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독서 취향을 존중하는 법
엄마와 아이는 서로의 책 친구
늘 비슷한 책만 반복해서 보는 아이
아이가 책을 좋아하고 가까이해서 그것만으로 흐뭇해하면 참 좋을 텐데, 영유아기 엄마들이 사서 하는 걱정이 있다. 편독이다.
공룡이든 자동차든 공주님이든, 아이가 푹 빠져 있는 어떤 테마가 있다면 아낌없이 그 관심을 지지해주라고, 그 분야의 책을 듬뿍듬뿍 사서 안겨주라고 말하면 오히려 볼멘소리를 한다. 아이가 책을 좀 골고루 봤으면 좋겠는데, 보던 책만 자꾸 봐요. 자기가 좋아하는 책만 맨날 지겹도록 읽어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으면 좋겠어요. 엄마들은 아이의 '편독'이 걱정스럽다고들 이야기한다.
이전 글, <다둥이 엄마의 책 육아>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우리 집 삼 남매는 같은 배에서 나온 아이들인데도 저마다 좋아하는 책이 다르다. 첫째 아이에겐 소위 '대박 책'이었던, 너무 사랑받아 표지가 너덜너덜해진 책을 보고 셋째는 하나도 재미없다고 하고, 큰 아이에겐 외면받아 먼지가 뽀얗게 쌓였던 오래된 책이 셋째에게 와서야 각광받아 먼지 쌓일 틈 없이 책꽂이를 쉼 없이 드나들기도 한다. 같은 부모 밑에서,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인데도 좋아하는 음식이나 장난감, 책, 옷 취향마저 겹치는 게 하나도 없다. 형제들끼리도 그러는데 하물며 다른 집 아이들이야. 남의 집 아이가 과학책을 좋아하고 철학책을 좋아한다고 해서 우리 집 아이도 그 책을 좋아할 거라고 기대하지 말자.
모든 분야의 책을 골고루 읽는 아이들은 유니콘 같은 존재다. 오히려 그런 경우에 왜 특별히 선호하는 책 취향이 없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어쩌면 아이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직접 책을 고르고 선택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특히 어른이 읽으라고 권해준 책을 의무적으로 수동적으로 읽는 건 아닐까?
편독, 독서 취향으로 볼 것인가 교정해야 할 습관으로 볼 것인가
일단 '편독'이라고 부르지 말고 '독서 취향'이라고 불러주자. 사람에겐 누구나 취향이 있다. 어린 아이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오히려 자신만의 확고한 취향이 생겼다면 정색하고 반겨줄 일이다. '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수많은 어른들을 우리는 그동안 많이 만나보지 않았던가. 나만의 취향을 갖는다는 건 생각보다 대단하고 어려운 일이다. 어른들에게도 어려운 일인데 내 아이가 이 어린 나이에 자신의 취향을 확고하게 간직하고 있다니. 그걸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독서 교육에 관심 많은 어른들이 '좋은 책'이라고 권하는 어린이책은 하나같이 비슷한데 아이들의 취향은 그 범주를 벗어날 때가 많아 재미있다. 어른들 시선에선 그림도 허접해 보이고 내용도 비논리적이고 어딘가 어설프고 이상해 보이는 책을 아이들이 좋아할 때면 신기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어른인 나와는 다르게 '책이란 마땅히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하는 편견이 없는 아이들. 그래서 가급적이면 아이의 선택에 참견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려고 노력한다. 그 선택을 잘 관찰해보면 아이마다 저마다 다른 '진짜 나다움'의 힌트가 보인다. 얘는 그림책을 고를 때 화려하고 예쁜 일러스트가 있는 걸 좋아하네, 얘는 실제 사진이나 세밀화가 실려 있는 자연과학책을 좋아하는구나, 얘는 픽션보다는 실제 인물의 이야기나 역사적인 사실이 담긴 이야기를 좋아하네, 등등... 내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해하는지, 그 힌트가 독서 취향에 숨어 있다.
서점과 도서관과 친해지세요
어른이 미리 들여다보거나, 이른바 추천 도서들로만 책장을 꾸며주면 더 편할지도 모른다. 소위 '실패하는 책' 없이 그럴듯한 책장이 완성될 테지만, 정작 읽는 아이의 개성은 드러나지 않는 밋밋한 책장이 될 것이다. "이 책 다음엔 이거 읽어, 너희 나이에는 이걸 꼭 읽어야 한대."라며 권장하는 책만 읽어야 한다면 얼마나 재미없을까. 아이의 영양 불균형을 막기 위해 일정한 음식을 권유할 수는 있지만, 언제까지고 따라다니며 챙겨 먹일 수 없는 것처럼 책도 그렇다. 재밌을 것 같았으나 재미가 없을 수도 있고 때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내용이 책 속에서 튀어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을 통해야 책을 고르는 눈이 밝아진다. 우리 모두가 비슷한 과정을 통해 집에 들일 책을 고를 수 있는 지금에 이른 것이 아닐까.
정한샘, 조요엘 저 <세상의 질문 앞에 우리는 마주 앉아> 중에서
작가이자 큐레이션 책방 리브레리아Q를 운영하는 정한샘 씨의 책 <세상의 질문 앞에 우리는 마주 앉아>에는 쌍둥이 자매를 키우며 일주일에 한 번씩 서점에 가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쌍둥이 자매는 엄마에게 간섭받지 않고 자기 취향껏, 자기만의 책장을 꾸렸다. 그래서 한 책장에는 판타지 소설을 중심으로 한 소설책의 향연이, 또 한 책장에는 요리와 반려동물이 가득한 실용서의 향연이 펼쳐진다. 아예 다른 서점의 두 코너를 그대로 옮겨온 듯한 모습. 그 두 켠의 책장에는 쌍둥이 자매의 '나다움'이 잔뜩 담겨있다.
해외에 살고 있기 때문에 모국어 책을 쉽게 구하지 못하는 입장이라 부러워하며 꿈꾸듯이 그 장면을 읽었다. 나도 한국에 살았다면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을 서점에 데리고 갔을 것 같다. 아마 아이들은 자기 개성만큼이나 각자 다른 책을 실컷 골랐겠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그나마 한국에서 보냈던 지난여름 방학 동안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매주 동네 서점과 도서관을 부지런히 탐방했다. 우리는 마음껏 한국어 책을 고를 수 있는 그 자유에 실로 행복했었다.
친정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서울책보고>. 중고서점이라 책 가격도 싸고, 도서관처럼 실컷 책을 열람할 수 있는 공간도 있어서 우리 가족은 이곳을 최고의 '책보물창고'로 꼽았다.
폴란드에 살고 있는 나는 아이들의 취향을 고려하며 어린이책을 사려면 조금 더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5~6만 원 정도 되는 해외배송비를 감당하며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한 박스씩 주문하는데 열 권 남짓한 구매 목록에 세 아이들의 취향을 다 반영하려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이미 읽었던 책 가운데 재미있어하는 시리즈의 새로운 책이 나오면 일단 구매 목록 1순위에 들어간다. 하나의 세계관이 공유되는 나카와 미와의 '도토리 마을' 시리즈나 얼마 전에 신간이 나온 '숲 속 100층짜리 집', '양순이네 떡집' 시리즈 같은 책이 여기에 해당한다. 평소 좋아하던 작가의 신간이 나와도 일단은 아이들에게 그 사실을 공지(?)한다. '백희나' 작가님 책이 새로 나왔대, '요시타케 신스케' 작가님의 새 책이 나왔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신간 발행 소식을 알리면 경제적 관념이 없는 아이들을 물론 다 사달라고 조르지만 이번 달 책 박스의 구매 목록이 이미 5kg이 넘어가서 전부 다 주문할 수는 없기 때문에 새로운 책을 주문하려면 장바구니에 담긴 열 권의 책 중에서 두세 권은 포기해야 한다고 알려준다. 세 아이들은 머리를 모아 장바구니를 들여다보며, 미리 보기 페이지와 앞/뒤표지의 줄거리도 깨알같이 읽고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얻을지 신중하게 고민한다. 최종 장바구니에는 세 아이의 취향이 고르게 반영되어 있다.
엄마는 북 큐레이터
한국 서점에서 주문하는 열 권 중에 20%에 해당하는 두 권은 내가 권유하는 책이 들어간다. 아이들이 모르는 새로운 작가, 새로운 책, 그러나 재미있다고 이미 입소문이 난 책들 중에서 내가 고른다. 나는 '창비 좋은 어린이책 수상작'이라든지 '어린이 문학상 수상작', '칼데콧상 수상작' 같은 스티커에 홀랑 넘어가는 구매자이기 때문에 그런 책도 많이 골라 담곤 하는데, 아이들은 그런 반짝거리는 은색 스티커에는 무관심한 독자들이기 때문에 책이 배달 오고 나면 항상 가장 마지막 순서로 내가 고른 책을 읽는다.
"어차피 너네들 읽으라고 산 책 아니야. 이건 엄마가 읽고 싶어서 산 책이거든." 하고 그러기 나 말기나 내가 먼저 읽고 있으면, 자신이 고른 책을 다 읽고 새로운 책이 궁금해진 아이들이 슬금슬금 내가 고른 책에 눈길을 던진다. 보통 읽는 속도가 제일 빠른 첫째가 먼저 읽게 되는데, 워낙 이 책 저 책 책이라면 다 좋아하는 책벌레인 데다가 좋은 책이라고 입소문이 난 책은 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오호, 엄마가 고른 책도 꽤 재미있네.' 하며 엄마의 안목을 칭찬해 준다. 그리고 정말 재미있는 책은 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영업한다. 아이들은 엄마의 선택은 못 미더워도 언니의 추천은 믿을만한지, 내가 추천할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편이다. 큰아이가 추천한 책을 읽을 때면 언니의 낭독은 덤처럼 따라온다. 이런 일이 자꾸 반복되다 보면 아이들은 엄마의 선택이 내 취향을 적중했으니 그다음 선택도 믿어준다. 나는 그때마다 조금씩 다른 책들, 조금씩 다른 의미로 좋은 책들을 찾아 아이들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준다. 비슷한 취향을 공유하고, 또 서로의 취향에 영향을 받는다.
단, 이렇게 아이들에게 권유하는 책은 엄마도 기꺼이 읽을 만한, 아니 적어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책이어야 한다. 나 같아도 안 읽을 것 같은 책, 학습적으로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서 '책의 재미' 이외의 다른 음흉한 목적을 갖고 책을 추천하는 것은 금물이다. 아무리 영양학적으로 훌륭한 음식이라도 맛이 없을 것 같은 음식(예를 들면 푸르뎅뎅한 녹즙 같은...)을 억지로 권유하면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것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내게도 재미있을 만한 책을 권해야 한다. 아이의 책 선택이 재밌고 웃기고 매력적인 초콜릿 케이크 같은 선택이라면, 엄마의 책 권유는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한, 그리고 입에 착 감기는 맛이 있는 설렁탕 같은 보양식이 되어야 한다. 줘도 안 먹을 것 같은 이상한 샐러드 말고.
엄마와 아이는 서로가 서로의 북메이트
아이들이 철저하게 나의 간섭에서 벗어나 책을 빌릴 수 있는 도서관이 있다. 아이들이 다니는 국제학교 도서관이다. 이곳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한국어 책을 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도서관 중 하나이기도 하다. 원래 나도 학교 도서관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고, 한 번에 여섯 권씩 대출도 할 수 있었지만 코로나 이후 방역 조치로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어 아이들은 책을 빌릴 수 있지만 학부모인 나는 불가능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이 도서관 수업을 가는 날 아침에는 "재미있는 책 많이 빌려와."하고 인사하며 헤어진다. 어떤 책을 빌려올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기다리다 보면 그날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서로 자랑하듯 가방에서 책을 꺼내 보이며 읽어달라고 보챈다. 어떤 때는 영어 그림책만, 또 어떤 날에는 한국어 그림책만, 아니면 사이좋게 딱 반반씩 나오는 날도 있다. 모르는 책, 새로운 책도 많지만 이미 여러 번 읽었던 책, 심지어 똑같은 책이 집에 있는데도 빌려오는 경우도 많다. 아니 이미 집에 똑같은 책이 있는데 도서관에서 또 그걸 빌려온다고? 엄마의 관점에선 이해가 안 되지만, 아이는 좋아하는 책이고 도서관에서 그 책을 만나니 반가워 덥석 집었을 뿐이다.
아이들이 빌려온 새로운 책, 내가 모르는 작가의 책을 읽어주고 나면 아이들 얼굴에 어서 책에 대해 칭찬해달라는 표정이 올라온다. "엄마 어때요, 내가 골라온 책 재미있죠?" 내가 새롭게 발견한 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찬사를 기대하는 눈빛이다. 기꺼이, 엄마는 엄지를 치켜올려준다.
가끔 아이들이 골라온 책에 진심으로 깜짝 놀랄 때도 있다. 그림이며 내용이며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 취향의 책이라 내 마음에 쏙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면 역시 취향이란 서로 닮아가는 걸까, 아이가 내 취향을 정확하게 간파한 걸까, 아니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보편적인 책이 역시 존재하는 걸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나는 아이의 책 세계를 확장시켜주고, 아이는 내 세계를 확장시켜준다. 어느 한 사람의 일방적인 권유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책을 추천하고 추천받는 관계. 내가 너보다 더 오래 살았고 더 읽은 게 많으니 내 권유에 따르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우리 둘 다 아직 읽어보지 않은 책이 많고 세상엔 정말 무궁무진한 책이 있으니 함께 좋은 책을 찾아보자고 하는 것이다. 아이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더 좋은 책을 발굴하고 싶어서 적극적으로 미지의 세계를 탐방하고, 엄마 또한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책을 안겨주고 싶어 이 광활한 책의 세계를 탐험한다. 그리고 서로의 취향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우리가 상대방에게 딱 맞는 취향의 책을 발견할 때면 내 맘에 드는 책을 발견할 때보다 오히려 더 기뻐한다. 평생의 책 친구. 그게 소위 책 육아를 하는 부모와 아이 사이의 가장 건강한 관계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