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혼비 작가의 <아무튼, 술>
나에게는 어떤 대상을 말도 안 되게 좋아하면 그 마음이 감당이 잘 안 돼서 살짝 딴청을 피우는, 그리 좋다고는 하지 못할 습관이 있다. 말도 안 되게 좋아하다 보면 지나치게 진지해지고 끈적해지는 마음이 겸언쩍어 애써 별것 아닌 척한다. 정성을 다해 그리던 그림을 누가 관심 가지고 살펴보면 괜히 아무 색깔 크레파스나 들어 그림 위에 회오리 모양의 낙서를 마구 해서 별것 아닌 것처럼 만들던 여섯 살 적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말도 안 되게 좋아하는 걸 말이 되게 해보려고 이런저런 갖다 붙일 이유들을 뒤적이기도 한다. 그래서 술을 좋아하는 것 같다. 술은 나를 좀 더 단순하고 정직하게 만든다. 딴청 피우지 않게, 별것 아닌 척하지 않게, 말이 안 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채로 받아들이고 들이밀 수 있게. p.14
블랙 시스루 원피스를 입고 세미 스모키 화장을 한, 누군가의 결혼식에서 부케를 받은 후 바로 족발집으로 온 게 거의 분명해 보이는 삼십대 초반의 여자가 혼자 낮술을 마시는 모습은 누군가에게 다소 을씨년스러운 상상을 불러일으킬 만했을것이다. 비운의 여자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짝사랑해온 사람의 결혼식에서 어떤 얄궂은 운명의 흐름에 의해 부케까지 받고 찍어지는 마음을 술로 달래는 비운의... 곧 결혼할 예정이라 친구 결혼식에서 부케까지 받았는데 겨우 잊었던 첫사랑과 우연히 재회하는 바람에 거세게 흔들리는 마을을 진정시키는 비운의... 그러거나 말거나 소주잔을 연신 비우니 살짝 취기가 돌며 더욱 기분이 좋아졌고, 새콤하고 쫄깃한 냉채족발에 첫맛은 쓰고 뒷맛은 단 소주가 어우러질 때마다 마음이 간질간질해졌으며, 시선들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시원소주 한 병 반과 냉채족발 소짜 한 접시를 말끔히 비우고 일어서며 안 먹고 갔으면 크게 후회할 뻔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언제 또 마주칠지 모를 사람들 때문에 언제 또 마주칠지 모를 냉채족발과 반주를 놓치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p. 114
냉장고 문을 닫는 순간 몇 시간 후 시원한 술을 마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듯이, 신나서 술잔에 술을 따르는 순간 다음 날 숙취로 머리가 지끈지끈할 가능성이 열리듯이, 문을 닫으면 저편 어딘가의 다른 문이 항상 열린다. 완전히 '닫는다'는 인생에 잘 없다. 그런 점에서 홍콩을 닫고 술친구를 열어젖힌 나의 선택은 내 생애 최고로 술꾼다운 선택이었다. 그 선택은 당장 눈앞의 즐거운 저녁을 위해 기꺼이 내일의 숙취를 선택하는 것과도 닮았다. 삶은 선택의 총합이기도 하지만 하지 않은 선택의 총합이기도 하니까. 가지 않은 미래가 모여 만들어진 현재가 나는 마음에 드니까. p. 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