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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시험이 사라진 세상

<내가 행복한 곳으로 가라>에서 만난 문장

by 주정현


하지만 지도조차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완전히 새롭고 낯선 곳을 탐험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게임의 규칙이 계속 바뀌는 세계, 지도와 나침반도 소용없을 정도로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안갯속 세상에서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힘을 기르려면 책과 교과서, 어른들이 주입하는 상식에 갇히지 않아야 합니다.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벗어나 나의 특별한 느낌과 행복한 경험이 담긴, 나만의 비밀지도를 만들어 나가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장소와 공간에 대한 감수성은 필수이고요. 부모님이나 선생님, 어른들의 말은 참고만 하고 내 마음 깊은 곳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게 우선입니다.

김이재, <내가 행복한 곳으로 가라> 132쪽


학령기의 세 아이들을 키우면서 자주 떠올리는 사고 실험이 있다. 만약 한국 사회에서 수능 시험이 사라진다면? 수능이 없는 세상에서는 나는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어떤 삶의 방향을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어떤 자질을 기르는 데 집중하게 될까?


수능은 절대적인 제도가 아니다. 국가가 정한 기준이고, 사회가 만들어 놓은 입시 제도일 뿐이다. 수능 시험은 아이의 잠재력을 정확히 비추는 도구도 아니고, 내 아이를 평가하는 절대적인 잣대도 아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이 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이 '수능'이라는 작은 틀 안에서 아이를 키운다. 그중에 가장 기이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개설된 의대입시반과 고등 수학을 선행하는 학군지의 수학학원인데, 오랫동안 해외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니 이 비정상적인 시스템 바깥에 있는 건 우리가 유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2학년인 큰 아이를 비롯해서 우리 아이들은 셋 중 그 누구도 수학학원이라는 곳을 다녀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살던 한국 바깥의 세상에는 '수능'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초등학생들이 고등 수학을 몇 년 앞서 배우겠다며 학원을 다니는 사람도, 그것을 가르쳐주는 학원도 그곳에는 없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오니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어린아이들조차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학령기에 접어드니 아이의 시간, 관심사, 노력의 방향까지 '그래서 걔는 결국 수능 몇 등급 받았는데?'라는 기준으로 수렴된다. 저마다 각기 다른 모양과 색깔로 12년을 보냈을 텐데, 이렇게 학창 시절이 하나의 수치로 요약되고야 마니 실로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학창 시절에 수능을 치렀고, 그 관문을 꽤 성공적으로 통과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성과를 낼 수 있는지, 어떤 전략이 효과적인지 잘 안다. 하지만 아이에게 같은 길을 반복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가 갔던 길을 그대로 아이에게 걷게 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선택일까. 길을 아는 사람은 나지만 그 길을 걷는 사람은 아이다. 그리고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다시 걷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선택이다.


입시 성공은 세상을 살아가는 무수한 길 중 하나일 뿐이고, 수능은 그 길을 비추는 하나의 지도일 뿐이다. 수능은 단순하고 뚜렷한 목적지를 제시해 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 지도를 따라 맹렬하게 달린다. 우리는 점점 더 '잘 달릴 수 있는 아이'를 만들지만, 잘 넘어지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달리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넘어질 수 있을 텐데. 잘 넘어지는 법보다 잘 달리는 법만 가르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중요한 감각들을 놓치고 있는 걸까.


수능이라는 지도가 사라진 세계를 상상해 본다. 정해진 길도, 도착지에 이르는 최단 거리도 없다. 게임의 규칙은 끊임없이 바뀌고 안개는 짙게 깔려 시야를 가린다. 그곳에서 살아가긴 위해선 '지도를 읽는 법'이 아니라 '길을 감각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정해진 지도가 영원히 유효한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있다. 기준은 자주 바뀌고,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경로는 누구도 미리 알 수 없다. 수능이 없는 세상, 혹은 수능 점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세상. 그곳에서 우리가 길러야 하는 건 '길 위에서 넘어질 줄 아는 아이' 그리고 '넘어진 자리에서 나만의 방향을 감지하는 아이'가 아닐까. 그러니 우리는 아이에게 '지도'보다 먼저 '나침반'을 건네야 한다. 바깥의 좌표가 아닌, 안쪽의 방향을 감지하는 감각을, 지식을 받아들이는 속도보다 경험을 통과해 나가는 깊이를, 그리고 외부의 성공보다 자기 안의 울림에 반응하는 능력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오늘도 상상해 본다. 수능이 없는 세상이라면 나는 아이를 어떻게 기르고 싶은가? 수능이 없는 세상에서 내가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이 아이가 시험으로 평가받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어떤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을까? 시험이 사라진 자리에 우리가 세워야 할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까? 교과서와 상식, 정답과 커트라인 바깥에서 자기만의 감각을 키우는 법. 누구의 것이 아닌 '내가 행복한 곳으로 가는 길'을 만드는 일. 그것이 어쩌면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훈련이 아닐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늘 내 머릿속에만 맴돌 뿐이다. 수능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건 내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일 뿐 아이가 자라는 현실에서는 여전히 입시가 중심에 있다. 아이가 평가받는 삶과 무관하게 자유롭게 자라기를 꿈꾸지만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곧 시험의 그림자 아래에서 살아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교실에서 흘러나오는 대화 하나, 학부모 모임에서 오가는 말들, 사소한 일상까지도 결국 수능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수렴된다. 나는 때때로 아이에게 '이 길만이 전부는 아니야'라고 말하지만 나에게조차 그 말이 공허하게 들릴 때가 있다. 나조차도 그 길 바깥의 삶을 충분히 상상하거나 감히 선택하지 못한 채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길 바깥의 삶. 그리하여 나는 아이에게서 시선을 돌려 이미 수능 시험의 굴레에서 벗어난 사람, 즉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나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본다. 정해진 길이 없는 이 세계에서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과연 나는 내 인생의 나침반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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