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의 교실에서 자신만의 리듬을 묻다
얼마 전, 예능 프로그램 <티처스>를 보다가 흥미로운 장면을 보았다. 수능 영어 강사 조정식이 듣기 평가를 들으며 동시에 독해 지문을 풀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적절한 멀티태스킹 요령을 가르치고 있었다. 시험지 배치를 바꿔가며 듣기 문제와 독해지문을 병렬 처리하는 법을 설명해 주는 데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학창 시절의 내가 떠올라서.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이후에도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할 우리 아이들이 생각나서.
수능 영어 시험장에서 시간이 부족한 이유는 무엇일까. 작년도 수능 시험지를 보니 생각보다 지문이 길었고, 그걸 꼼꼼히 다 읽고 해석하고 답까지 내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결국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는 핵심만 빠르게 훑고 정답을 찾아내는 요령을 익혀야 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이 시험이 대체 무엇을 평가하려는 건지, 문득 시험의 본질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수능은 대학수학능력시험, 즉 대학에서 학문을 수학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이다. 말 그대로 대학에서 학문을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을 묻는 시험이 아닌가. 그런데 정말 이 시험은 그 목적에 부합하고 있을까? 학문을 위한 능력이란 것이, 짧은 시간 안에 긴 텍스트를 얼마나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가로 귀결되어야 하는 걸까? 1초에 수만 단어를 읽는 인공지능이 함께하는 이 시대에? 평균적인 고등학생이 시간 안에 모든 문제를 풀기조차 빠듯한 이 시험에서, 진정한 학문적 사고나 언어적 깊이를 요구하는 문항이 얼마나 될까?
내가 생각하는 ‘학문을 수학할 능력’이란, 깊은 사고와 느린 사유에서 비롯된다. 학문이란 원래 '오랜 시간 깊이 생각하는 능력'을 전제로 하는 행위다. 빠르게 읽고, 빠르게 답하는 능력은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실용적 스킬일 수는 있겠지만, 진정한 사고력이나 성찰과는 거리가 있다. 한국 시험장에서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학문적인 성숙이라기보다는 공장 위 컨베이어 벨트 위를 지나가는 부품처럼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과업을 마쳐야 하는 표준화된 정보 처리 속도에 가까워 보였다. 문득 찰리 채플리의 영화 <모던 타임스>가 생각났다. 산업사회에 맞는 표준화된 인간을 길러내는 시스템처럼, 우리는 지금 학생들에게 일종의 ‘속독 생산성’을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속도 중심 평가'의 단면은 내 아이의 교실 안에서도 마주할 수 있었다. 지난가을, 첫째 아이가 한국 중학교에서 보낸 첫 학기 교내 수학 시험을 마치고 와서 "모르는 문제는 없었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두 문제를 못 풀었어."라고 말하는 것 아닌가. 직접 문제지를 보니 평소 아이의 실력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다만 아이는 '정해진 시간 안에 해결하는 훈련'이 덜 되어 있었다.
최근에 첫째 아이는 근처 청소년센터에서 웩슬러 지능검사를 받았다. 임상심리사인 엄마가 보기에도 검사 결과는 매우 흥미로웠다. 시공간 지표와 유동추리 지표, 즉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패턴을 파악하는 능력은 모두 상위 1% 수준으로 매우 우수하게 나왔지만, '처리 속도' 지표는 평균 이하로 나왔다. 다시 말해, 아이는 문제를 '잘' 푸는 아이지만 '빠르게' 풀지는 못하는 아이였다.
첫째 아이는 유년기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냈다. 천성이 느긋하고 신중한 편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경험해 온 IB 프로그램 안에서는 정확한 이해와 자기 속도대로 문제를 푸는 능력이 더 중시되었다. 속도보다는 사고의 깊이를 우선하는 환경에서 성장한 것이다. 그런 아이에게 한국의 시간제한적 과업들은 일종의 문화 충격이었다. 아이는 한국식 빨리빨리 문화에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현실의 시험은 이 '속도 부족'을 근거로 아이의 수행 능력을 낮게 평가한다. 과연 그게 정당한 평가일까?
시험의 본질이 정말로 '학문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었다면 사고의 깊이와 정확성에 더 방점을 두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한국 교육은 그 깊이를 볼 새도 없이 '속도'에 모든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듯하다. 사유보다 속도, 탐구보다 요령, 천천히 생각하는 대신 빠르게 처리하는 능력. 우리가 기르고 있는 것은 사고하는 인간이 아니라 반응하는 인간일지도 모른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빠른 정보 처리 능력은 유용한 기술이다. 비즈니스 현장이나 일상 속에서 다량의 정보를 짧은 시간에 처리해야 할 때도 많다. 하지만 모든 교육이 그것만을 목표로 해도 괜찮은 걸까? 특히 공교육 교육과정에서, 그리고 대학 입시를 좌우하는 수능 시험에서조차 '빠름'이 미덕처럼 여겨진다면?
지금의 교육은 아이들에게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빨리 알 수 있느냐?"를 묻는다. 그 결과 학생들은 '생각하는 법'이 아니라 '빠르게 답을 찾는 법'을 배운다. 더 많은 양을, 더 빨리 처리하고자 어린 시절부터 선행학습을 '달린다'. 긴 글을 읽고 충분히 숙고하는 시간은 사치가 된다. 한 편의 텍스트를 오랜 시간 동안 곱씹기보다는, 빨리 훑고, 진도를 빼고, 핵심만 뽑아내는 능력이 중시된다. 책을 읽으며 단어 하나하나를 음미하기보다 몇 초 안에 핵심을 캐치하는 법을 배우고, 영어 지문은 더 이상 ‘읽는 것’이 아니라 ‘해치워야 할 대상’이 된다. 내가 보기에 그건 사고력이나 수학 능력이 아니라 일종의 '기술'이다.
우리는 교육의 본질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것일까?
모든 아이가 같은 속도로 생각할 수는 없다. 그리고 꼭 그럴 필요도 없다. 어떤 아이는 생각이 빠르지만 얕고, 어떤 아이는 느리지만 깊다. 교육이 평가해야 할 것은 그 깊이와 넓이이지, 단지 속도만은 아닐 것이다. 언어란 소통이고, 독해란 사유이며, 읽는다는 행위는 세계를 해석하는 인간의 방식이다. 그 본질을 외면한 채 훈련된 기술만을 평가하는 시험은, 결국 깊이를 잃은 인간을 양산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 교육은 잠시 멈춰 서서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인간을 기르고 싶은가?
내 아이는 느리다. 하지만 그 느림 속에서 빛나는 고유한 리듬이 있다는 걸 엄마인 나는 안다. 나는 그것이야말로 이 아이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믿는다. 깊이 있는 생각은 천천히 도착한다. 그 느림을 기다릴 줄 아는 교육, 그 느림을 존중할 줄 아는 사회에서, 아이가 나답게 자기답게 자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