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오은의 옹기종기> 142회와 관련하여 최근에 읽은 김규진 작가의 <언니, 우리 결혼할래요?>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몇 번이고 노력했지만 글이 쓰일듯 쓰일듯 안 쓰였다. 어쩌면 동성애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나 이야기를 다루기에는 나의 경험이 너무 부족해서 글감이 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글은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95%의 이성애자의 세상에서 5%의 동성애자가 살아가는 삶을 상상해보기 위해서 책을 읽던 나는 내가 95%의 다수가 아닌 5%의 소수자의 입장에 있었던 다른 경험을 끌어오게 되었다. <언니, 우리 결혼할래요?> 속의 한 문장이 그 계기였다.
삶의 단계를 비슷하게 밟아가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건 큰 힘이 된다. p.19
그래서 이 이야기는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다름'을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경직된 시선에 대한 글이다. 내게도 삶의 단계를 비슷하게 밟아가는 사람들이 주변에 없었던, '대한민국의 평균에서 동떨어졌던 경험'이 있다. '다르다'는 사실은 찬성할 것도, 반대할 것도 없는 그저 다른 것 뿐이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옳다, 그르다의 영역으로 가져와 아주 손쉽게 재단하고 만다. 그리고 그 대상이 20대의 어린 여성인 경우에는 더 쉬워진다. 세상으로부터 후려침을 당한, 20대의 나를 떠올리다보니 아주 오래전에 방송되었던 49회 <삼천포 책방>의 여러 이야기들도 함께 떠올랐다. 그래서 오늘의 글은 두 방송이 계기가 되어 쓰게 되는, 책과 팟캐스트와 개인적인 경험이 이리저리 뒤섞인, 그러나 언젠가는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다.
나는 대한민국 여성, 중산층, 비장애인, 4인 가정의 남매 중 하나로 태어나 현재 삼십대중반을 거치고 있는 80년대 후반생이다. 공장형 웨딩을 거쳐 지금은 유부녀 11년차이고, 어쩌다보니 주재원으로 나온 남편을 따라 해외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평범하고 평탄한 인생을 살아왔다. 나와 비슷한 시대에 태어나 비슷한 성장배경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은 정말 수두룩빽빽하고, 위에서 언급한 김규진작가도 아마 나와 많은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그런 내가 대한민국이라는 경직된 사회에서 표준정규분포표 저 바깥으로 튀어져나간 적이 있었다. 유부녀가 되는 과정에서 그랬다는 점에서 김규진 작가와 조금 비슷할 순 있겠다. 95%의 이성애자들의 사회에서 5%의 동성애자가 살아가는 사회처럼. 정확한 정규분포곡선을 알 수가 없어 대체 내가 몇 퍼센트쯤에 위치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체감상 5%보다 저 아래쯤에 자리잡았던 경험.
사실 과거형은 아니고 언제까지나 현재형일수밖에 없는, '젊은 엄마'의 이야기다.
그렇다. 젊은 엄마다. 현재 서른 다섯먹은 내가 나를 스스로 '젊은 엄마에요.'라고 지칭하기는 어렵지만 한때 무진장 젊은 엄마였고, 지금은 적당히 젊은 엄마다. 임신했을 당시에는 만 스물 셋, 출산할 당시에는 만 스물 넷. 당시 육아잡지에서 언뜻 스쳐봤던, 통계청보고 평균 초산연령은 내 기억에 따르면 만 31.8세였다. 평균에서 떼구루루 굴러나와 있다는 건, 삶의 단계를 비슷하게 밟아 나가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찾기 어려운 외로운 길을 걸어간다는 뜻이다. 평균은 평균일 뿐이므로, 보통 흔히들 말하는 '할 때 되서 하는' 20대 후반의 결혼과 비교해보면 고작 삼사년 정도 더 빨랐을 뿐인데, 세상은 그런 나를 참 신기하게 바라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했다.
한국나이로 스물여섯살에 만삭의 배를 가지고 대학캠퍼스를 누비는 스쿨버스를 타본 적이 있는가? 버스안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배려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그냥 나를 좀 쳐다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 하며 대학원 연구실로 출근했다. 신촌역 4번 출구에서 대학원 연구실이 있는 유억겸기념관까지는 구글지도로 찍어보면 직선거리로 2.7킬로미터가 나오는데, 심지어 오르막길이다. 학교버스는 불편한 시선의 집합소였지만 배뭉침이 잦아서 조기진통의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이후로는 그래도 꼬박꼬박 버스를 챙겨탔었다. 나는 지금 현재 아무런 범법행위도 하지 않았으며(임신이 범법행위라는 게 더 이상하지만) 합법적으로 일 년 전에 이미 혼인신고를 마친 법적유부녀라는 사실을 내 마음속에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당함은 사람들의 시선을 순화시켜주지 않았다. 20대의 예비엄마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차가웠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놓고 내 배와 얼굴을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보았다. 대학캠퍼스라는 이질적인 공간에서 임신부는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책읽아웃> 49회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은 20대를 너무 하대한다. 지금 20대를 되돌아보니 당시의 내가 얼마나 제대로된 대우를 받지 못했는가, 세상이 얼마나 나를 얕잡아봤는가. 그런 경험담을 나누며 자신의 20대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나도 그랬다.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어떤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대학캠퍼스와 예비맘이라는 신분을 벗어나 실제로 아이를 출산한 이후까지 계속되었다.
나이가 어땠던지간에, 20대이건 30대이건 40대이건 동등한 존재라는 인식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사회는 나이로 계급을 나눈다. 너는 어리고 미숙하다며 얕보는 무리가 있었다. 20대가 30대에 비해 미숙한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어차피 엄마는 누구나 처음인데? 다 인생 1회차 아닌가요? 라고 되묻고 싶었다. 적게는 서너살, 많게는 열다섯살까지 나보다 나이가 많은, 그러나 아이들의 나이는 다 똑같은 엄마들의 모임이 있었다. 아이를 낳고 나면 새로운 '애엄마친구'를 만드는 데 있어서 엄마 나이는 중요하지 않고 아이들 나이가 중요하다고들 말한다. 그렇지만 정말 엄마나이를 알게 되었을 때 나보다 한참 어린 사람이 무리에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다같이 ㅇㅇ엄마 혹은 ㅁㅁ씨, 라는 호칭이 모임 내에서 암묵적으로 정해진 공통의 호칭이었는데, 모임이 서너번 반복되면서 서로의 나이가 드러난 순간 누군가 내게 말했다. "정현씨는 저한테 '씨'라고 부르면 안돼죠. 언니라고 부르세요." 그리고 모두가 엄마는 처음이라, 모두가 서툴고 힘들었을 육아의 순간에 나는 공감하면 안됐다. "자기는 20대라서 체력이 좋잖아. 내가 네 나이 때 애키웠으면 하나도 안 힘들었을거야." 테이블에 의자가 모자라면 체력이 좋은 내가 서 있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관절에 문제가 있을 노약자도 아니고, 고작 서너살 차이의 이십대 후반과 삼십대 초반의 체력차이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그러나 나는 그 나이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체력과 노쇠함을 나의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되었다. 언니들께서 더 피곤하다 하시면 그런 거였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런 나와 비슷한 삶의 단계를 밟아가는 주변인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나보다 네 살이 많은데 아이도 네 살이 많은, 그리고 나보다 두 살이 많은데 아이도 두 살이 많은, 이렇게 나와 '같은 나이에 아이를 출산한' 언니들이 동네에 딱 두 명 있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삶의 궤적을 나보다 몇 년 앞서서 그려가는 그 언니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나누어주며 앞으로 닥쳐올 세상의 하대와 그에 대해 유연하게 대처해주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언니들이 전수해준 팁 같은 것에는 이런 것이 있다. 반모임에서 엄마들이 나이를 소개할 일이 있으면 절대 "86년생이에요."라고 말하지 말고 "서른 세살이에요."라고 말하라고. 태어난 연도를 말하면 나보다 몇 살이 어린지 확연하게 드러나지만, 대부분의 애엄마들은 서른중반즈음부터 자기 나이를 제대로 세는 걸 그만두기 때문에 서른셋이라는 숫자가 그렇게 적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교에서 제일 어린 학부형이 우리 반에 있습니다."라고 모두가 모인 총회에서 말씀하시던 1학년 담임선생님의 개인신상노출사건라든지, "대체 그 나이에는 무슨 생각으로 애를 낳는 거에요?"라고 무례한 말을 무례한 줄 모르고 하던 동네엄마의 이야기 같은 것이 떠오른다. 언니들 역시도 당시에는 너무 당황스럽고 어린 사람이 약자인 우리 사회에서 눈치가 보여 화도 못해다가, 나중에서야 내게 이야기를 해주며 같이 화를 내고 같이 응어리를 풀어갔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주변에 내게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다음에서 <나는 엄마다>를 연재하고 있는 순두부작가님도 나와 같은 나이에 아이를 출산한 사람 중 하나다. 2017년에 이 에피소드를 보며 얼마나 웃었는 지 모른다.
여기에서는 아무도 어떤 남자가 이상형인지 왜 연애를 하지 않는지 나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졸업 후 결혼하고 애를 낳아 가족을 꾸릴 거라는 보편적인 가정을 그 누구도 하지 않았다. 내 정체성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할 필요도 없었다. 비로소 나는 동질집단에 속하게 된 것이다. p. 18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어떤 기준과 다르거나 혹은 그에 미치지 못할 때, 그리고 자신이 '다수'에 속해있을 때 권력을 가졌다고 느낀다. '다름'을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시선을 생각해보면, 정규분포표 반대편에 있을, 아주 늦은 나이에 첫 출산을 한 어떤 집단에게도 그들만의 애환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삶의 단계를 비슷하게 밟아가는 사람들이 주변에 없기 때문에 외로울 것이다.
책읽아웃 삼천포책방 49회에서는 늦은 나이에 소설가가 된 와카타케 치사코의 소설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를 소개하며 '지각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학교에 가고, 더 늦은 나이에 취업하고, 늦은 나이에 결혼하고,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고. 지각인생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사람들은 괜찮다고, 너는 너만의 때가 있는 거라며 토닥거리며 위로를 한다. 그런데 지각이 아니라 조금 더 훌쩍, 앞서 가버리는 인생은 다들 어떻게 바라볼까? 남들보다 훨씬 빨리 졸업을 하면? 훨씬 더 먼저 취업을 하면? 내가 아는 동생은 중고등학교를 계속 월반하는 바람에 대학교를 남들보다 수년 먼저 들어가서 대학 4학년이 될때까지 미성년자 신분으로 술집에 가질 못했다. 그렇지만 그 에피소드를 이야기할 때마다 다들 신기해하며 웃음의 소재로 삼을 뿐, 동질집단에 속하지 못했던 소외감과 외로움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삶의 발달과업의 평균적인 속도에서 늦춰진 사람들의 초조함은 많이 이야기되고 위로받지만, 오히려 그 과정을 앞서 밟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저 배부른 투정으로 치부되곤 한다. 혹은 이렇게 글로 길게 풀어써야 하는 장황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대한민국의 평균에서 동떨어진다는 것, '다르다'는 사실은 찬성할 것도, 반대할 것도 없는 그저 다른 것 뿐이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옳다, 그르다의 영역으로 가져온다. 동성애도, 출산연령도. 그러나 나이도, 성적지향도,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찬반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계급을 나누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조금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