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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Jul 07. 2020

혼술에 대한 기억

김혼비 작가의 <아무튼, 술>

나에게는 어떤 대상을 말도 안 되게 좋아하면 그 마음이 감당이 잘 안 돼서 살짝 딴청을 피우는, 그리 좋다고는 하지 못할 습관이 있다. 말도 안 되게 좋아하다 보면 지나치게 진지해지고 끈적해지는 마음이 겸언쩍어 애써 별것 아닌 척한다. 정성을 다해 그리던 그림을 누가 관심 가지고 살펴보면 괜히 아무 색깔 크레파스나 들어 그림 위에 회오리 모양의 낙서를 마구 해서 별것 아닌 것처럼 만들던 여섯 살 적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말도 안 되게 좋아하는 걸 말이 되게 해보려고 이런저런 갖다 붙일 이유들을 뒤적이기도 한다. 그래서 술을 좋아하는 것 같다. 술은 나를 좀 더 단순하고 정직하게 만든다. 딴청 피우지 않게, 별것 아닌 척하지 않게, 말이 안 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채로 받아들이고 들이밀 수 있게. p.14


 그냥 가볍게 책에 대한 수다나 떨어야지, 하고 시작한 연재글이었는데 지난 첫 글의 반응이 예상치못하게 너무 좋았다. 다음포탈 메인에 글과 사진이 이틀 동안 걸리고, 일주일도 안되서 6만 건이 넘는 조회수가 기록되었다. 첫 글이 그렇게 반응이 좋아버리니까 뭔가 비슷하게 뜨거운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글을 계속 써야하지 않을까 고민이 되었다. 그런데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그런 어마무시한 글감은 내 안에 없다. 그래서 그 다음 글을 대체 뭘로 써야하지? 하고 고민하다보니 두 가지 깨달음이 생겼다.


첫째, 이 연재글은 팟캐스트 <책읽아웃>과 책에 대한 이야기지만 사실 둘다 독자들의 흥미를 끄는 주제는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책에 대한 글을 써서는 사람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란 어렵다. (그렇다. 지난 글은 책에 대한 글이라기 보다는 단독주택, 즉 부동산에 대한 글이었던 것이다!)

둘째, 어차피 힘들여서 쓰면 반작용으로 제일 최악의 글이 나올 것이다. 늘 강조하는 '힘빼기의 기술(!)'이 지금이야말로 필요할 때.


 그러므로, 힘을 빼려면?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나는 가볍게 맥주 한 잔을 곁들이며 몸의 긴장을 풀어주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맥주를 마시다보니 맥주와 가장 잘 어울렸던 책, 그리고 내가 너무 즐겁고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 생각났다. '재미'라는 분야에선 타의추종을 불허했던, 정말 말문이 막히도록 재미있었던 책, 김혼비 작가님의 <아무튼, 술>을 이야기해보자.



 팟캐스트 방송을 듣다가 중간에 멈추고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사실은 '똘똘똘똘'과 '꼴꼴꼴꼴' 그 중간 쯤 나는 소리를 ASMR 수준으로 들으며 너무나 소주가 한 병 마시고 싶었지만, 이역리 먼 유럽땅에서 구입하는 한국소주 한 병은 850ml짜리 보드카 한 병보다 비싸다. 게다가 아무데서나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침 남편이 한국식당에서 회식을 하던 참이라 이따 집에 오는 길에 소주 한 병 포장해달라고 부탁할까 잠시 망설였지만, 같은 식탁에 있는 법인 분들이

"아니, 소주는 왜 포장해가는거야?"

"아, 와이프가 한 병 사다달라 해서요."

이런 대화가 혹시나 오갈까봐 포기하기로 했다(이래뵈도 대외적으로는 조신하다). 아쉬운대로 캔맥주 따는 이 소리도 경쾌하다며, 탄산의 목넘김도 제법 좋다며, 1856년부터 만들었다는 폴란드 맥주를 마시며 방송을 듣는다. 손은 부지런히 빨래를 개키며, 듣는 방송.

이날 맥주의 안주는 팟캐스트와 빨래

 다들 팟캐스트를 들을 때 집안일을 하며 듣는다는 후기가 많았는데, 무선이어폰과 팟캐스트 듣기는 정말 집안일과 찰떡궁합인 것 같다. 그 중에서도 나는 빨래를 개키며 듣는 방송이 제일 좋다.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기를 돌릴 때는 물소리라든지 기계소리라든지 방해되는 외부의 자극이 많은데, 빨래는 사부작사부작 그 고요함이 너무 좋다. 이날은 맥주까지 곁들이며 빨래를 개키니 왠지 흥이 올랐는데, 혼자 맥주를 마시며 방구석에 쪼그려앉아 빨래를 개는 나의 모습이 조금 처량한가? 싶다가도 귀로 들리는 목소리에 흥이 넘쳐 기분이 꽤 상큼했다. 게다가 회식자리에 간 남편이 왠지 얄미워 '너만 마시냐? 나도 마신다.'라는 느낌도 있었던 것 같다. 막상 남편이 일찍 집에 들어온 날에는 같이 술을 마시는 일이 별로 없는데, 남편이 밖에서 술자리를 가진다고 하면 나도 술을 마시고 싶어진다. 그러다보니 요즘은 항상 혼술이다.  


 혼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김혼비작가님의 부산 냉채족발과 소주 에피소드를 읽고 들으며 나는 식당에 가서 혼자 술 마시는 그런 강단있는 여자가 못 된다. 하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옛날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을 뒤적거리다가, 어? 혼술하는 사진을 찾았다. 2018년 가을의 일이다.




 이때 기억하기로는 폴란드로 이사가기 몇달 전, 구청에 여권을 신청하러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여권과에서 아이들 사진이 적합하지 않다고 다시 찍어오라며 거절당했다. 참고로 우리 아이들로 말하자면 낯가리기의 슈퍼 챔피언으로, 당시 아흔 세대가 넘게 살고 있던 우리 아파트에서 엘레베이터를 탈 때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엘레베이터에 타고 있으면 울며불며 타기를 거부하거나(죄송합니다, 먼저 가세요.), 내게 꼭 안긴 채 절대 낯선 사람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는 그야말로 '사회적 거리두기'에 최적화된 내성적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이걸 누굴 탓할 게 아니라 나도 그런 낯가림이 있었던지, 어린 시절 사진관에 가서 찍은 사진을 보면 악을 쓰고 우느라고 눈이 퉁퉁 부어있고 얼굴이 시뻘겋다. 그나마 한참 울다가 아주 잠깐 울음이 잦아들었을 때 겨우 찍은거였다고.

 그런 아이들인지라 낯선 사진사 앞에서 여권사진을 찍는 건 비용보다도 '과연 그게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있었다. 일단 울고 도망가기 급급할텐데 어떻게 사진을 찍을까 싶었다. 성장앨범 스튜디오처럼 온갖 장난감이 있는 장소에서도 힘들었던 기억이 있던지라, 아이들을 전문적으로 상대하지 않는 동네사진관에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게다가 여권사진은 정해진 포즈와 표정이 있는데. 그런데 마침 당시 살던 집은 거의 모든 벽이 하얀색이었고, 그러니 그냥 하얀 벽을 바탕으로 아이들 사진을 찍어서 셀프로 여권사진을 만들어갔던 것이다. 예전에 해외 영사관에서 여권을 만든 적 있었던 둘째의 경우에는 그냥 그렇게 집에서 찍은 사진으로 통과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 여권과 직원과 송파구청 여권과 직원의 기준은 달랐던 것인가. 집에서 찍은 사진으로는(내가 열심히 배경도 더 하얗게 보정하고, 사진인화 전문 웹사이트에서 사진까지 뽑아갔었는데!) 여권을 만들어줄 수 없다는 답변을 받고 허탈하게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허탈함도 허탈함이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사진관에 데리고 갈 생각에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게다가 하늘도 내 마음과 같은지, 우산도 없는데 갑자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구청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20분정도 걸리는데, 우산을 사야하나 아니면 잠깐 어디에서 비가 멈추기를 기다렸다 갈까 살짝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어영부영 기다릴 수만은 없는 것이 당시에 나는 두살 막내를 오전에만 어린이집에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오후 1시까지는 데리러 가야했었다. 그때가 12시. 편의점 비닐우산은 집에 넘쳐나서 더 이상 사기 싫고, 어디 카페라도 잠깐 들려서 시간을 때우다가 집에 갈까. 아, 그러고보니 아직 점심을 안 먹었네. 밥은 어떡하지. 오늘 꿀같은 오전 자유시간은 이렇게 날린 거구나. 하며 생각의 흐름에 맞춰 애데렐라의 운명에 비관할때쯤, 열두시 점심시간에 맞춰서 구청 옆에 있는 멕시칸 레스토랑 직원이 close를 open으로 바꿔놓는 것을 보았다.

 아, 저기서 점심을 먹자. 비록 자유시간은 집까지 돌아갈 시간까지 계산하면 30분남짓밖에 남지 않았지만 나는 이 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해서 쓰겠다고 결심했다. 비내리는 창가 발코니 석에 당당하게 첫 개시 손님으로 들어섰다. 퀘사디아였나 타코였나 뭘 점심메뉴로 주문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에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그날 나는 낮 12시에 어쨌거나 혼자 식당에 들어가서 맥주를! 무려 맥주를! 주문했던 것이다.

 냉채족발에 소주를 시키는 김혼비작가님의 혼술 내공에는 "어우 그거 쪼렙이에요."하겠지만 그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식당에 가서, 혼자 술을 시켜먹었다. 그것도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를 바라보며. 뭔가 실연에 빠진 여자 코스프레를 하는 느낌으로. 실제로는 '어이구, 대체 애들 셋을 데리고 사진관에 가서 무슨 고생을 하게 될까.'하는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비관적인 마음으로. 아마 직원들도 저기 테라스에 앉아 혼자서 대낮부터 맥주를 들이키는 여자가 삼십분 뒤에는 어린이집 문을 열며 "호호호 선생님.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내일 뵙겠습니다." 이러며 아이를 데리러 갈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겠지. 그러나 오히려 그런 마음이 내 술자리(?)를 즐겁게 해주었는데, 내가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은 장소에 있다는 느낌. 그리고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은 표정과 분위기로 술을 마시고 있지만 사실 그런 건 아무것도 없다는 '나만 아는' 반전의 이야기가 오히려 날 설레게 만들었던 것이다.

  블랙 시스루 원피스를 입고 세미 스모키 화장을 한, 누군가의 결혼식에서 부케를 받은 후 바로 족발집으로 온 게 거의 분명해 보이는 삼십대 초반의 여자가 혼자 낮술을 마시는 모습은 누군가에게 다소 을씨년스러운 상상을 불러일으킬 만했을것이다. 비운의 여자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짝사랑해온 사람의 결혼식에서 어떤 얄궂은 운명의 흐름에 의해 부케까지 받고 찍어지는 마음을 술로 달래는 비운의... 곧 결혼할 예정이라 친구 결혼식에서 부케까지 받았는데 겨우 잊었던 첫사랑과 우연히 재회하는 바람에 거세게 흔들리는 마을을 진정시키는 비운의... 그러거나 말거나 소주잔을 연신 비우니 살짝 취기가 돌며 더욱 기분이 좋아졌고, 새콤하고 쫄깃한 냉채족발에 첫맛은 쓰고 뒷맛은 단 소주가 어우러질 때마다 마음이 간질간질해졌으며, 시선들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시원소주 한 병 반과 냉채족발 소짜 한 접시를 말끔히 비우고 일어서며 안 먹고 갔으면 크게 후회할 뻔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언제 또 마주칠지 모를 사람들 때문에 언제 또 마주칠지 모를 냉채족발과 반주를 놓치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p. 114


 지금 이 글을 쓰다보니 삼십대 초반은 혼술을 시작하기에 적절한 나이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런데 그날의 혼술 일기에는 "나 콜하지 그랬어."라고 댓글을 남겨준 옆동사는 동갑내기 친구가 있었다. 지난 겨울방학에 잠시 들렀던 한국에서 나는 그 친구와 함께 양꼬치를 앞에 두고 살얼음이 뜬 소맥을 말아먹었다. 아이 나이도 비슷하고, 사는 곳도 같고, 심지어 남편들 회사마저 똑같은... 그래서 내 마음을 항상 척이면 척 하고 알아주던 친구. 오늘 이 사진을 보니 문득 그 술자리도 같이 생각나며 친구가 많이 그리워졌다. 요즘은 맥주를 마시든 와인을 마시든 늘 항상 혼술이다. 어차피 코로나 이전에도 내가 참여하던 모임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시간에 모이는 '어머님들 점심회동'이 대부분인지라 그때는 술을 마실 일이 없다. 다들 커피를 음료로 곁들이는 마당에 대낮부터 술을 주문할 수 있을리도 없고, 내가 그렇게까지 술을 고집하는 술꾼도 아니다. 다만 낮맥은 남의 말이고, 밤에 만날 수 있는 친구는 없으니 오늘처럼 남편이 회식에 간 날이면 왠지 새치름한 마음이 든다.


 아직 어린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에게 밤의 술자리는 연례행사와도 같다. 생일이라든지, 송년회라든지, 아주 특별한 날, 특별한 핑계가 있어야만 만들 수 있는 이벤트가 된다. 그래서 이렇게 빨래를 개키다가도 맥주 한 캔을 따고, 어린이집에 가는 길에도 갑작스럽게 맥주 한 잔을 찾게되는, 불과 술을 마시기 10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술을 마실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던 그런 술의 추억이 생긴다. 하루가 멀다하고 신촌의 밤거리를 헤매던 대학 시절에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형태의 술자리다. 그렇다고 지금 내 옆자리를 지키는 아이들의 다정다감함과 그 충만함을 생각해보면 그건 술자리의 아쉬움에 비할 게 아니기 때문에 지금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게 더 많은 양꼬치와 살얼음 쏘맥이 쥐어지기만을 바랄 뿐.


 냉장고 문을 닫는 순간 몇 시간 후 시원한 술을 마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듯이, 신나서 술잔에 술을 따르는 순간 다음 날 숙취로 머리가 지끈지끈할 가능성이 열리듯이, 문을 닫으면 저편 어딘가의 다른 문이 항상 열린다. 완전히 '닫는다'는 인생에 잘 없다. 그런 점에서 홍콩을 닫고 술친구를 열어젖힌 나의 선택은 내 생애 최고로 술꾼다운 선택이었다. 그 선택은 당장 눈앞의 즐거운 저녁을 위해 기꺼이 내일의 숙취를 선택하는 것과도 닮았다. 삶은 선택의 총합이기도 하지만 하지 않은 선택의 총합이기도 하니까. 가지 않은 미래가 모여 만들어진 현재가 나는 마음에 드니까. p. 68


 먼 곳에 살고 있던 친구가 그립고 아쉬운 날, 팟캐스트를 들으며 왠지 아쉬움을 달랬다. 술에 대한 지고지순한 철학을 가지고 있는 주류(!) 언니들(언니들이 맞나?)이 있으니 이날의 혼술은 유쾌하고 즐거웠다. 먼 해외에서 듣는 모국어의 음성도, 맥주랑 잘 어울리는 유쾌한 책도 모두 다 일상의 바이브였다. 김혼비 작가님의 <아무튼, 술>은 그 어떤 책보다도 술과 어울리는, 술술 넘어가고 끝내주게 재미있는 책을 찾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삼천포 책방에서 김혼비 작가님의 책을 소개하던 단호박님의 목소리를 빌려 글을 마무리해본다.

"일단 잡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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