일단 그런 걸 잘 못하는 성격인 데다가 출산 직후에 그런 데에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조리원에서도 나 같은 고집쟁이 산모가 한둘이 아니었던지 '그럼 어쩔 수 없지요' 하고 바로 순순히 응낙하시더니, 한두 시간 후 '이틀 뒤에 뵐게요.'하고 전화가 왔다. 없던 자리를 만들기 위해 조리 기간이 끝나가는 기존 산모들에게 비용을 돌려주고 일찍 퇴소시켰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안돼, 병원 오지 마
그 후로 퇴원일까지도 모든 것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화장실을 가는 게 힘들다 못해 무섭기는 처음이었고, 생전 처음 보는 좌욕기는 사용방법을 몰라 버벅댔다. 게다가 산후조리를 해야 한다는 몸의 자각이 없어서 주변 어른들에게 많이도 혼났다. 출산 당일 저녁에 아무 생각 없이 손을 씻으려고 수도꼭지를 틀었는데, 옆에 있던 친정엄마가 깜짝 놀라며 "야, 찬물로 손을 씻으려고? 너 그러다 큰일 나!" 하면서 얼른 수도꼭지를 온수 쪽으로 돌렸다. 그 순간 내가 하려던 짓이 굉장히 큰 잘못인 것처럼 뜨끔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냥 좀 차가운 물이 손에 닿으면.... 안되나? 고작 세 시간 전에 아기를 낳았을 뿐인데 그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몸뚱이가 된 기분이었다. 이 순간부터 공기든, 물이든, 음식이든 조금이라도 차가운 것은 마치 독극물인 것 마냥 조심해야 했다. 잘못하면 '산후풍'을 얻을 수 있으니까.
내게 '산모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없었던 것처럼, 똑같이 20대 초중반인 내 친구들에게도 그런 자각이 없었다. 출산 다음날, SNS에 올린 출산소식을 보고 친구들에게서 "꺅, 나 병원에 아기 보러 놀러 가도 돼?"라는 문자가 왔다. 문자를 보고 순간 멍 한 기분이 들었다. 친구들이 '놀러'온다고? 여기 병원으로?
그때 내가 느꼈던 산부인과 입원 병동의 분위기는, 출산 직후의 산모와 신생아를 보호하기 위한 무균 철옹성 같은 느낌이었다. 꽃바구니와 과일바구니도 세균 감염과 전파의 우려가 있으니 병실에 들여보내지 말라고 권고했고, 어린 조카들은 혹여 병균을 옮길 수 있어 면회가 금지되었으며, 병실에 찾아온 가족들조차 갓 태어난 아기가 마치 부서질 것처럼 연약해 보여서 모두 손가락 발가락 하나 만지는 것 까지 조심스러워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이 조심스러운 병원에 예쁘게 화장을 하고, 향수 냄새를 풍기며, 맛있는 케이크 따위를 들고 올 그녀들의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산후풍을 염려해 며칠 째 씻지 않은 꼬질꼬질한 내 몰골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고, 솔직히 지금처럼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에서는 단 한 시간의 수다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아마 친구들 중 한 명이라도 나보다 앞서 아기를 낳아본 경험자가 있다면, 차마 병원에 오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지금은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어서 힘들 것 같다고, 병원에 오지 말라고 답장을 보냈다.
친구들로부터는 많이 힘들었나 보네. 난산이었나 보다. 푹 쉬고 얼른 회복해라 등등의 답장이 왔다.
글쎄. 나는 난산이었을까 아니면 순산이었을까. 진통이 어마어마하게 길었던 것도 아니고, 어쨌거나 무사히 자연분만으로 아이를 출산했으며, 이렇게 멀쩡히 걸어 다니고 화장실도 가고 밥도 먹으니 순산이었던 거 아닐까. 그런데 순산이라고 하기에는 왜 이렇게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플까. 아프지 않은 곳이 하나 없고 그냥 온몸이 고장 난 로봇 같으며 차가운 물 한 방울도 무서워하며 벌벌 떨어야 하는데. 아니 애초에 난산이란 순산이란 말은 누가 처음에 만들어낸 걸까. 대체 그 기준이 있기는 한 걸까.
카시트를 태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리고 퇴원일. 이날을 기다리며 임신 중에 손바느질로 한 땀 한 땀 만들었던 배냇저고리를 신생아실로 보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는 신생아실에서 제공하는 배냇저고리와 속싸개를 입히다가 퇴원할 때는 집에서 직접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히는 것이다. 병원에 있는 2박 3일 동안, 매번 모자동실(엄마와 아기가 한 병실에 있는 것) 시간을 보내고 나면 처음에 간호사 선생님들이 아기를 보낼 때 곱고 반듯하게 입혀준 옷매무새는 온데간데 사라져 버렸다. 대신 기저귀도 배냇저고리도 처음 만져본 초보 엄마 아빠 손에서 아기는 추노같은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일단 한 번 풀어헤치고 나면 도저히 간호사 선생님과 같은 능숙한 솜씨로 아기를 포장(?)하기는 어려웠다.
원래 정석대로 신생아를 감싸는 방법은, 배냇저고리를 입히고, 그 위에 속싸개를 두르고, 다시 그 위에 폭신한 이불 같은 겉싸개를 두르는 것이다. 그러나 여름 무렵에 태어난 아기라 우리는 겉싸개는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대신에 손바느질로 작고 얇은 여름이불을 하나 만들어 겉싸개처럼 썼다. 퇴원날 아침, 세 겹으로 켠켠히 잘 감싸진 아기가 내 품에 안겼다. 이제 병원 문 밖으로 나가 산후조리원으로만 가면 된다.
병원에서 산후조리원까지는 넉넉잡아 15분이면 가는 거리였는데, 우리는 차에 타는 순간부터 고민스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아기를 카시트에 태울 것인가 말 것인가. 아기를 카시트에 태우려면 속싸개와 겉싸개를 벗겨서 손발이 겉으로 드러나게 해야만 벨트를 채울 수 있었는데, 한 마리의 누에고치처럼 단단하고 야무지게 동여매진, 프로의 손길이 느껴지는 이 포장을 차마 아까워서 풀어헤칠 수가 없었다. 분명 내가 한 번 풀고나면 조리원에 인수인계할 때의 아기는 여기저기 속살이 훤히 드러내 보이며 다시 추노같은 모습으로 돌아가겠지. 게다가 신생아 인서트를 끼웠는데도, 카시트는 아기의 몸집에 비해 너무나 크고 거대하게 느껴졌다. 잠시 고민하다가 내가 그냥 아기를 안고 뒷좌석에 타기로 했다. 카시트에 태우지 않고 그냥 아기를 안아서 탔을 때의 위험성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운전경력 10년의 남편은 여태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가장 방어적이고 가장 느린 거북이 운전을 하며 차를 몰았다. 절대 절대 절대, 아주 가벼운 접촉사고도 나선 안된다는 중차대한 임무를 지니고.
그리고 드디어, 무사히 조리원에 입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