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일상에서 건져낸 기록들

by 주정현
나는 기차와 호텔, 대기실에서, 그리고 비행기의 접이식 테이블에서 글 쓰는 법을 익혔다. 밥을 먹다 식탁 밑에서, 혹은 화장실에서 뭔가를 끄적이기도 한다. 박물과 계단에서, 카페에서, 길가에 잠시 정차해 둔 자동차 안에서 글을 쓴다. 종이쪽지에, 수첩에, 엽서에, 손바닥에, 냅킨에, 책의 한 귀퉁이에 쓴다.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1월이 끝났다. 2023년 1월은 쓰기의 나날들이었다. 브런치에는 비록 게으르게 글을 올렸지만, 카페에서, 자동차에서, 길가에서, 종이쪽지에, 핸드폰 메모장에, 일기장에, 책 귀퉁이에, 필사 노트에 무언가를 끊임없이 썼다. 특히 올해 새로 구입한 빳빳한 일기장엔 지난 한 달간의 기록이 빼곡히 들어찼다. 뭐 이렇게 주절주절 많은 이야기를 썼을까 싶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썼다. 쓰고 싶은 글이 있어서 썼을 때도 있었고, 써야 해서 썼을 때도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은 시 필사도 열심히 하고 단상도 꾸준히 썼으니 노트에, 카톡창에, 메모장에, SNS에, 블로그에 활자가 넘실넘실 넘쳐났다.


무엇을 그리도 열심히 썼나 하고 일기장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새해 첫날에는 "올해에는 조금 더 나은 나 자신으로 살아봐야지."라고 썼다. 한 달이 지나, 올해의 12분의 1이 지나 다시 되돌아보면 나는 조금 더 나은 자신으로 살지는 못했고 그냥 작년과 비슷한 나 자신으로 살고 있다. 새해에는 새해 버프라는 게 있어서, 마음만 굳게 먹으면 목표한 대로 몸도 마음도 반짝반짝하게 갈고닦으며, 자기 계발서에 등장하는 그럴싸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묘한 자신감이 들지만, 약간의 시간만 흘러도 깨닫고 만다. 아, 나는 그냥 나야.


새해 둘째 날에는 여전히 새해 버프가 남아있었는지 이런 문장도 썼다. "달력의 앞 숫자가 바뀌었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 세상을 살아가는 내 마음가짐은 바꿀 수 있겠지."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괜히 아이들을 바꿔보겠다고 닦달하지 말고, 나라도 잘 바꿔보자." 정확히 그 반대로 하는 일상을 살고 있다 보니 스스로 쓴 글을 보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에게는 너그럽고, 아이들에게는 엄격하다. 제발 너에게 주어진 일은 책임감을 가지고 네가 끝까지 완수하라고 외치면서 내 뒤에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일은 눈감고 못 본 척하고 있다.


새해가 된 지 일주일이 넘어가자 드디어 새해 버프가 끝났는지 1월 8일의 일기에는 이렇게 썼다. "열심히 사는 게 좋은 거고 열심히 사는 게 당연한 걸까. 열심히 사는 걸 잠시 멈춰야 하지 않을까. 조금만 덜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열심熱. 뜨거운 마음. 나를 뜨겁게 태우는 마음. 그 뜨거운 마음이 오히려 나를 태우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만에 이런 생각을 글로 옮길 정도로 갑자기 일상이 서늘하게 가라앉게 된 까닭에는 쓸쓸하고 차가운 폴란드의 겨울이, 그리고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우울함이 많은 지분을 차지했다. 그저 차분히 이성적으로, 차갑고 서늘하게, 그리고 조금은 가볍게 살아보면 어떨까. 이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고, 어쩌면 따뜻한 봄이 온 이후에도 한동안은 이대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의 끝에 17일의 일기에는 이렇게 썼다. "나는 내가 보람찬 것, 나 스스로가 좋아지는 것, 내가 기특하게 느껴지는 일로 하루를 채우고 싶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위해서. 하루 종일 남을 위해 밥을 하고, 남을 돌보고 애쓰며 희생과 헌신으로만 가득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지는 않다. 그런 일상은 허무하다. 일상의 허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나는 매일의 글쓰기, 매일의 책 읽기, 그리고 음악과 그림과 산책으로 극복하려 한다. 나를 채우는 것은 다름 아닌 그런 것들이다." 글을 쓰면서 똑같은 문장을 환갑의 할머니가 되었을 때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이렇게 잡다하게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으려면 손가락 관절과 눈을 소중히 아껴서 써야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기대했던 것보다는 부산스럽게 지나갔던 1월. 이게 열두 번 반복되면 2023년이 끝나있을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하다. 새언니에게 선물 받았던 올해의 일력에는 1월 31일의 페이지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오늘의 단어: 모양. 1월은 너에게 어떤 모양이었니?" 같은 질문을 여섯 살 아들에게 해보았더니 아들은 "내 생일케이크를 닮은 동그라미."라고 답했다. 아들의 모양과 정 반대로 내게 1월은 뾰족뾰족한 모양이었다. 예쁜 별 모양이었다고 답하고 싶지만 그보다는 공룡 발톱을 닮았다. 그렇지만 공룡 발톱은 누군가를 할퀴어 아프게 할 것만 같으니 나중에 시간이 흘러 2023년의 일기장을 다시 들춰보았을 때, 기록된 나날들을 예쁜 별 모양처럼 다듬어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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