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글자에 집착하지 마세요

by 주정현


외국의 한 서점에 방문했다고 생각해보자.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도통 감도 안 오는 서점 간판을 지나, 모르는 문자가 가득한 낯선 이국의 서점에 왔다. 서점 간판도 못 읽는데, 하물며 서점에 있는 책 제목을 읽을 수 있을 리가. 그렇지만 글자를 몰라도 책을 좋아할 순 있으니까, 서점에 왔다.


폴란드어로 '서점'은 'księgarnia'라고 씁니다. 어떻게 읽을까요...? ㅋㅋ


읽을 수 없는 글씨, 낯선 문자들의 향연. 저 책을 펼치면 저 안에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세계가 담겨 있다는 걸 알지만 나 혼자만의 역량으로는 그 이야기를 읽을 수 없다. 오직 내가 알 수 있는 건 책을 손에 꽉 잡았을 때의 감각, 질감, 무게 이런 느낌들, 그리고 책의 군데군데 실려있는 그림뿐이다. 그렇다, 글자는 모르지만 그림이 있다. 하얀 종이 위에 검은 글씨들만 빼곡하게 담긴 책은 무용하니 그냥 지나치고 그림책 코너로 간다. 그리고 직관적으로, 예쁘고 마음에 드는 그림책을 골라 한 장 한 장 그림을 넘겨 본다.


본의 아니게 폴란드에서 폴란드어 까막눈으로 살다 보니 내가 자주 하는 짓이다. 한국어 책을 구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고 늘 새로운 책에 목마르니, 아쉬운 대로 현지 서점에 가서 자꾸 책을 산다. 지난주엔 우연히 가족끼리 주말 나들이를 갔다가 대규모 책 박람회가 열린 걸 보고 좋아서 눈이 돌아갔다. 그러나 폴란드어를 모르기 때문에 저자 강연회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있는 걸 보고 대체 무슨 책을 쓴 작가일지, 저 작가가 하고 있는 이야기는 어떤 것일지, 대체 누구길래 사람들이 저리도 많이 모여 열심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너무 궁금했지만 그 세계에 합류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나마 쉽고, 단순하고, 어려운 단어가 없는 아동서적 코너로 간다. 직관적으로 그림만 보고 책을 고른다. 그리고 그 안의 세계를 마음껏 상상한다.



폴란드어라는 장벽에 막혀 내가 어쩔 수 없이 갖게 된 이 독서 패턴.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 집 막내의 독서 패턴도 나와 다르지 않다. 글자를 깨우치기 이전의 영유아기 아이들의 독서는 모두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다섯 살 막내는 아직 글자를 읽을 줄 모른다. 엄마가 책을 소리 내어 읽어주면 이야기를 파악할 수 있지만, 그전까지는 오직 그림에만 의존에서 책을 '상상'해야 한다. 글자가 의미를 간직한 체계라는 걸 아직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냥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일 뿐, 책을 펼치면 글자는 무시하고 그림부터 먼저 살펴본다. 가끔 받침이 없는 단순한 단모음 글자나, 내 이름에 들어간 것과 똑같은 글자, 혹은 숫자나 물음표 같은 기호들이 마치 암호처럼 내게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림에는 그림 나름대로의 이야기가 있다. 아주 소소한 힌트들도 속속들이 숨겨져 있다. 그 작은 힌트들을 조합해서 이야기를 상상해보다가 나중에 엄마가 책을 읽어주면 깜짝 놀란다. 이게 이런 이야기였어?


우리 집에는 책이 많았다. 물론 글자를 읽지 못했던 나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난 숫자는 읽을 수 있으니깐' 책 속의 그림과 숫자만을 보면서 내용을 상상하며 읽었다. 그러고 나서 엄마와 아빠가 읽어줄 때 내가 생각했던 내용과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도 정말 즐거웠다. 그리고 즐거워하는 내 모습을 보는 엄마와 아빠의 얼굴엔 늘 환한 미소가 함께했다.

이임숙, <4~7세보다 중요한 시기는 없습니다> 추천 서문 중에서


아이가 내용에는 관심 없고 그림만 보려고 하면?


아이들이 막 글자를 깨우칠 무렵 함께 산책을 하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아이는 길을 걸으며 하늘이나 풀, 나무나 꽃 따위는 전혀 보지 않고 계속 길가의 간판만 읽어댄다. 올림픽대로, 진입 금지, 부동산, 전세, 월세, 맥주 4캔에 만원... 이런 것들을 쉬지 않고 읽어대며 내가 늘 걸어 다니던 길이 이렇게까지 문자로 가득했다는 것에 새삼 놀란다. 한번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면, 그래서 이미 문자가 해독 가능한 나이가 되면 그 뒤로는 자연스럽게 혹은 어쩔 수 없이 글씨에만 눈길이 간다.


그림책도 마찬가지다. 글자를 알기 이전의 책과 글자를 알게 된 이후의 책은 다르게 다가온다. 예전에는 책장을 펼치면 항상 그림부터 시선이 갔는데, 이제는 글자에 먼저 시선이 가게 된다. 마지막 줄까지 글자를 다 읽고 나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바로 책장을 넘긴다. 그림이 눈에 들어올 새가 없다.


그래서 만약 아이가 책 내용에는 관심 없고 그림만 보려고 하면 나는 오히려 더 좋은 일이라고 칭찬하며 적극 추천하고 싶다. 그림에 관심을 가질 때에만 즐길 수 있는 독서의 매력이 있다. 이미 글자를 알아버리면, 그래서 문자화 된 내용에 생각이 갇히고 나면 더 이상 상상의 가지가 뻗어나가질 않는다. 책 속의 그림 한 장만으로도 아이들과 나눌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책 속의 글자에 집착하지 말기를. 그림만 봐도 훌륭한 독서가 된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시기는 생각보다 아주 짧다. 일부러 그 시기를 단축시키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를 권한다.


게다가 그림책은 이미 그 자체로 훌륭한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따로 미술관 갈 거 없이 그림책의 그림만 세세하게 살펴봐도 그림을 감상하는 훌륭한 안목을 키울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요즘은 그림책의 원화를 가지고 기획 전시를 하는 미술관도 많아졌다. 그림책과 미술작품의 경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지난 7월엔 아이들과 김중석 작가님의 그림책 '나오니까 좋다'의 원화를 전시한 <그리니까 좋다> 전시회를 다녀왔다. 그림책에 실린 삽화와 다르게 글자가 없이 액자 속에 전시된 원화만 먼저 보자, 아이들은 자기 나름대로 이야기를 상상하기를 즐겼다. 전시실을 먼저 주욱 둘러본 후 책장에 꽂힌 작가의 그림책을 읽어주자 아이들은 작가의 미술작품만큼이나 작가의 그림책을 좋아했고, 그림책을 보며 자신이 상상했던 이야기와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차이를 즐겼다. 그리고 그 차이나는 상상 속 이야기가 또 아이들의 마음을 자극했는지, 자신만의 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글자를 모르지만 책을 좋아하는 아이


이렇듯 글자를 모르는 시절의 독서, 즉 영유아기의 독서는 학령기 독서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시기 독서 교육의 목표는 단 하나, '책과 친해지기'다. 고로, 아이가 친해지기 쉬운 책, 아이 눈에 매력적으로 보일 만한 책을 많이 읽어줄수록 아이를 책의 세계로 유혹하기 좋다. 그림이 예쁘거나, 이곳저곳 탐색할 만한 것이 많은 플립북이나, 좋아하는 캐릭터가 나오는 책을 많이 읽어주길 권한다. 아이가 책과 친해지길 바라고, 아이에게 책이라는 물건의 재미를 알려주려면 아이 시선에 맞춰서 아이가 좋아할 만한 책을 골라야 한다.


그러나 아이가 대여섯 살만 되어도 많은 엄마들이 책의 그림이 아닌 글자에 더 많이 신경을 쓴다. 어휘라든지, 글밥이라든지, 혹은 책에 수학, 과학 등의 배경지식이 담겨 있는지 등등을 따지기 시작한다. 책을 '놀이' 도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학습' 도구로 본다. 책 속에 있는 유익한 내용들을 아이에게 알려주려고 혈안이 되며 아이가 책을 통해 과학 지식 같은 것을 배우기라도 하면 굉장히 흐뭇해한다.


하지만 그런 책이 아이들에게 정말 재미있을까? 물론 그림도 예쁘고 내용도 알찬 좋은 그림책들도 얼마든지 많지만 책을 고르는 기준이 '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책 육아는 국어 공부가 아니다. 거듭거듭 강조하지만 아이가 책을 읽는 행위를 재밌고 즐겁게 느끼는 게 최우선 과제다. 그러니 어린 시절 책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아무리 유익한 내용이 가득하더라도, 백과사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최고의 지식이 담겨 있다 하더라도 그 내용에 욕심내지 말아야 한다. 책 속의 아름답고, 앙증맞고, 흥미로운 그림을 더 눈여겨보자. 아이의 마음을 끌 수 있는 그림이 화려하고 예쁜 책들로 아이를 유혹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혹은 아이가 친구처럼 여길 수 있는 캐릭터가 연달아 나오는 책도 추천한다. 아이가 특별히 좋아하는 동물이나 유난히 관심이 꽂혀 있는 물건이 있다면 그런 그림책부터 아이에게 선물해보자. 공룡, 자동차, 비행기, 물고기... 의외로 이런 작은 테마에도 무궁무진하게 많은 그림책들이 있다.


동상이몽. 책을 읽는 아이와, 책을 보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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