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시간은 누구의 것일까

by 주정현


제삼자에게는 아이가 엄마라는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기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 눈에 수월하게 보입니다. 엄마는 한때 비밀을 가지고 있었고, 다시 비밀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식들의 무한한 요구 때문에 시달렸던 과거 그 시절이 행복했었구나 생각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당장 시달리고 있는 엄마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엄마에게는 아이가 모든 곳을 헤집어놓는다는 현재 경험만이 있을 뿐입니다.

_ 도널드 위니코트, <충분히 좋은 엄마> (펜연필독약, 2022)


며칠 째 계속해서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쓰고 싶은 글이, 써야 하는 글이 마음속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던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노트를 펼쳐도, 모니터를 마주해도 무슨 글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시쳇말로 '글태기'라는 게 이런 걸까. 백지를 마주하면 머릿 속도 덩달아 새하얘진다.


예전에 쓰던 글을 서랍장에서 꺼내서 이런저런 문장을 덧붙이기도 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써보기도 하지만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쓰고 싶은 문장과 쓸 수 있는 문장 사이의 거리가 아득히 멀다.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보고... 아, 아니다.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생각은 단순하고, 문장은 덤덤하다. 쓰면 쓸수록 내 글이 더 이상해 보이고 짜증이 난다. 그대로 덮어버린다.


지난 몇 주간 제대로 글을 쓰는 쓰는 시간을 갖지 못했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첫 계기는 남편의 해외 출장이었다. 늘 아빠랑 함께 자던 막내가 내 옆구리에 붙었는데, 막내는 누군가와 체온을 나누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면 금세 잠에서 깨버리곤 한다. 새벽 네시 반에 일어나 가까스로 확보했던 '미라클했을 지도 모를 모닝'을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남편이 귀국한 다음날, 둘째 아이가 열이 났고 세 아이들은 다 같이 학교를 쉬었다. 학교로 돌아간 지 일주일 만에 다시 방학이 되었다. 발만 동동거리며 겨우겨우 하루를 살아내는 느낌이다. 생각이라는 녀석이 끼어들 틈이 없다. 머릿속 어디에선가 동동 떠다니는 문장을 잡아다가 종이로 옮기고 싶은데, 그 생각 더미를 잡을 수가 없다. 글을 건져 올리던 낚싯줄이 톡 끊어진 느낌이다. 뿌옇고 답답하다.


오늘 아침엔 답답하다 못해 마음이 새까매져서는 '엄마의 시간은 엄마 꺼고, 네 시간만 네 거야. 엄마의 시간을 네 것처럼 네 맘대로 쓰려고 하지 마'라며 막내에게 화를 내었다. 그렇지만 아니다. 여섯 살 아이를 둔 엄마라면, 엄마의 시간은 일정 부분 아이의 것이기도 하다. 아이에게는 엄마의 시간을 나를 위해 써달라고 정당하게 요구할 권리가 있다. 내가 글을 쓰기 위해 나만의 시간을 확보하려 할 때면 나는 잠깐 엄마의 역할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내가 지금 혼자서 생각할 시간을 갖는다는 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글을 쓰고 있다는 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미뤄두고 나의 역할로부터 도망치고 있다는 뜻이다. 방에는 개키지 못한 빨래가 산처럼 쌓여 있고(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막내 앉은키는 충분히 넘을 높이로 빨래가 쌓여 있다...) 싱크대에는 끝내지 못한 설거지가, 청소기를 돌리지 못한 바닥에는 종이 쪼가리와 머리카락이 굴러다닌다. 아이는 그림책을 읽어달라고 한 움큼 가져왔다가 '10분만 이따가, 10분만 이따가...'를 30분째 이야기하고 있는 엄마한테 마음이 토라져 훌쩍이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임, 방치, 태만... 그런 단어들이 내 행동을 수식하는 단어로 덕지덕지 달라붙는 동안 그렇게 모든 것들을 외면하고 고작 글을 쓰겠다고 이렇게 앉았다.


그랬는데 기껏 써놓은 글이 이따위인 것이다. 열심히 쓰긴 썼는데 남 보여주기에 차마 부끄러워 글을 발행하지 못하고 다시 서랍 속에 처박아 놓는다. 시간만 허비하고 짜증만 얻었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 가며 글을 써야 하는지 회의가 든다. 아니다, 내가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글을 쓰기 싫으니까 괜히 아이들 탓을 하며 도망갈 핑계를 대는 것이다. 예전에 더 바쁘고, 더 치열하고, 애들은 더 어릴 때, 화장실 한 번 마음 놓고 다녀올 수 없었던 시절에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글을 쓰지 않았던가. 결국 그때만큼 간절한 마음이 없는 거다. 어떻게든 쓰고 싶은 마음.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없냐고? 아니다, 있다.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열망이 있다. 그 열망은 좋은 글을 읽을 때마다 찾아온다. 마음을 울리는, 감탄을 자아내는, 읽으면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심장 주변 근육이 찡 하게 아파오는 그런 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 차오른다. 그런데 요즘은 그 마음이 조금 삐뚤어진 모양으로 찾아온다.

'아, 나 따위가 글을 쓰겠다고 설쳐대는 꼴이라니. 나는 절대 이런 글을 쓰진 못할 거야.'


글이 대체 뭘까. 왜 글이 안 써지면 마음이 이렇게 힘들까? 글을 쓰는 게 어떤 경제적 이득을 주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내게 글을 쓰라고 강요한 적도 없는데 매주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하면 왜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까. 글은 대체 내게 어떤 의미일까.


나는 더 나은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글을 쓴다. 엉킨 타래 같은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 글을 쓴다. 엄마로만 살고 싶지는 않아서 글을 쓴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설거지를 하는... 아무리 해도 겉으로 티가 나지 않고 아무도 그 수고와 노력을 몰라주는 일에만 내 시간을 쏟고 싶지 않아서 글을 쓴다. 한 편의 글을 발행하고 나면 뭐라도 의미 있는 일을 했다는 보람찬 마음이 든다. 그 마음, 그 들뜬 마음이 좋아서 글을 쓴다. 그 마음이 불러오는 두근거리는 감정은 꽤 중독적이다. 한동안 그 마음을 느껴보지 못해서 힘들었다. 그래서 마음이 그렇게 답답하고 어두웠나 보다.


그러나 오늘은 이 글을 발행해도 그렇게 마음이 두근거릴 것 같지 않다. 여전히 내 글은 마음에 들지 않고, 오늘의 글은 특히 불편한 마음과 서툰 짜증만 가득한 글이라서 부끄러운 마음만 앞선다. 글을 쓰던 중에도 지금 저기 토라져서 짜증을 부리고 있는 아들 옆에 가야 할 텐데 하는 생각만 든다. 이제는 미루고 미루던 그림책을 읽어줘야지. 아이의 시간을 내가 뺏어와서 내 마음대로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는데, 행복하지 못한 엄마에게서 행복하지 못한 글이 나왔다. 아이마저 행복하지 않을까 봐 걱정스러운 마당에 내가 쓴 글의 행복을 염려하는 마음은 사치스럽다.


글이라는 건, 온전히 1인분의 삶만 살아내면 되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잉여스러운 정신 활동이 아닐까. 깜냥이 안 되는 사람이 능력 밖의 일을 꿈꾸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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