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를 아시는지? '나를 위한 12주간의 창조성 워크숍'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이 책은 창조적인 영감을 강구해왔던 수많은 예술가들로부터 간증 후기가 쏟아지는 일종의 실전 지침서이다. 창조성은 이미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 모두는 예술가로서의 본성을 지니고 태어났다. 이렇게 주장하는 저자는,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아티스트 자아를 만나기 위해 "일단 이 책에 쓰인 그대로 12주만 따라 해 보시라."라고 유혹한다. 어쩌다 보니 그 유혹에 넘어가, 새해를 기점으로 12주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혹여 내 안에 잠들어있는 예술가의 본성이 깨어난다면 쓰고 싶은 글이 펑펑 쏟아질까 싶어서. 소설책 한 권쯤은 뚝딱 써내지 않을까 싶어서. 아직 그런 기적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느새 내일이면 7주 차 과제를 끝내고 8주 차 미션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 아티스트 웨이 4주 차에는 "글 읽기를 중단하라"는 미션이 있다. 읽지 말라고? 그렇다. 읽어서는 안 된다(62쪽). 일주일 동안 독서를 중단하라는 이 단호한 미션에 가장 먼저 '반감'이라는 감정이 불쑥 올라왔다. 책을 읽지 말라고? 그것도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독서 중독자에게 책을 읽지 말라는 것은 개그맨 김준현에게 밥을 먹지 말라는 미션과 똑같은 것이다. 대체 이 황당한 미션이 왜 나왔는지 저자의 주장을 잠시 살펴보자.
읽기를 중단하고 내면의 침묵으로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공간을 새로운 언어로 채우기 시작한다. 쓸데없는 긴 잡담에 시간을 뺏기고, 떠들썩한 텔레비전과 수다스러운 라디오를 늘 곁에 두고 있는 한, 내면에서 나오는 창조적인 영감의 소리를 결코 들을 수 없다. 독서를 중단하는 동안 그런 오염물질들을 유심히 지켜보라. 그것들이 내면에 있는 창조의 샘을 얼마나 더럽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염물질들의 유입을 주시하면서 최소화하면, 읽기를 중단하는 행동으로 엄청난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제는 새로운 유출이 시작된다. 자신만의 예술, 자신만의 사고와 감정이 그동안 우리를 가로막고 있던 찌꺼기를 밖으로 몰아내고 창조성의 샘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할 것이다. (62쪽)
.... 읽어보니 그럴싸하다. 왠지 일주일 동안 독서를 딱, 중단하면 남이 쓴 글이 텅텅 비어진 해맑은 머릿속에 내가 쓴 글이 살포시 들어올지도 모르겠다. 고작 일주일인데 밑져야 본전. 그렇게 1월 마지막 주, 나는 '독서금지주간'을 설정하고 책을 전혀 읽지 않는 일주일을 마주했다. 매일, 단 한 페이지라도 책을 읽어온 지 5년 만에 처음으로 맞이하는 '비독서주간'이었다.
오염물질을 최소화한다는 것은, 책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쓴 텍스트를 전혀 읽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신문도, 이메일도, 그리고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넘쳐나는 '남이 써 놓은 글'도. 그러나 학교 가정통신문처럼 나와 가족들의 일상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인 글 마저 안 읽을 수는 없으니 아주 최소한으로 필요한 텍스트는 읽어야 할 터였다. 생업(?)과 관련된 이슈를 고민하다가, 생각해보니 해외에 사는 입장이라 모든 필수적인 서류들은 모두 영어 아니면 폴란드어로 이루어져 있으니 '한글을 읽지 말자'로 약간 타깃을 수정했다. 습관적으로 네이버나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 어플을 실행할까 봐, 핸드폰 배경화면에서 브런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각종 포털사이트의 바로가기 아이콘을 삭제해버렸다. 뜻하던 바는 아니었는데 디지털 디톡스가 함께 이루어졌다.
그러면 그동안 책을 읽는 시간은 무엇으로 채워졌는가. 내 경우는 청소, 바느질, 베이킹, 운동, 그리고 그림그리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책이 너무 읽고 싶드아아아아'를 외치며 책장을 째려보는 시간이 나머지를 채웠다. 속절없이 책등만 째려보며, 이번 주가 지나면 당장 펼쳐 들고 싶은 책을 하나하나 노려보았다. 이석원 작가의 <2인조>도 읽고 싶고, 한정원 작가의 <시와 산책>도 읽고 싶고, 캐럴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도 읽고 싶었다. 베이킹을 하면서 백수린 작가의 <다정한 매일매일>을 읽고 싶었고, 글쓰기 수업을 준비하며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 싶었고, 청소를 하면서 곤도 마리에의 <정리의 기술>을 읽고 싶었다. 아, 한 가지 예외가 있었는데 잠자기 전에 아이들에게 딱 한 권씩 그림책을 읽어주는 시간은 그냥 그대로 유지했다. 나의 독서금지주간으로 인해 아이들의 책 읽는 즐거움마저 뺏을 수는 없었다. 그 덕분에 매일 밤에는 한 글자, 한 글자 아이들의 그림책을 손으로 짚어가며 글을 낭독하는데 실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그림책을 읽으니 무루 작가의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도 읽고 싶었다. 나는 독서 금지 금단 증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마다 속절없이 바닥만 벅벅 긁었다. 워낙 평소에 책을 좋아하는지라 스스로를 '활자 중독자' 혹은 '독서 중독자'라고 우스갯소리로 불렀는데, 정말 독서를 중독하니 금단 현상에 시달렸다. 금단 증상이 있다는 것은, 중독 현상이 맞았다는 이야기다. 독서금지주간 5일째 되던 날, 참지 못하고 <디즈니만이 하는 것>을 펼쳐 들어 5페이지쯤 읽었다. 한국어만 금지했으니 영어책은 괜찮은 거 아닐까 하며 <Flowers for Algernon>도 조금 읽었다.(행동심리학에서는 이런 행동을 아마 '소거 격발'이라 부른다지?) 그러고 나니 좀 살 것 같았는데, 곧이어 결심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사실 고백하건대 인스타그램도 하루에 한 번씩은 슬그머니 열어보며 빠르게 사진만(그러다 엉겁결에 텍스트도 같이) 눈으로 훑었다. 독서 금지 주간의 마지막 일요일! 나는 올레를 외치며 당당하게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늘 그랬던, 하루에 단 한 페이지라도 책을 읽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지난 5년 간 매일 유지했던 그 일상으로.
그런데 정말 신기했던 일은, 그 다음 주에 일어났다. 매일 책을 읽긴 읽었는데 많이, 오래 읽을 수가 없었다. 정말 딱 한 페이지만 읽고 책을 덮었다.
한 페이지가 넘어가자 책을 더 이상 읽기 힘들어 손에서 책을 내려놓는 일이 잦아졌다. 처음에는 그런 내 행동을 의식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문득 "요즘은 책 읽는 게 영 진도가 안 나가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독서기록을 살펴보니 맙소사. 마지막으로 책을 완독 한 게 무려 보름 전의 일이었다. 한 주는 독서금지기간이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렇다면 그 다음 주에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보통 이삼일이면 가벼운 에세이 책 한 권을 다 완독 하는 나였는데, 지난 일주일 동안 읽어본 페이지를 세어보니 50페이지가 채 되지 않았다. 어렵거나 읽기 힘들었던 책이었냐고? 그때 내가 읽고 있던 책은 디즈니의 전 CEO인 로버트 아이거의 <디즈니만이 하는 것>이었다. 자서전 형태로 쓰인 술술 읽히는 에세이로 , 누군가는 책이 너무 중독적이어서 하루 만에 홀랑 다 읽어버렸다는 후기를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왜 이 책을 일주일 넘게 붙들고 있어도 절반도 못 읽고 있는 거지? 어쩌면 일주일만의 나의 '읽는 뇌'가 홀랑 사라져 버린 건 아닐까?
일주일 간의 독서금지주간을 경험하고 나자 나에게는 두 가지 깨달음이 남았다.
첫째, 내게 독서는 중독이었다.
둘째,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다시 읽는 사람이 변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책을 읽어보려 하는데 영 손에 잡히질 않아요. 어떻게 그렇게 책을 많이 읽으세요?라는 질문은 지난 몇 년간 내가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었다. 사실 아이들이랑 독서토론 수업을 하면서도 학생들에게 "왜 책을 읽지 않는 거야?"라고 진지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적이 있다. 내가 책을 집어 드는 시간이 대다수의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시간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다르게 살아보니 다른 사람들의 삶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의도적으로 그 시간을 책으로 채우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주먹에 움켜쥔 모래알처럼 스르르 빠져나가는 시간이 바로 독서시간이었다. 잃어버린 습관을 다시 내 것으로 만드는 데 무려 보름이나 더 걸렸고, 조급한 마음과는 다르게 아주 서서히, 매일 조금씩 책이 다시 내 일상으로 들어왔다. 독서금지주간의 후유증으로, 일 년에 150여 권의 책을 읽는 독서가가 3주 만에 겨우 책 한 권을 읽어낼 수 있었다. 새로 태어나는 기분 혹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텅 비어있던 그 시간 동안 아쉽게도 창조성의 샘은 흐르지 않았다. 혹은 어느 우물에 이미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는데 내가 그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 나는 왜 읽는가"라는 질문에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처음에 왜 책을 읽기 시작했지? 나는 왜 치열하게 읽지? 읽어서 무엇을 얻고자 하지? 이대로 '읽는 삶'을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둔다면 나는 어떤 종착지에 다다르는 거지? 이런 질문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책 대신 이런 사색으로 일상이 채워진다면 그거야말로 진짜 해볼 만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책을 너무 맹목적으로 읽어오고 있었다. 올해 적어도 두 번 정도는 더 독서금지주간을 경험해 볼 생각이다. 채우기 이전에 비우기부터. 그리고 비워진 공간에 다시 조심스럽고 천천히 밑바닥부터 채우는 일. 비단 책 읽기에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닐 것이다.
내 일상을 빼곡히 채우고 있던 '중독적인 그것'을 덜어낸다면, 당신은 무엇을 비우고 싶은가? 스마트폰? 달고 기름진 음식? 혹은 소모적인 인간관계? 무엇이 되었든 딱 일주일만 멈춰보길 추천한다. 그 이후에 무엇이 채워지든지, 어떤 후유증이 생기든지 간에, 거기서부터 진짜 재미가 시작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