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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시멀리스트의 변명

<모스크바의 신사>에서 만난 문장

by 주정현


우리는 가장 소중히 여기는 물건에 작별을 고하는 법은 경험으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물건과 작별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배우려 들지 않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친구에 집착하는 것보다 더 극성스럽게 소중히 여기는 물건에 집착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꽤 많은 비용과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그 물건들을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옮긴다. 표면의 먼지를 떨고 광을 내면서, 가까이에서 너무 거칠게 노는 아이들을 나무라기도 한다. 그런 물건들에 계속해서 추억이 쌓여 점점 더 중요성을 띠게 되는 것을 허용한다.

에이모 토울스, <모스크바의 신사> 30쪽


가장 소중히 여기는 물건에 선선히 작별을 고할 수 있는가. 대세가 미니멀리즘이라지만, 나는 이 문제에 관해서만은 기꺼이 트렌드를 거스르는 삶을 살고 있다. 물건과의 작별은 나에게 작별 중에서도 가장 힘든 종류에 속한다. 그러니까 나는 맥시멀리스트다.


정돈된 일상을 위해 떠나보낼 줄 아는 사람이 되자는 다짐은 오래된 장롱에서 추억을 하나 꺼낼 때마다 무너졌다. 그건 단지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거기에는 내가 살아온 시간과 감정이 녹아 있었고, 내가 지켜내고 싶었던 나의 역사가 담겨 있었다. 나는 차마 그것들을 대충 스쳐 지나갈 수가 없었다.


예를 들자면 중학생 첫째가 갓난아기였을 때 쓰던 신생아 슬링. 그건 단순한 육아용품도 천 쪼가리도 아니다. 그건 내 품에 꼬물거리며 안기던 아기의 온기, 젖먹이며 꾸벅꾸벅 졸던 내 초보 엄마 시절의 진땀과 사랑, 그리고 유난히 따뜻했던 어느 봄날 오후를 통째로 담고 있는 시간의 그릇이다. 그리고 나는 그 그릇에 둘째를 키우면서 쌓였던 추억과 셋째를 키우면서 빚어낸 추억을 함께 담았다. 나는 지금도 그 슬링을 고이 개켜 눈에 잘 보이는 서랍에 넣어 두었었는데, 계절옷을 정리할 때마다 슬링을 꺼내 먼지를 털면서 언젠가 손자 손녀를 품에 안을 일이 생기면 그 슬링을 써야지, 하고 생각한다. 요즘 같은 저출산의 시대에 과연 그 쓰임을 확신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손자 손녀들까지 슬링으로 안아준 후라면, 그래서 정말로 그 쓰임이 다한 후라면 나는 이 물건과 선선히 작별할 수 있을까? 아니, 아마도 그건 더더욱 불가능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슬링 안에는 손자 손녀의 체온까지 새겨질 테니, 나는 그 기억까지 놓아야 한다. 누가 나에게 그걸 하라고 할 수 있을까? 이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이 슬링은 내가 죽어서 화장할 때 같이 태워버리든지, 관짝에 같이 묻어야겠다고.


물건은 시간을 품고 있다. 맥시멀리스트인 나는 결국 시간을 품은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라고 거창하게 주장해 본다.) 나는 소유를 통해 시간을 간직하고, 기억을 이어 붙이며, 존재의 흔적을 붙들고 산다. 미니멀리스트들이 '버리기 연습'을 하듯, 나도 '남기기 연습'을 해왔던 것 같다. 어떤 이들은 떠나보내는 연습을 하며 삶을 정제하지만, 나는 남기는 연습을 하며 삶을 더듬어 본다. 나는 내가 사랑한 시간들을 쉽게 떠나보내지 못하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한 시절의 온기를 담은 슬링 같은 물건들을 버리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러니까 나는 오늘도 조금은 무겁게 살아간다. 추억이라는 짐을 메고, 시간을 품은 물건들과 함께. 봄옷을 정리하다가 옷장 속의 신생아 슬링을 발견하고 애틋하게 쓰다듬으며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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