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필사교'를 아십니까

시가 주는 마음의 위로와 계시 같은 문장들

by 주정현

작년 이맘때쯤 사람을 모으기 시작해서 어느새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시 필사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스무 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지며 함께 필사를 했고, 지금은 열다섯 명의 사람들이 모여 매일 한 편씩 시를 필사한다.




필사 모임을 운영하며 새로운 별명이 하나 생겼다. '교주님'. 재작년엔 독서모임을 운영하며 '영의정'이라는 별명을 새로 얻게 되었는데, 필사 모임에서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를 맡게 되었다. 우리는 그 사이비 종교를 '시 필사교'라고 부른다. (아, 저는 가톨릭 신자입니다만.) 그날그날 배달하는 시가 가끔 계시처럼 지금의 내 상황과 딱 맞아 들어간다고, 그렇게 힘든 내 마음에 내려와 위로를 준다며 멤버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필사 모임을 꾸준히 끌고 오면 어떤 영적인 기운이 생기는 거냐고, 어쩜 매번 이렇게 딱 들어맞는 시를 골라 전해주는 거냐고 감탄을 하면 나는 그저 민망하기만 하다. 내가 찾거나 고른 시도 아니고, 나는 그저 함께 하는 멤버들이 보내준 시를 카카오톡 채팅방에 옮겨 적어 '배달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떤 날에는 위로 같기도 하고, 계시 같기도 한 시가 누군가의 마음에 가서 닿는다. 당연하게도 내게는 아무런 영적인 기운이 없다. 아마 이것은 '시'의 속성, 시인의 마음이 풀어낸 한 편의 정결하고 청징한 언어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힘 덕분일 것이다.

'시 필사교' 간증의 현장.

가끔 멤버들의 간증(?)만 듣다가, 어제 드디어 내게도 시가 계시처럼 내려왔다. 내가 계시를 내리는 사람인데 내가 배달을 하는 사람인데 내게도 간증 기회가 왔다는 게 좀 웃긴 상황이기 때문에 필사 모임을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지 살짝 설명해보고자 한다. 보통 모임 초반에, 혹은 시작하기 전에 모든 멤버들에게 이번 모임에서 함께 나누고 싶은 시를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스무 편의 시가 모이면 하루 날을 잡아 한꺼번에 구글 드라이브에 저장해둔다. 몇 가지 기준에 따라 어느 날에 어떤 시를 배달할지 날짜별로 정렬하고, 해당 날짜마다 하나씩 카카오톡 단체방에 옮겨서 시를 전달한다. 시를 정렬하는 기준의 첫 번째는 '길이'이고(어제 손가락이 아플 만큼 길고 긴 산문시를 필사했으면 그다음 날은 좀 짧고 가벼운 하이쿠를.) 그다음에는 분위기나 계절감, 혹은 주제에 따라 서로 붙여놓기도, 떨어뜨려 놓기도 한다. 같은 시인의 시를 연달아 배달하며 한 시인의 세계에 흠뻑 빠져볼 때도 있고, 혹은 너무 비슷한 이야기만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떨어뜨려 배치할 때도 있다. 한국시와 외국시의 비율도 고려 대상이다.


이렇게 정리해서 써놓고 보니 뭔가 거창하고 대단한 작업인 듯 보이지만 결국엔 그냥 내 마음 가는 대로(혹은 영적 기운에 따라) 정렬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어떤 날, 어떤 시를 배달하기로 했는지 홀라당 까먹는다. 이 밑작업은 상당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저 오타만 조심하고, 가끔 연재본과 출판본의 시가 다른 경우가 있어 출처를 찾아보고 배열하는 '문서 작업'일 뿐, 이 과정에선 나도 시를 제대로 읽어보거나 감상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리고 매일 한국시간 자정에 알람이 울리면 구글 드라이브에 접속해서 오늘 날짜의 시를 꺼내 배달한다. 배달하면서 그제야 나도 시를 찬찬히 살피며 읽어본다. 한 글자 한 글자 필사하며 구절을 음미해본다. 나도 시를 내 마음에 담아보려고 노력한다.




어제는 몸도 마음도 힘든 날이었다. 몸이 힘든 이유는 요즘 유럽에서 대유행하고 있는 오미크론이 내 몸에 들어와 엊그제 선명한 두 줄의 양성반응과 몸살 기운으로 본인의 존재를 드러냈기 때문이고(아니 정말인지 내가 그렇게 유행에 민감한 사람도 아닌데, 굳이 다 체험해 보지 않아도 되는 건데 말이다...), 마음이 힘든 이유는 1월 초에 앞서 확진되었던 첫째와 그리고 덩달아 격리하게 된 다른 아이들까지, 온 가족이 길고 긴 자가격리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갑갑한 마음과 짜증을 서로에게 차곡차곡 쌓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겨울 방학은 하염없이 길어지게 되었고, 아무것도 계획하고 실행할 수 없는 상태로 새해를 시작하고 보니 어쩔 수 없이 몸과 마음이 힘들어 여러 가지로 일상이 엉켜버렸다. 막상 바이러스가 주는 영향력은 그저 감기 기운 정도로 미비한데, 17일이라는 길고 긴 격리기간과 그 과정에서 지쳐가는 마음이 문제였다.


뭔가 세상은 잘만 돌아가는데 나만 여기 멈춘 느낌, 갇힌 느낌, 소외되고 외롭고 힘들다는 그 마음이 문제였다. 개학을 했는데도 아이들이 학교에 나타나질 않으니 주변에서도 우리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하나둘씩 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나만 빼고 긴 겨울방학이 끝났다는 사실에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방학이 끝났고 아이들도 학교에 돌아갔으니 이제 다시 기지개를 켜보자고, 같이 점심을 먹자고, 만나자고, 모임 약속을 만들자는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거절의 이유를 대자니 우리 가족의 상황을 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신나서 연락했던 사람이 되려 미안해하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런데 그렇게 위로를 받는 게 썩 내키지는 않았다. 지금 내 일상에는 없는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는 그들에게 지금 나의 갑갑한 마음이 짐작이나 될까 싶기도 했고, 오히려 내 불행이 남들 입에 오르내릴까 봐 노심초사하는 마음도 있었기에 속으로는 차라리 아무도 나의 상황을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를 생각하고 기억해주며 만나자고 손을 내민 사람에게 이런 불편한 마음을 가지다니, 한편으로는 그런 나 자신이 참 못나 보여서 부끄럽기도 했다. 힘들다고 속상하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지도 못하는, 입을 꾹 다물며 괜찮다고 웃으며 말하는 이 어설픈 자존심이 나를 되려 더 힘들게 만들며 누군가의 진심 어린 위로에 제대로 감사할 줄도 모르는 내가 참 싫어지는 것이다.


이런 못난 마음들이 잔뜩 엉킨 실타래를 좀 풀어볼까 싶어서 다른 생각 말고, 다른 욕심부리지 말고 '오늘치의 행복'만 생각하자고 다짐했는데... 막상 결심만큼 마음이 쉽게 단단해지진 않았다. 초조한 마음에 다이어리에 이런저런 문장들을 마음 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끄적이다가 "하루하루 충실히 살면, 오늘 하루 진하게 살고 행복하게 보냈으면 그걸로 충분한 거 아닐까."라고 한 줄 적었다. 그때 필사 모임에 시를 배달할 시간이라고 알람이 울렸다. 기계적으로 구글 드라이브에 접속해서 오늘 날짜의 시를 꺼내는데, '계시처럼' 이 시를 만났다.



[어떤 결심]


이해인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을 안 하기로 했다

고요히 나 자신만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만치서 행복이

웃으며 걸어왔다



아...


이런 순간들이 있어 내가 교주 소리를 듣는 거였구나. 울컥하기도 하고 살짝 소름이 돋기도 하는 이 마음. 너무 적절한 순간에, 적당한 날에 이 시를 읽고 다시 마음을 추스를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한 구절 한 구절 나를 위로하고 내 일상을 보듬어 주는 것 같아서 고마운 마음으로 필사를 했다. 꼭 한순간씩만 살고, 꼭 하루씩만 살면서,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 고요히 나 자신만 들여다보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시를 만나기 전 다이어리에 초조하게 아무 단어나 휘갈길 때는 마음이 덜컹거리다 못해 삐그덕거리는 순간이었는데, 시를 옮겨적으며 문장을 차분히 들여다보니 뭔가 마음속에서 부서진 조각들이 무게감을 회복하고 하나씩 맞춰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마음의 조각들을 모아 꼭 한순간씩만 살고, 조금씩 시간을 보내고, 그 시간들이 모여 또 하루를 보내고, 그렇게 또 하루씩 버티다 보면 힘들었던 시간은 훌쩍 지나가 있을 거라는 걸, 그게 오늘을 잘 '살아내는' 일이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지금의 무사와 안녕을 기원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시를 읊었다. 몇 주 전 내게 이 시를 보내준 사람에게, 오히려 그녀에게 있었던 그 어떤 영적인 기운에게, 혹은 이 시를 쓰는 순간의 시인의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지치고 못나고 초조했던 마음이 시를 옮겨적으며 다른 빛깔을 띄게 되었다. 이 순간에 이 시를 만나서 참 다행이었다.




필사 모임이고 취미 모임이고 문학모임일 뿐인데 왜 다른 멤버들이 우리 모임을 자꾸 '종교'처럼 부르는지 비로소 알게 된 순간이었다. 계시를 받아버린 교주의 간증이랄까. 필사 모임을 오래 지속하면서 이런 순간들을 체험한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다 보니 '시 필사교'는 점점 그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 새로운 신도들이 포섭되는, 다정하고 따뜻한 위로의 순간을 꿈꾸며 오늘도 시를 필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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