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를 읽는 마음
시 필사 모임에서 나눈 동시 두 편
올해 2월에 시를 필사하는 모임을 시작했다.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이 각자 나누고 싶은 시 두 편을 가지고 모여 스무날 동안 하루 한 편씩 시를 필사하는 모임이다. 어느새 두 번의 모임을 마치고 세 번째 모임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매번 모임마다 나는 꼭 동시 한 편을 가지고 온다.
'동시'라고 하면 아이들이 읽는 시라고 폄하하기 쉽지만, 의외로 어른이 되어 읽으면 더 색다른 맛이 있다. 마치 어릴 때 읽었던 동화를 어른이 되어 다시 읽으면, 어렸을 땐 전혀 눈에 띄지 않았던 행간의 의미가 보이듯이, 어른이 되어 읽는 동시에는 어른 눈에만 보이는 무언가가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동시는 아이들이 쓴 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어른인 시인이 어린이 독자를 생각하며 쓴 시다. 그래서 시어가 쉽고 간결하지만 유치하지는 않다. 오히려 아이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 어린이들에게서도 공감의 정서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부단히 애쓰고 노력한 시인의 흔적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시에는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첫 번째 모임에서 나눈 시는 박혜선 시인의 '첫눈 내린다'였다. 시를 나눴던 2월의 그날은 박혜선 시인의 동시집 <바람의 사춘기>가 막 출간되기 직전이었는데, 동시집의 출판사인 사계절 출판사에서 아직 나오지 않은 책에 담긴 시 한 편을 미리 SNS를 통해서 공개했다. 나는 이 시를 읽자마자 한눈에 반했다. 설 연휴를 앞두고 택배 대란이 있던 시기였고, 내가 사는 나라에선 시에 그려진 삽화처럼 눈이 펑펑 내렸다. 어쩌면 편집자도 나와 같은 풍경을 봤을까. 그래서 이날의 풍경을 보며 곧 세상에 나올 이 시를, 그러나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이 시를, 그래서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이 시를, 출간까지 남은 그 며칠을 차마 기다릴 수 없어 바로 이날 이 풍경에 안겨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바람의 사춘기> 첫눈 내린다 삽화. 박혜선 동시, 백두리 그림. 출처: 사계절 어린이 인스타그램 @sakyejulkid 너무나 적절한 시기에 내 마음에 콕 와서 박힌 이 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시를 만난 다음날 동시집의 삽화와 함께 시를 나눴다. '첫눈 내린다'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첫눈 내린다
박혜선
학원 버스 기다리며
편의점에서 라면 먹는다
파란 조끼 아저씨
내 옆에서 라면 먹는다
창밖에 눈발 날리는데
4시 45분을 달리는 시계 보며 라면을 먹는다
"예, 그럼요. 지금 몇 신데 아직 점심 안 먹었을까 봐.
예예. 여기도 조금씩 날려요. 엄마, 저 운전 중이니까 나중에 전화할게요."
전화를 끊으며 면발도 끊으며
아직 반이나 남았는데 바삐 나간다
창밖, 택배 트럭이 떠나는데
눈이 내린다
나를 태울 수학 학원 버스가 오는데
눈이 내린다
빈 그릇을 치우고 뛰어가는데
첫눈이 펑펑 내린다
그냥 들리는 것을 듣고, 보이는 것을 보고, 그것을 그대로 옮겨 적은 시인데 가슴이 많이 아렸다. 내게 이 시는 '엄마'에 대한 시였다. 시에도 삽화에도 그 모습이 등장하지 않았지만, 창밖을 바라보다 하나둘씩 날리는 눈송이를 보고 택배 배달하는 아들이 걱정되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을 엄마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운전 조심하라고, 끼니 거르지 말라고, 건강 챙기라고,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은 차고 넘치는데, 일하는 아들에게 방해될까 봐 망설이며 주저주저 전화를 걸었을 그녀의 마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해외에 사는 딸에게 비슷한 마음을 품고 사는 한국에 있는 엄마가 떠올랐다.
내가 엄마에게 종종 보내는 카카오톡 이모티콘 중에 '딸 걱정하지 마'라고 쓰여 있는 이모티콘이 있다. 얼마나 자식 걱정하는 부모들이 많으면 이런 이모티콘이 나왔을까, 매번 쓸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어 피식피식 웃는다. 그리고 쓸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콕콕 아프기도 하다. 전화를 끊으며, 면발을 끊으며, 눈 속으로 뛰어 나가는 파란 조끼 아저씨의 마음도 이랬을까 싶다.
아들은 걱정하지 말라며 진실을 감추지만, 과연 그 진실이 감춰졌을까. 4시 45분에 겨우 점심을 먹는 아들의 진실은 편의점에 앉아있는 아이의 시선만큼이나 엄마의 눈에 투명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폴란드와 한국의 거리는 7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데, '엄마의 촉'은 그 먼 거리를 뚫고 무섭게 내 일상에 날아와서 콕 박힌다. 그래서 이 '첫눈 내린다'를 읽으며 나는 가장 먼저 엄마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어린이의 문학인 동시를 읽어서일까, 아니면 내 안에 여전히 어린이가 살아 있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엄마 앞에서는 나는 서른 살이고 마흔 살이고 간에 언제까지나 어린이로 남아있기 때문일까.
내가 엄마가 되었는데도, 시를 읽고 나니 나도 내 엄마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택배 아저씨의 끊긴 전화처럼, 이런 마음도 엄마에게 가 닿지 못했다. 엄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모임에서 나눈 시는 함민복 시인의 동시집 <노래는 최선을 다해 곡선이다>에서 가져왔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동시집인데, 이번 달 필사 모임에 이미 다른 두 분이 함민복 시인의 시를 나눠주셔서 다음 달이나 다다음달 즈음에 이 책에서 시 한 편을 뽑아 나눠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함께 모임에 참가하는 J님이 할머니가 소천하셔서 장례를 치르느라 당분간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래서 작은 위로의 마음이나마 전달하고 싶어 이 시를 꺼내왔다. 함민복 시인의 '수목장'이다.
수목장
함민복
할머니가 소나무 밑에 묻혀 소나무가 되었다
휜 허리는 곧게 펼쳐지고
흰 머리카락은 푸르러지고
할머니 냄새 대신 향긋한 냄새가 난다
책에서 보니까 인디언들은 살아서
제일 많이 따 먹은 과일나무 밑에 묻혀
그 나무의 거름이 된다고 하던데
할머니는 송편 찔 때 솔잎 많이 써
소나무 밑에 묻혔나
그런데 할머니
먼 곳이 보고 싶으면
키 더 크시면 되겠지만
늘 서있어 다리 아파 어쩌지
바람 많이 분 다음 날
할머니 보러 또 올게
잘 가라고 이제 손 그만 흔들어 줘도 되는데
새로 생긴 친구들에게도 벌써 내 자랑하셨나
할머니 주위 나무들도 손을 흔들어주네
아이 참, 할머니도...
이 다정한 시를 옮겨 적으니 어쩔 수 없이 할머니 생각이 났다. 나는 운이 좋게도 서른 후반의 나이에도 할머니 두 분이 다 살아계신다. 동시 속에 등장하는 어린이보다 이별의 경험을 적게 안고 산다. 더없는 행운이다. 그리고 그만큼 불안해한다. 언제 그 이별의 순간이 올지 몰라서 초조해한다.
외할머니에겐 내 딸이 첫 증손녀다. 그래서 외할머니랑, 엄마랑, 나랑 그리고 딸이랑. 이렇게 넷이 나란히 앉아있으면 모녀 4대가 함께 한자리에 있다는 느낌에 괜스레 벅차고 뿌듯해지곤 했다. 생을 이어가는 그 연결고리에, 할머니로부터 내 아이까지 이어지는 그 다리에 내가 주춧돌을 하나 놓은 것 같은 그런 뿌듯함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그렇게 넷이 나란히 앉아본 게 언제였더라. 마지막으로 그 뿌듯함을 느낀 게 언제였더라.
지난번 귀국길엔 짧은 일정에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가기 번거로워, 아이들이 시댁에 있는 사이 엄마랑 오빠랑 셋이서만 외가댁에 다녀왔었다. 그리고 이렇게 매번 귀국길에 인사드리러 갈 때마다 괜스레 마음이 초조해진다. 내가 다시 한국으로 이사 갈 때까지 건강하게 계셔야 하는데, 혹시라도 이번이 내 생애 마지막으로 뵙는 건 아니겠지 하는 울컥한 마음이 든다. 폴란드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에 계신 할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초조해진다. 애틋하고 먹먹하고 보고 싶고, 그리고 할머니 앞에서는 항상 어린 손녀로 남아있고 싶은 마음이 막 두서없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렇게 엉킨 마음과 달리 시는 참 다정하고 순수해서, 그래서 더 슬펐다.
시를 읽다 보니 최근에 브런치를 통해 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신 나연 작가님 생각도 났다. 그래서 시를 필사하던 그날 밤, 이 시를 나연 님께도 보냈다. 할머니 잘 가. 그리고 우리 또 만나. 하고 할머니께 하늘로 편지를 보낸 나연 님의 글이 자꾸만 떠올랐다. 예쁘고 고운 시와, 사진으로 만났던 나연 님의 할머니, 그리고 왠지 그 할머니를 닮은 푸른 소나무를 떠올리면서 계속 시를 옮겨 적었다.
동시를 읽다 보면 자꾸 어린아이가 된다.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할머니에게, 엄마에게 자꾸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 진다. 현실의 나는 해외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굳건하고 당차게 일상을 꾸려 나가야 하는 엄마로 살아간다. 그런데 동시를 읽으면 그런 책임감 따위는 하나도 모르던 유년의 시간으로 마음이 되돌아간다. 그럴 때마다 언제고 내 어리광을 받아줄,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거리도 멀고, 시차는 아득하고, 국경도 닫혀 있는 이곳 폴란드가 아니라, 어릴 때 다니던 초등학교가 눈에 보이는 그 집에 내 마음이 가 있다. 그곳에 마음만 아니라 몸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나약한 마음이 든다.
이렇게 동시를 읽을 때마다 자꾸 마음이 부들부들해져서, 또 누군가를 걱정시키고 슬프게 만들까 봐 그동안 동시를 남몰래 읽었다. 아주 가끔 딸한테만 한두 편 보여주고 말았다. 그런데 시 필사 모임을 시작한 이후로는 한 달에 한 편 정도는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몇몇 동시를 보냈다. 나약한 마음이 들키면 어때, 우리는 함께 '시'를 읽는 사람들인데 하면서 조금 마음을 내려놓았다.
다음 달엔 또 어떤 시를 보낼까. 그리고 또 어떤 아이로 돌아갈까. 아이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 그리고 가끔은 아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동시를 읽는다. 그리고 내 속에 살고 있는 그 아이의 마음은 슬프고 아리지만, 한편으론 그립고 다정해서 좋다.
동시를 읽을 때면 어른의 책임감 따위는 잠시 잊고, 잠시 내려놓고
좀 덜 씩씩하게 살고 싶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가끔은 덜 씩씩하게 살아도 되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