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에 만드는 고운 흙은 고령토라고 부르는 백토 광산에서 얻는다. 그릇을 만드는 흙을 물에 풀어 휘저어 철분과 불순물을 가라앉히고 앙금만 걷어서 쓴다. 불순물을 걷어내고 눈처럼 보슬보슬한 흰 흙을 얻는 과정을 '수비水飛'라고 한다. 나를 붙잡는 불편한 것들에게 그만 안녕을 고하고 물속에서 날아오른다니, 처음 수비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그 자유롭게 예쁜 어감에 반했다. (중략) 곱게 수비한 흙은 백설기처럼 포근포근했고, 투명한 유약을 발라 굽자 은은하게 반짝였다. 벼루에 물을 따르고 먹을 갈 때 마음에 머무는 느낌이 좋아 자꾸 먹을 갈고 글을 쓰게 됐을까? 흰 종이를 두고 무슨 말로 시작할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을 연적의 주인을 상상해 본다.
_정명희, <멈춰서서 가만히> (어크로스, 2022)
열흘 동안의 여름휴가를 앞두고 새 노트를 가방에 챙겼다. 하얀 속지가 반짝거리는 새 노트지만 나이는 제법 많다. 이 노트를 강남 교보문고에서 구매한 게 결혼하기 전의 일이었으니 내 것이 된 지 적어도 10년은 훌쩍 지난 셈이다. 표지가 천으로 되어 있어서 질감도 부드럽고 책끈이 내장되어 있는 양장제본 노트지만 표지에 적혀있는 가격은 겨우 6000원. 새삼 착하디 착했던 10년 전 물가를 뒷면에 새긴 채 하얗고 깨끗한 빈 노트의 상태로 오랫동안 책장 속에 잠들어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야 비로소 노트로서의 본연의 역할을 부여받고 내 가방에 담긴 이 아이는 사실 '땜빵'이다. 내가 지난 몇 달간 일기장으로 쓰던 노트(남편이 영국 출장에서 사다준 A6 노트)가 최근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여행 직전까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간 여기저기 휴대하고 다녔는데 아마 어느 가방 구석엔가 잠들어있는 모양이다. 한참 지나 또 어디에서 발견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일단 여행지에서 글을 쓰려면 노트는 필수이니 꿩 대신 닭 격으로 이 노트를 담게 되었다. '닭'이라고 부르기에는 이전에 쓰던 노트보다 더 반짝거리고 은은한 광택이 도는 것이 더 고급스러운 자태를 지니고 있어서 '공작새'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지만.
하얗고 매끄러운 노트의 첫 페이지를 연다. 새 노트는 마치 한 번도 읽힌 적 없는 새 책처럼 쩍 소리를 내며 열린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잠만 자고 있던 노트가 하품소리를 내며 일어나는 것 같았다. 책장 속에 오래 잠들어 있는 노트는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을까.
하얗고 매끄러운 빈 종이를 앞에 두면, 그야말로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백지를 눈앞에 두면 무언가 대단하고 그럴싸한 것으로 이 공간을 채우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깨끗한 새 노트의 첫 페이지를 앞에 두면 무슨 글을 적을까 다른 때보다 더 고민하게 된다. 가장 처음은 무슨 말을 쓰지. 아, 일단 글을 쓰는 날짜부터 써야 할 텐데 일월년 순서로 쓸까, 연월일 순서로 쓸까. 글은 한글로 쓰더라도 날짜는 있어 보이게 영어로 쓸까? 아니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따라 폴란드어로 쓰면 어떨까. 일단 날짜를 처음 한 번 적고 나면 같은 노트 안에서는 하나의 스타일을 고수하고 싶기 때문에 오늘의 첫 결정에 신중해지게 된다. 이런 신중함, 주저함, 혹은 망설임 따위가 새롭고 깨끗한 노트에는 글자 하나 새로 쓰는 걸 어렵게 만들어서, 특히 지금 쓰고 있는 고급 노트와 같은 공간에는 조금 더 그럴싸하고 대단한 것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깨끗한 빈 종이를 아껴두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단한 것 혹은 훌륭한 것이 그렇게 쉽게 생겨날 리가 없다. 이 노트가 내 것이 된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그 사이에 이곳에 적고 싶은 아주 그럴싸한, 대단한 무언가는 생기지 않았다. 아니, 그동안 글을 쓰면서 때때로 꽤 괜찮고 좋은 글이 내 속에서 흘러나온 적도 있었겠지만 그때마다 내 곁에 백설기처럼 뽀얗고 흰 노트가 있었던 건 아니었겠지. 무엇보다 노트에 그런 것만 쏙쏙 골라 담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박연준 시인은 '대단한 것, 훌륭한 것을 써보자.'라고 마음먹으면 늘 실패하는 법이라고, 대단하고 훌륭한 것은 작정을 하고 다가가는 자로부터 도망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동기나 목적 없이 자유롭게 끼적일 때 쓸 만한 게 나오는 법이니 무엇이고 아무렇게나 쓱쓱, 느린 빗자루처럼 시를 적어보라고 이야기한다. 무언가 훌륭하고 대단한 생각이 노트에 적혀 있으면 좋겠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을 욕심내다가는 노트에마저 아무것도 쓰지 못할 수 있다. 그저 내 마음과 생각을 한두 개쯤 단어와 문장으로 바꾸어 적어 내려가다 보면 무언가 글 비슷한 게 나오긴 한다. 허접쓰레기 같은 글이라도 거기서 무언가 한두 문장쯤 더 더해주고 생각을 다듬다 보면 남들이 시간 내서 읽어줄 만한 짧은 글이 나온다. (읽어줄 만하다는 생각은 나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하얗고 매끄럽던 흰 노트에 이렇게 첫 번째 글이 쓰였다. 이제 뒷장을 넘겨 앞 페이지에서 쓰던 글이 만들어낸 볼펜 눌림 자국 위에 글을 쓴다. 하얀 노트가, 빈 종이가 주는 깨끗하고 뽀얀 설렘은 노트에 글이 쌓여갈수록 줄어들겠지만 꾸준히 이 공간에 기록이 채워졌을 때 느껴지는 뿌듯함은 이 노트가 주는 또 다른 감정이 될 것이다. 그 시간의 흔적이 가지런히 남아있는 노트를 만들고 싶다.
오랫동안 고요히 잠들어있던 만큼, 내 속에 담긴 많은 걸 꺼내가 주길. 오래전에 만났지만 이제야 내 마음을 담아주기 시작한 노트야, 앞으로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