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누나 지금 책 읽고 있다고!
엄마는 하나, 아이는 셋
나는 네 살, 두 살 터울로 세 아이를 키우고 있다. 아이가 둘 이상만 돼도 외동아이를 키울 때보다 곱절은 힘들어지는 것 같다. 그러니까 세 아이는 세제곱(두둥). 뒤돌아서면 늘어나 있는 빨래 더미처럼, 키우는 아이들 숫자가 늘어날수록 내가 해야 할 역할이 부담스럽게 늘어났다.
아이들이 어릴수록 더 힘들었다. 막내가 다섯 살인 지금은 그냥 큰 어린이, 덜 큰 어린이, 작은 어린이... 같은 느낌이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어린이(child), 유아(toddler), 아기(baby)로 서로의 발달 수준이 지나치게 달라서 세 아이에게 각각 다른 양육방식을 적용해야 했다. 식사 시간이면 일반식, 유아식, 이유식(플러스 모유와 분유) 다 따로 차려야 해서 남들의 서너 배는 힘들었던 밥상차림처럼 말이다. 독서 교육도 마찬가지였는데 아이들의 발달 단계가 다 다른만큼 세 아이가 각각 필요로 했던 책도 다 달랐다.
문제는 아이는 셋이지만, 엄마의 몸뚱이는 단 하나라는 것이다.
작은 아이가 자꾸 방해를 해서 힘들어요
4년 전으로 시계태엽을 감아보자. 큰애는 이제 겨우 일곱 살. 막 문자를 깨치기 시작했고, 쉬운 그림책은 혼자서 읽을 줄 아는 나이였다. 그맘때 큰애의 요구는 '나 혼자 읽기 어려운, 글밥이 많고 스토리가 복잡한 책을 엄마가 찬찬히 설명하며 읽어주는 것'이었다. 이미 서너 살 때부터 지겹게 반복해서 봤던, 간단하고 짧고 단순한 대화가 반복되는 그림책은 시시하고 재미가 없었다. 이제는 조금 더 다양한 갈등이 등장하고, 복잡한 플롯을 가진 꽤 수준 높은 이야기책을 읽기 원했는데, 예를 들자면 '마법의 시간여행'이나 '말괄량이 삐삐'같은 책들이 그런 것이었다.
반면, 둘째는 세 살. 슬슬 고집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참 말 안 듣고 미운 짓도 많이 하지만, 그만큼 자신만의 세계가 커져가던 시기다. 이제 막 그림책의 세계에 입문한 둘째는 언니가 재미있어하는 책은 본인에게 너무 어렵고 무서웠고, 되려 언니가 재미없어하는 바로 그 책들이 제일 재미있었다. 곰곰이, 아치, 추피, 이런 귀여운 캐릭터 주인공들이 나오며 갈등 없이 순하게 흘러가는 책들을 좋아했고, 책이 가볍고 짧은 만큼 많은 양을 읽어주길 바랬다.
그렇다면 막 기어 다니기 시작한 막내는? 누나들이 들고 있는 책을 열심히 먹고, 찢고, 빼앗고, 내동댕이 치며 있는 대로 훼방 놓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설마 그게 목적이었을까 싶긴 하지만, 어쨌거나 겉으로 드러난 행동은 그랬다.
막내가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 새로운 지옥문이 열린다. 게다가 잡고 일어서기 시작하면.... (이하 생략) 이맘때 나는 시간차 공략을 했다. 다행히 세 아이의 스케줄이 비슷한 듯 보여도 저마다 달랐다. 작은 아이가 방해할 수 없는 시간은 곧 책 읽는 시간으로 굳어졌다. 일단 막내는 어릴수록 틈틈이 낮잠을 자기 때문에 막내가 낮잠을 자는 시간은 우선적으로 누나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시간이 되었다. 하루 중 언제고 틈만 나면 책을 읽으려고 하는 첫째와는 달리, 둘째는 잠들기 전 밤 시간에만 책을 읽는 걸 좋아했는데 "지금 아니면 엄마가 언제 책을 읽어줄지 알 수 없다"라고 말하면 엄청 만족스러워하진 않아도 기꺼이 그 시간을 책 읽는 시간으로 내어주었다. 평소 잠들기 전에 읽을 수 있는 책은 딱 다섯 권까지, 그 이상은 엄마가 너무 피곤해서 안돼! 하고 상한선을 정해두었는데 이렇게 낮에 책 읽은 시간을 적립(?)해 두면 밤에 그만큼 책을 덜 읽어줘도 돼서 체력을 아낄 수 있었다. '아까 낮에 세 권 읽어주었으니 오늘 밤에 잠자기 전에는 두 권만 읽으면 된다'는 이 조삼모사 전략이 가끔은 통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낮의 내가 책을 읽었던 건 과거의 일이고 지금 내가 다섯 권 읽고 싶다고 으애애앵! 하면 어쩔 수 없이 밤에도 다섯 권을 꽉꽉 채워 읽어줘야 했다. 그래도 깊은 밤에는 막내가 먼저 잠들었으니 훼방꾼도 없겠다, 제법 말이 통하는 두 자매를 옆구리에 끼고 책을 읽는 재미도 나름 쏠쏠했다. 가끔 잠이 너무 고파서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스르르 눈이 감겼지만.
이때 읽을 다섯 권의 책을 무엇으로 고르느냐는 온전히 아이들의 선택에 맡겼다. 두 자매는 이 다섯이라는 홀수의 수를 두고 매일 밤 자기들끼리 최종 독서 리스트를 만들며 나름의 협상 능력을 키워나갔다. 선택과 포기와 집중이라는 사회적 기술을 습득했다고... 좋게 생각하고 싶지만 그래도 역시 아이들이 원하는 만큼 듬뿍 책을 읽어주지 못해서 아쉽고 미안한 마음도 크다. 45개월이라는 둘의 나이 차이만큼이나 좋아하는 책의 수준도, 취향도 서로 달랐는데, 대체적으로 큰애가 동생 수준에 맞춰 많이 양보하는 식으로 독서목록이 꾸려졌다. (아이고 우리 맏딸 짠하다.) 사이다 작가의 <고구마구마>라든지 모 윌렘스의 그림책들은 이럴 때 너무 고마운 존재였다. 서너 살 둘째도 어려워하지 않는 짧은 단어로 이루어진 쉬운 그림책이지만, 곳곳에 숨어있는 해학적인 요소 덕분에 큰애까지도 진심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었으니까.
밤 시간 잠자리 독서를 양보한 만큼 낮 시간에 큰애에게 어떤 보상이 주어져야 했다. 어린이집에서 낮잠까지 자고 가장 마지막에 집에 오는 둘째와 달리, 하교시간이 조금 더 빨랐던 첫째는 그 틈새 시간 동안 엄마와 단둘이 책 읽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전날 밤에 큰애가 동생에게 양보하느라 포기했던 책을 잘 눈여겨 두었다가 하굣길 마중가는 길에 그 책을 챙겨 나갔다. 막내는 유모차에 재우고 첫째와 공원 벤치에서 책을 읽으며 함께 간식을 먹다가 동생을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갔다. 가끔은 막내가 유모차에서 잠들지 않았을 때도 있고, 또 어떤 날은 동생이 아파서 어린이집에 안 가는 날도 있었지만 틈틈이 생기는 둘만의 시간을 아끼고 아껴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둘만의 추억이 되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 그때 그 충만했던 시간이 그립다.
작아진 옷을 보는 여유로움처럼 때 지난 책을 보는 너그러움
그렇지만 독서 교육에 있어서 여러 아이들을 한꺼번에 키운다는 게 어려운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장점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책값이 아깝지 않다는 거다. 마치 아동복을 살 때 조금 더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부터 아이들 옷을 살 때 비교적 쉽게 지갑이 열렸다. 아이들 옷은, 특히 어린 나이일수록 사이즈가 휙휙 바뀌어서 3살 때 입었던 옷이 4살 때 입을 수 없게 되고, 올해 입던 옷을 다음 해까지 연이어 입히기가 꽤 어렵다. 딱 맞게 입히자니 옷값이 아깝고, 넉넉하게 입히자니 이 사이즈도 저 사이즈도 아니게 된다. 계절까지 따져서 옷을 골고루 구비해두려고 하면 한겨울옷이나 한여름옷은 한두 달 입고 그대로 작아져버린 경우도 부지기수라 늘 옷값이 아깝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이가 늘어나자 그런 초조함이 사라졌다. 큰애가 한두 번밖에 못 입고 작아진 옷은 그대로 몇 년 두면 둘째에게 기회가 온다. 혹은 둘째도 때를 놓치면 셋째가 입어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언젠가 한 번은 뽕을 뽑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옷값에 들어가는 돈이 덜 아깝게 되었고, 몇십 만원씩 하는 오리털 패딩도 한 번 사서 세 아이에게 모두 입히고 나니 기왕 사는 거 비싸고 좋은 옷 사 입혀서 겨울 한 철 따뜻하게 잘 보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책도 그렇다. 아이들에게도 그맘때 그 나이에만 딱 재미있게 느껴지는 책이 있고, 심지어 각자의 책 취향이라는 게 있다. 큰 아이가 한두 번 읽고 너무 시시하다고 던져놓은 책을 둘째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라며 살뜰히 사랑해줄 때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독서취향이 워낙 다르다 보니 큰애나 둘째에겐 외면당했던 책이 셋째 손에 들어가서야 빛을 발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큰 애가 24개월이었을 때 비싼 돈 주고 사들였던 '프뢰벨 자연관찰 시리즈'는 첫째도 둘째도 모두 다 시큰둥해하던 전집이었는데, 막내는 우리 집에 쌓여있는 수천 권의 책 중에서 이 시리즈를 제일 좋아한다. 딸만 둘 키우다가 아들을 키워서 그런가, 늘 전래동화 창작동화 이런 책들만 읽어주다가 공룡, 자동차, 온갖 동물들의 생태를 세세하게 정리한 백과사전 같은 책을 읽어주다 보면 육아는 해도 해도 늘 새롭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그래서 '실패할 것 같은' 책도 산다. 큰애 취향이 아니지만 한 번쯤 읽어두면 좋을 것 같은 책, 다들 좋다고 추천하지만 우리 아이는 관심 없어했던 책도 좀 더 과감하게 산다. 그중에는 내 예상을 깨고 첫째가 좋아하는 책도 있고, 역시나 안 좋아할 것 같았는데 정말 딱 한 번만 읽고 휙 던져두는 책도 있다. 그래도 상관없다. 셋 중에 한 명에게만 사랑받아도 그 책은 '대박템'이 된다. 그러다 보니 책장에 빼곡한 책들 중 어느 한 권도 괜히 샀다고 후회되는 책이 없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의 독서 스펙트럼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넓어졌다. 어릴 때 그렇게 외면받던 자연관찰 책도 다른 형제가 워낙 좋아하니 '대체 저 책에 무슨 매력이 있나?' 하며 누나들이 다시 기웃거리고 그러다 또 새로운 재미를 발견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책을 읽어주고 추천하고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이 부지런히 바깥세상으로 나오며 삼 남매의 책 세계는 조금씩 넓어진다.
낭독, 좋은 걸 알고는 있지만 실천은 어려웠던
다둥이 책 육아의 또 다른 장점은 큰 아이가 작은 아이에게 소리 내어 책을 읽어주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 집 아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책을 많이 읽어주는 편이다. 한국어로는 책을 읽어도 아직 영어로는 책을 못 읽는 둘째는 읽고 싶은 영어 그림책이 있으면 언니에게 가져간다. 막내는 한국어 책을 읽어줄 누나들이 둘이나 있으니, 엄마가 바쁘다 싶으면 누나들을 공략한다(아무래도 나이 터울이 많고 좀 더 너그러운 큰누나를 공략할 때가 더 많다). 하도 여러 번 읽어 달달 외우다시피 한 그림책은 막내가 나한테(?) 읽어준다(매우 황송해하며 열심히 들어줘야 한다). 책을 읽어주는 걸 하나의 놀이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엄마가 하는 건 뭐든지 따라 하고 싶은 아이들 마음 덕분인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이렇게 책을 달달 외웠소, 하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인 것 같기도 하다. 가끔은 누나가 책 읽어주겠다고 자원하고 나서는데 동생이 누나가 읽어주는 책은 듣기 싫다고(!) 해서 싸움이 일어날 때도 있지만.
아직 묵독과 속독에 익숙지 않은 어린 나이의 아이들은 글자를 소리 내어 읽을 때 더 빠르게 언어능력이 향상된다. 글을 조용히 묵독할 때보다 글을 큰소리로 낭독할 때 뇌의 더 많은 부분이 활성화되고 그만큼 소리를 해석하는 능력과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이 높아진다. 1) 그렇지만 아이에게 매번 소리를 내서 책을 읽으라고 시키는 건 꽤 어렵고 눈치 보이는 일이다. 나는 일부러 아이에게 소리 내서 책을 읽으라고 시키지는 않는다. 아니 못한다고 말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아무래도 소리를 내서 책을 읽게 되면 목도 아프고, 읽는 속도도 느려지고, 글자를 틀리게 읽을 때마다 옆에서 같이 듣고 있는 엄마 귀도 신경 쓰여서 아이가 싫어할 게 뻔히 눈에 보이니까. 아이 눈치가 보여서 차마 낭독을 시킬 수가 없다.
거듭 강조하지만 아이가 끝까지 꾸준히 책 읽는 습관을 자기 것으로 가져가려면, 아이가 책 읽는 시간을 행복하고 충만한 시간으로 느껴야 한다. 그런데 여섯, 일곱 살이 되면서 아이들이 스스로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되면 엄마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아이가 책을 제대로 읽고 있는지 확인하려 드는 것이다.
"네가 스스로 읽어봐."
"한 번 소리 내서 읽어봐."
이렇게 아이들에게 억지로 낭독을 시키면서 글자를 틀리면 고쳐주고, 잔소리하고, 심지어 혼내는 엄마들까지도 있다. 책 읽기는 국어공부가 아닌데, 그냥 그 자체로 즐길 수 있어야 하는 건데 , 꼭 어떻게든지 책을 통해서 학습적인 효과를 거두려고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이때부터 아이들은 글자를 유창하게 읽어야 하고, 틀리지 않게 읽어야 하고, 엄마에게 혼나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앞서면서 그 부담스러운 마음을 책이라는 물건에 전가한다. 책이 오히려 무섭고, 짜증 나고, 두려운 물건이 된다. 혹여나 그런 부작용을 갖게 될까 봐 소심한 이 엄마는 아이들에게 "소리 내서 읽어봐"라고 입도 벙긋 못하고 그냥 읽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둔다.
그런데 형제들 간에 서로 읽어주다 보니 알아서 자연스럽게 자기네들끼리 낭독을 한다. 그것도 오히려 재미있고 신나게, 놀이처럼. 굳이 엄마의 잔소리가 개입하지 않아도, 스스로에게 좋은 것을 알아서 찾아서 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흐뭇할 수는 없다. 가끔 "누나 좀 제대로 읽어봐."라든지 "야, 너 거기 글자 틀렸어."라든지 하며 아주 야무지게 훈수를 두지만, 아무래도 형제들끼리는 서로가 좀 만만하다 보니 엄마 잔소리보다 덜 스트레스받고 더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는 듯하다. 아니, 사실 그러다 싸운다. 역시 다둥이네 집에서 싸움은 삼시세끼 밥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랄까. '이게 다, 사회화가 되어가는 중이다'라고 되뇌고 되뇌고 또 되뇌며 고함치지 않는 우아한 엄마가 되려고 오늘도 각고의 노력 중이다.
1) 참고문헌 <우리 아이 낭독 혁명> 고영성, 김선 지음. 스마트북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