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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Jun 09. 2022

목적은 없지만 그래도 열. 심. 히


 최근에는 거의 글을 쓰지 않았다. 글을 쓸 수 있을만한 여유 시간이 생기면 모두 그 시간을 공부하는 데 쏟아붓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단어를 외우고, 매일 책을 읽고, 두꺼운 문법책을 들여다보고, 귀에서 진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으로 오디오 파일을 청각세포에 주입한다. 이 길의 끝에 대체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요즘은 전력을 다해 폴란드어를 공부하고 있다. 


 폴란드 살이 4년 차. 어느 시점에선가 나의 폴란드어 공부는 흐지부지해졌다. 학창 시절부터 꾸준히 필수과목으로 배웠던 영어를 제외하고 그 외의 외국어를 공부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텐데,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 3개월에서 6개월 전후로 외국어가 어려워지는 순간이 온다. 알파벳 읽는 법, 기초적인 문법, 필수 어휘들을 습득하고 나면 인사와 날씨와 숫자와 계절 정도를 배우고, 본격적인 비즈니스 회화나 학습을 위한 언어를 습득하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그다음 단계로, 그러니까 어느 정도 그 외국어로 의사 표현을 할 수 있을만한 실력으로 넘어가려면 아주 빡센 공부가 필요하다. 내게도 어김없이 그 고비가 다가왔고 독하게 공부할 필요가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 


 나의 폴란드어 공부는 사실 목적이 없다. 단어장 애플리케이션의 '이미 학습한 언어' 카테고리에 약 1000여 개의 폴란드어 단어가 채워졌을 무렵부터는 굳이 더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느껴졌다. 마트에서 장보기, 카페에서 커피 주문하기, 백화점에서 쇼핑하기, 그리고... 그리고... 없다. 폴란드어가 더 필요한 상황이 오지 않았다. 외국인 마을에서, 국제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며, 한글학교에서 일하고, 교민 사회의 사람들과 교류하는 삶. 그 어디에도 폴란드어가 필요한 환경은 없었다. 


 이대로, 이렇게, 아주 기초적인 회화와 눈치로 나누는 대화만 가능한 실력으로 주재원 생활을 마무리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쉽게도 폴란드에 살면서도 폴란드어를 공부하는 한국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는데, 아마 모두 비슷한 생각과 마음으로 잠깐 스쳐가는 몇 년의 시간을 위해 굳이 어려운 폴란드어를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지난 몇 년간 흐지부지한 제자리걸음의 공부만 해왔으니까. 


 그런데 문득 몇 주 전부터 기왕 여기서 살고 있으니 폴란드어를 유창하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폴란드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얻다 써먹어? 그 시간에 차라리 영어 공부를 하는 게 낫지 않아? 하는 생각은 여전히 있었지만 그건 내가 아주 정말로 열심히 공부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폴란드어가 열어주는 세계를 경험해 본 적 없기 때문에 하는 생각일 수 있다고 느꼈다. 아니, 꼭, 이유가 있어야만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 게 아니니까. 자격증, 시험, 전공, 그 모든 것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그냥 좀 열심히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꼭 어떤 동기와 이유와 목적이 있어야만 공부를 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 세상에 있는 모든 공부들이, 그 모든 배움들이 꼭 목적이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 그냥 아무 목적이 없더라도 그냥 그 무언가를 열심히... 할 수는 있는 거 아닐까?




 ...라고 글을 썼지만 사실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나는 대체 이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폴란드어를 공부해서 무얼 얻고자 하는 것일까. 얻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는 걸까, 아니면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이런 노력을 할 수 있는 걸까. 끊임없이 나의 행동을 나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는 노력을 하면서도, 아니 굳이 납득이 되어야만 꼭 공부를 하는 건 아니라고 또 다른 이유를 대며, 어쨌든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요즘 공부에 시간을 쏟아붓는 중이다. 


 덕분에 집안은 엉망. 해야 하는 일은 뒤로 미루고, 살림은 귀찮고, 시간이 나면 단어장을 들여다보기 바쁘다. 역시나 실력은 지지부진하게 늘고 있고, 공부라는 건 상당히 정적인 활동이라 여름을 앞두고 엉덩이에 살이 덕지덕지 붙고 있다. 그런데도 어째서 하는 건지는 알 수 없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은 매일 생긴다. 아무런 목적 없이 공부를 한다는 것, 아무런 용도 없이 공부를 한다는 것, 아무런 이유 없이 무언가를 열심히 배운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오만 가지 안 되는 이유들이 불쑥불쑥 튀어 오르고, 그 속으로 숨어들고 싶은 마음이 매일같이 생긴다. 그 유혹과 싸우기 위해 3주 전부터는 개인 튜터도 섭외해서 주 2회 과외를 받고 있다. 일단 몇 개월치 헬스장 쿠폰을 끊는 심정으로 한번 과외를 시작하면 쪽팔려서라도 몇 달은 꾸준히 공부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시간과 노력에 더해 비용까지 더해졌으니 이제 정말 도망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짜증과 지겨움을 뒤로하고 가끔 피식 웃음이 나오는 순간들이 있다. 오늘 배웠던 새로운 문법 규칙이 고스란히 적용된 메뉴판을 봤을 때, 내가 그렇게 씨름하던 성, 수, 격의 일치가 자연스럽고 완벽하게 발현된 마트의 영수증을 봤을 때, 길을 지나가다가 어떤 할머니가 손자에게 "샌드위치 가져가렴."하고 건네는 말이 부지불식간에 귀에 꽂혀 들어와 알아들었을 때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반짝, 하고 스치고 지나간다. 어째서 이런 순간들은 이토록 매혹적일까.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그 매혹은 어떻게 이렇게 일상에서 순식간에 발현되곤 할까. 아, 만약에 내가 이 폴란드어 공부의 고비를 넘기고 나면 대체 얼마나 매혹적인 경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이 길의 끝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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