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청파동은 어디인가요?

2021년 3월에, 그리고 2022년 3월에 다시 필사한 시

by 주정현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 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 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청파동이 어디인가 싶어 찾아보니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오래된 동네였다. 푸른 야산이 많았다고 해서 '청파'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기도 하고, 조선시대 문인인 청파가 살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소나무 숲으로 유명한 효창공원이 있고 숙명여대가 있는 동네인데, 여대 근처에 사는 대학생들이 꽃잎처럼 손을 포개고 골목골목을 걸어 다녔던, 오래되고 낡은 추억이 서려있는 장소가 아닐까.


작년 3월에 10명의 필사 모임 멤버가 모여 이 시를 필사하고 읽었다. 그때 함께했던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향수, 오래전 첫사랑에게 느꼈던 감정, 사랑이 끝나자 세상이 끝난 것처럼 느껴지던 슬픔, 헤어진 이후에 남았던 아련한 감정 등등.. 자신만의 청파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주었다. 나 또한 시를 읽는데 선연히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서 많이 슬펐다.


옛 애인... 은 아니고 대학시절 제일 친했던 동성 친구였다. 힘들고 슬플 때 오랫동안 함께했던 친구였는데, 서로의 고통은 함께 나누며 위로할 수 있었지만 기쁘고 경사스러운 일에는 진심으로 축하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서로 멀어졌다.


결혼식 청첩창을 건네줄 때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친구는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쌓아왔던 우정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질투나 가식이 없는 순수한 의미의 축하가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20대에 그 친구와 함께했던 추억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스물한 살 생일을 앞두고, 누구보다도 성대하게 축하해주고 싶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축하 메시지를 모으며 이것저것 준비를 하고 있자니 "너네는 진짜 대단한 친구다."하고 엄지를 추켜올려주던 한 선배가 기억난다. 그렇게 가까웠던 우리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걸... 그 선배는 알고 있을까.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 들어가 /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시인의 말이 슬프면서도 부럽다. 나는 차마 다시 한번 찔릴 용기가 없다.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릴 걸 각오하고서라도 네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시인의 그 용기가, 절절한 마음이, 당당함이 부럽다.


이전 07화비어있으니 채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