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글을 씁니다

by 주정현


일단 오늘도 쓴다. 잘 보이지 않고 잊히기 쉬운 작고 희미한 것들을 통에 담는 마음으로.
김혼비, <다정소감>


줄 노트에 손글씨로 기록을 한다. 조잘조잘 아무 말이나 쓰다 보면 노트 한 페이지가 금세 채워진다.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뭐든지 시시콜콜하게 쓰는 노트, 막 쓰는 '아무 말 대잔치'를 매일매일 반복한다.


작년 이맘때쯤,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를 시작하면서 그 일환으로 매일 3페이지씩 모닝 페이지를 쓰기 시작했다. 모닝 페이지가 아니라 애프터눈 페이지, 이브닝 페이지가 될 때도 있고, 3페이지의 분량을 빼곡히 못 채우거나 한두 줄밖에 못 썼는데 아이들에게 소환되어 거기서 기록이 뚝 끊길 때도 있다. 그래도 360일 중에 340일쯤은 매일 꾸준히 썼다. 어느새 지난 1년 동안 300페이지짜리 두툼한 노트 두 권을 빼곡히 채웠다.


막 쓴 글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줄 요량으로 쓴 글이 아니라서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썼다. 내용도, 형식도, 주제도 이상하지만 노트에 쓰인 글은 어떤 검열도 없이 내 속마음을 온전하게 드러낸 솔직한 글이다. 나를 조금이라도 껄끄럽고 불편하게 했던 사건들, 소심하고 찌질 해 보일까 봐 아무에게도 고백하지 못한 마음, 미운 감정, 속상한 일들, 투덜거림과 짜증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모두 노트에 담겼다. 그 무엇이든 써도 된다. 헛소리도 좋고, 꿈 이야기도 좋고, 그냥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기록될 수 있다. 그리고 어디서든 멈춰도 된다. 꼭 마침표를 찍지 않아도 된다. 나를 힘들게 했던 모든 사람들의 이름도 실명으로 가감 없이 기록되었지만 괜찮다. 누군가에게 보여줄 글이 아니니까.


오랫동안 온라인 공간에 글을 썼다. 청소년기에 다음 카페와 프리챌 커뮤니티를 거쳐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까지는 싸이월드 다이어리에 글을 썼고, 20대 중반에는 네이버 블로그를 시작했다. 가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긴 글을 올렸고 3년 전부터는 이렇게 브런치에도 글을 쓴다. 몇몇 글은 지금까지도 서버에 남아서 내 흑역사를 증명하는 생생한 유물이 되었고, 또 어떤 글은 그 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보물이 되기도 했다.


글은 쓰는 순간까지는 쓴 사람의 것이지만 내 손을 떠나는 순간 읽는 사람의 것이 된다. 비공개 글이 아닌 이상 그 모든 글들은 어딘가에 단 한 명이라도 독자가 있었고 조회수 1은 그게 더 이상 나만의 비밀이 아니게 되었다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어떤 글은 읽는 사람의 감정, 성격, 혹은 이야기를 읽어내는 능력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읽히기도 하는데, 몇몇 글은 내가 쓴 대로 온전히 읽히지 않고 약간의 오해와 불필요한 다툼을 낳았다. 그런 경험이 축적되다 보니 공개된 공간에 글을 쓰는 게 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공개되는 글에는 아무 말이나 막 쓸 수 없었다.


노트에 쓰인 글의 독자는 오로지 나 하나밖에 없다. 내가 쓴 글은 내가 읽는 것이기 때문에 다르게 읽힐 수가 없다. 아니, 오히려 다르게 읽힌다면 반가운 일이다. 쓸 때는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를 기록 속에서 다시 발견한다는 것이니까.


신기한 건 이렇게 의미 없는 듯 의미 있을 것 같은 기록을 반복하다 보면 '쓰는 행위의 쾌감'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읽길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쓴 것도 아니었고, 그저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들을 조각조각 모아다가 노트에 옮겨놓은 것뿐인데 어쨌거나 노트 3페이지를 채워놓고 나면 '오늘의 할 일을 다 했다'는 뿌듯함과 함께 쓸데없는 고민과 걱정들이 텅 비워지는 개운한 마음이 든다. 쓰다 보니 어느새 글쓰기의 치유의 힘을 믿게 되었다. 물론 키보드로 글을 쓸 때도 비슷한 감정이 들기도 했지만 노트에 손글씨로 글을 쓸 때 그 효과가 더 좋았다. 흰 종이를 검게 채웠을 때 눈앞의 빼곡한 풍경에 따라 마음이 함께 채워지는 느낌도 좋고, 필압 때문에 울퉁불퉁해진 종이 위를 손 끝으로 쓰다듬을 때의 물리적인 감각도 좋다. 좀 더 정리된 형태로 완성하고 구체화해야 하는 온라인상의 문서 작업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해방감도 있다. 어느새 손으로 글을 쓰는 행위에 푹 빠져버렸다.


생각의 흐름에 따라 자유롭게 글을 쓰다 보면, 내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이 나로 하여금 쓰게 만드는 순간이 온다. 그냥 예전부터 내 속에 있었던 것인데 그동안 미처 내가 알 수 없었던 깊이 숨어 있던 이야기들. 그게 어느 순간 슬그머니 펜촉을 타고 노트 위로 옮겨와서 글과 문장이 되어 나를 바라본다. 컴퓨터 타자로 글을 쓸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자유로움이 여기에 있다. 일상생활을 하다가 쓰고 싶은 글감이 생각나면 일단 노트 맨 윗줄에 첫 문장을 적어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전날 써놨던 첫 문장에서부터 일단 시작하고 본다. 생각이 그동안 내 머릿속 어딘가에서 숙성이 된 적도 있고, 어제의 날것 그대로인 적도 있고, 혹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를 끌어당기며 글이 완성될 때도 있다. 그 자유로움을 사랑한다.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 무조건 3페이지씩 글을 '채우고' 하루를 시작한다. 대단한 걸 써내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노트를 펼치는 게 아니라 그냥 매일 아침에 우물에서 물을 퍼다 나르는 것처럼 그냥 지금 머릿속에 있는 것을 글씨로 옮겨놓는 것 뿐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에스프레소 샷을 내려 커피 향기를 거실에 채우고, 가끔 커피를 홀짝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딴짓을 하지 않고 일단 3페이지를 채운다. 새벽에 일어나 머리가 가장 맑을 때 가장 맑은 글이 나온다. 욕심 없이 일단 노트를 채우고 나면, 일단 오늘의 나는 '작가'로서 해야 할 일을 다 끝낸 셈이다. 작가는 매일 쓰는 사람이고, 나는 오늘도 글을 썼으니까.


이렇게 노트에 쓰인 글은 가끔 공개될 글의 초고가 되기도 한다. 쓰레기일지언정 나는 초고를 썼고, 이 글에 재활용될 여지가 있다면 이제 이 노트의 단어와 문장은 컴퓨터의 활자로 옮겨갈 것이다. 조금 더 정돈되고 다듬어져 새로운 독자를 기다릴 것이다.


지금 이 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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