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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Jul 15. 2020

남편의 전여친

 어젯밤의 일이다. 페이스북 친구추천에 남편의 전 여자친구가 떴다. '함께아는 친구 15명'이라는 타이틀을 달고서. 15명 중 14명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남편의 친구들이었는데, 마지막 15번째 친구가 얼마 전 나와 새로 친구가 된 이웃나라 작가님이셨다. 새로운 연결고리가 생기니까 페이스북이 또다시 '너네 아는 사이지?'하고 쿡 찔러보았다. 무서운 페이스북같으니. 알긴 알지... 아, 이게 또 이렇게 연결되는거야? 헤에.. 세상은 진짜 좁구나. 하며 신기해하고 있을 즈음에 문득 깨달음이 왔다.


'상대편에게도 내가 친구추천으로 떴겠지?'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사귀기 시작한 이후로도 여러 번 모임에서 만났다. 다만 서로 살갑게 말을 나눈 적은 없었다. 모임 때마다 함께 자리잡은 친구들이 알아서 그녀와 나의 자리배치를 테이블 대각선 끝에서 끝으로 유도했기 때문이다.

 나와 남편은 대학교 동아리 선후배로 만난 사이로 서로 다섯 학번 차이다. 그리고 남편은 내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 그러니까 그가 새내기였던 시절에 동갑내기 동기와 연애를 했던 적이 있다. 남편이 신입생이었던 때에는 내가 중학생이었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차마 연애대상으로 바라볼 수 없던 나이였고, 그 당시에 있었던 일은 서로를 알기 전 그냥 과거의 일이었을 뿐이므로 그 때의 이야기를 굳이 수면 위로 꺼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자세한 히스토리는 알 수 없지만 남편은 아마 3년 정도, 그러니까 대학교 3학년 즈음까지 연애를 했던 모양이다. 언젠가 나보다 세 살 많은 동아리 선배K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새내기였을 때에는, ㅇㅇ선배(남편)가 동아리 공식커플이었거든. 우리는 그 선배들이 진짜 결혼까지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복학하고 보니까 웬 새내기랑 사귄다 그래서 깜짝 놀랐지 뭐니?"


 그렇다. 같은 집단에서 서로다른 상대와 연애를 두 번 한다는 것은, 다음 주자가 끊임없이 이런 이야기를 듣게 만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나와 내 남편이 지극히 싫어하는 선배K가 참 생각없고 무례했던 것도 맞다.




 그녀와의 첫만남은 정말 지금 생각해도 뜨악스러웠다. 우리가 오랫동안 '썸'만 타다가, 공식적으로 사귀기로 했을 때(우리 오늘부터 1일이야.), 전 남친이자 현 남편인 그는 그 날 바로 자신의 과거를 고백했다. 우리는 모두 같은 학교에 같은 동아리였고, 그러니까 그녀가 내 선배이기도 하고, 게다가 내가 바로 다음학기에 동아리 부회장이 되어 학번구별없이 모든 선후배를 대상으로 매우 까불거리기로 예정되어있었기 때문에... 알 건 알아야 했다. 원래 애인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 일은 연애초반에는 특히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혹시모를 미연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불안한 예감(?)은 적중했는데,

 한 달 뒤 3월에, 바로 일이 터졌다.


 대학가의 3월은 바쁘다. 특히 동아리같은 초극성 사회집단에 뼈를 묻기로 결심했던 나같은 대학교 2학년에게는. 3월은 동아리 신입생을 모집하는 기한이었고, 주어진 모든 공강과 자유시간을 신입생 선발에 열을 올렸다. 나와 남편이 속했던 동아리는 우리학교에 오는 교환학생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문화교류(라 쓰고 술이라 읽지만)를 하는 동아리로, 그 특수성으로 인해 일반학생과 해외대학에서 오는 교환학생 모두에게 동아리를 알려야 했다. 문제는 교환학생들은 보통 메인캠퍼스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어학당과 국제학사가 있는, 큰 산(?)을 하나 넘어야 갈 수 있는 외진 캠퍼스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굳이 그 먼 데까지 동아리를 홍보하겠다고 공강시간마다 산을 넘는 학생들은 별로 없었다. 물론 이번학기에 전방위적으로 까불거리기로 마음먹은 나는 예외였지만.

 그래서 동아리 회장은 중앙도서관과 학생회관이 있는 메인캠퍼스에서, 그리고 나는 동쪽 후미진 구석에 있는 국제캠퍼스에서 각자 홍보데스크를 운영하기로 했다. 회장은 공대생이었고, 나는 사회과학대 수업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학생회관 앞과 달리 사람의 왕래가 별로 없는 국제캠퍼스에서 데스크를 운영한다는 것은 너무나 외롭고 지루한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당시 친하게 지내고 있던 동기들 몇을 꼬드겨 함께 데스크를 지키게 되었다. 수업시간 중에는 복도를 왕래하는 학생들이 별로 없었으므로, 우리끼리 데스크에서 하루종일 수다를 떨다가, 10분 남짓한 쉬는시간에 쏟아지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팸플릿을 나눠주는 일을 했다. 데스크에 있는 우리는 넘쳐나는 시간 동안 서로의 시시콜콜한 근황을 있는대로 털어놓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갓 시작한 나의 연애이야기는 그 무엇보다 싱싱한 토크주제였다.


 그런데 그렇게 수다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낯익은 사람이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였다.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지만 나는 보자마자 한 눈에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한 달 전쯤, 그녀의 신상정보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싸이월드 파도타기를 네번쯤 거쳐 그녀의 미니홈피를 찾아내는 쾌거(?)를 이루었고, 남아있는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가며 사진을 보고, 보고, 또 봤었기 때문이다. 동아리방에 있는 낡은 앨범에서 수년 전에 찍힌 동아리 단체사진을 찾아다가, 코딱지만한 남친의 옛날 얼굴을 찾아내고 나면 항상 그 옆자리에 있었던 얼굴이기도 했다. 물론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건 동기들 중 나 혼자였고, 이미 학부를 졸업한 그녀였기에 선배인 그녀도, 후배인 우리들도 모두 초면이었다. 국제학 캠퍼스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그녀는 자신이 학부 때 활동하던 동아리 이름이 건물 로비에 걸려있는 걸 보고 반가운 마음에 다가온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00학번, ㅁㅁㅁ에요. 여기 선배인데... 반가워서 왔어요. 후배들한테 간식이라도 사주고 싶어서."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이세요? 그런데 00학번이세요...?"


 그 순간 내 동기의 눈이 흘깃 나를 향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 나는 그 순간 그녀석을 꼬드겨 이 자리에 함께 오게 된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그럼, 같은 00학번에 ㅇㅇㅇ선배님 아세요?"

"네? 네... 알아요."

"흐흐흐. ㅇㅇㅇ선배님 어땠어요?"


 그러니까, 대화의 너무 많은 축약은 좋지 않다. "지금 직장인인 ㅇㅇㅇ선배님의 모습을 보면 저희는 옛날 모습을 잘 모르겠는데, 그는 신입생 때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라든지, "동기로서 ㅇㅇㅇ선배에 대해서 알려주실 게 있으신가요? "라든지, 뭔가 더 구체적인 질문이라면 차라리 나았을까... 아니다. 그것도 이상하다. 무슨 질문이었든지간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 순간 사실 다 이상한 대화였을 것이다. 그러나 5분전까지 나의 연애담에 기꺼이 장단을 맞춰주고, 지금은 어떻게든 짖굿게 나를 놀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나의 동기는,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기에 순진할 수밖에 없었던 질문을 날린다. "그는 어땠어요?"라는. 그녀에 입장에선 3년만에 갑자기 옛남친은 '어땠냐는' 질문을 받는 셈이었고, 그 모든 대화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정말.... 어디로든 숨고싶었다.


 대화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내 대뇌 속 혼돈의 카오스로 인해서 기억중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듯 싶다. 나는 동기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찔렀지만, 그는 그저 내가 부끄러워서 그랬다고만 생각했다. 동아리 부회장인 내가 나서서 그녀의 전화번호를 받고, 인사를 드리고, 어찌저찌 그날의 대화를 마무리했지만 나는 그날 "제가 ㅇㅇㅇ의 여자친구입니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왠지 할 수 없었다. 제가 그 선배와 사귀고 있어서 제 친구들이 지금 저를 놀리는 거에요. 정도로는 말해둘걸, 하고 나중에 이불 속에서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는 '연애의 퀄리티는 서로 함께한 시간에 비례한다.'고 믿고 있던 시절이라, 3년 남짓 만나왔을 그녀에 비해 이제 만난지 한달이 갓 지난 나는 아무것도 댈 게 아니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날의 흐지부지한 대화와 어정쩡한 만남을 보고 나는 내가 '졌다'고 생각했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웃긴 생각이다. 지고 이기고 할 게 뭐가 있었으랴. 그러나 그날 속상한 마음에 안주도 없이 맥주 1.5리터를 한 시간만에 들이키고, 속이 뒤집어지고, 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그에게 전화해서 펑펑 울어대고.... 다음 날 숙취로 엄마에게 등짝스매싱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도 누군가의 결혼식이나, 졸업한 선배들이 다같이 모이는 자리에서 몇 번 그녀를 마주쳤던 적이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새파랗게 어린 여친을 굳이 동기모임에 데려오는 구남친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이 어땠을까 상상해보려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는 구남친마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녕 나의 남편은 옴므파탈이었던 것일까. 바람한번 피지 않고, 헤어질 만한 단 한번의 위기도 없이 5년의 남짓한 연애를 거쳐 우리는 결혼했다. 나와 그가 만난 시간이 3년을 넘어갔을 즈음에는 나도 이게 지고 이기고 할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는, 나름의 연애 경험이 차곡차곡 쌓였다.


 남편을 처음 만난 지 15년이 지났다. 얼마 전에는 결혼 10주년이었다. 어쩌면 나도 역으로 그녀의 페이스북 친구추천에 뜰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황급히 내 프로필사진이 뭐였는지 열어본다. 할슈타트 호수 앞에서 남편과 세 아이들과 함께 해맑게(혹은 약간 빙구같이) 웃고 있다. 남편이랑 같이 찍은 사진 말고 나만 등장하는 사진으로 바꿀까, 잠깐 고민하다가 피식 웃으며 그만뒀다. 이게 뭐라고. 십수년전 싸이월드 파도타기 하던 실력으로 약간의 페이스북 염탐질은 조금 했지만... 어제의 그 작은 해프닝 때문에 나름 지루한 일상에 단비처럼, 아슬아슬한 연애의 감정을 조금 느껴보게 되었다.


 글을 쓰고보니 남편이 나중에 이 글을 읽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남편도 브런치 계정이 있긴 하지만 자주 방문하지는 않으니까... 얼른 글을 많이 발행해서 이 글을 저 멀리 뒷편으로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시콜콜한 연애담이지만 글을 쓰는 동안에는 정말 즐거웠다. 아마 하루종일 남자친구 생각만 하며 빨리 그와 결혼하고 싶어 안달난 20대 초반의 내가 기억 속에서 살아났기 때문일 것이다. 10년 전에 잠들었던 연애세포를 콕콕 건드려주는 느낌. 이게 얼마만의 연애감정인지 모르겠다. 요즘은 너무 '엄마'로만 살아왔다. 이상하게도 출근한 남편이 빨리 보고싶어지는, 그의 얼굴을 보면 왠지 배실배실 웃음이 나올 것 같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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